105화
“하-암.”
“윤석현 에스퍼.”
길게 하품하던 윤석현은 눈치를 주는 부센터장의 부름에 쩝, 입맛을 다셨다. 어차피 저쪽은 신경도 안 쓰는 것 같은데. 턱을 괸 윤석현은 응접실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센터장과 이상철을 번갈아 보았다. 둘은 서로를 부수고 태워버릴 듯 노려보고 있었다.
지루해. 재차 하품한 윤석현은 그들의 반대쪽에서 떨고 있는 도지원을 바라보았다. 도지원뿐만 아니라 토벌대원들 모두 서로를 의지한 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그렇게 압박감이 심한가? 주먹을 죔죔 쥐며 고개를 갸웃거린 윤석현은 소파 팔걸이를 움켜쥐고 있는 센터장을 응시했다.
그렇다기에는 느껴지는 게 너무 없는데….
팔짱을 푼 윤석현은 테이블 위에 손을 올려두고 쓰윽, 쓸어내렸다. 이능을 사용하는 것과 동시에 테이블이 품고 있던 기억들이 물밀듯이 몰려들었다. 또 이러네. 끙, 작게 신음을 흘린 윤석현이 제멋대로 엉킨 기억을 분류했다. 누군가 시간을 되돌린 순간부터 모든 기억이 이런 식이었다. 길게 늘어지는 기억은 과거, 선명한 기억은 현재. 부지런히 기억을 정리하고 있을 때, 누군가 어깨를 짚었다.
“잠시.”
센터장의 비서였다. 테이블에서 윤석현의 손을 부드럽게 떼어낸 비서가 곤란하다는 듯 눈썹을 늘어트렸다. 이어지는 목소리가 조곤조곤했다.
“죄송합니다. 지금 이능을 사용하시면 두 분을 자극할 것 같아서요.”
“그래요? 정신계가 공격계를 자극할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미처 몰랐다며 호들갑을 떤 윤석현이 비서에게 잡힌 제 손을 빼내며 팔짱을 꼈다.
“이럼 되겠죠?”
“부탁드립니다.”
윤석현은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물러나는 비서를 보다 손바닥 아래에 고인 식은땀을 문질렀다. 방금 뭐였지? 비서와 손이 닿는 순간 끝없는 심연으로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다시는 접촉하고 싶지 않은 기분에 몸서리친 윤석현은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기억을 정리했다.
‘자자, 고집 그만 부리고 이만 비켜줍시다, 센터장님. 아니, 정영환 에스퍼.’
‘아무런 피해도 없는 게 확실한가.’
‘우리 오빠- 진- -게 –워요?’
‘….’
짤막한 기억 말고는 대부분 뭉개지거나 희미한 기억뿐이었다. 다른 기억들보다 잡음이 섞인 기억에 흥미가 갔다. 한 번 더 보면 확실해질 것 같은데. 입술을 핥던 윤석현은 미소를 보내는 비서에게 마주 웃어주었다. 저렇게 감시하고 있으니 이능을 사용할 수도 없고. 볼에 바람을 넣은 윤석현은 발끝을 까딱거리며 그나마 얻은 기억을 펼쳤다.
네 번째 기억 속 멍하니 주저앉아 있던 사람은 강차헌이 분명했다. 첫 번째 기억은 자신인 것 같았고. 엿가락처럼 흐물거리는 기억을 보아하니 과거의 기억이 분명했다. 왜 우리가 같이 센터장실에 있었던 거지? 윤석현은 고개를 돌려 강차헌을 바라보았다.
강차헌은 다리뿐만 아니라 팔짱도 꼬고, 고개도 꼬고, 하여튼 꼴 수 있는 건 다 꼰 채로 센터장을 노려보고 있었다.
심기가 불편해보이니 건드리지 않는 게 좋겠군. 저렇게 눈에 불을 켜고 있는 사람에게 우리가 과거로 돌아온 것 같은데 뭐 아는 거 있냐고 물어보기는 좀 그랬다. 깔끔하게 포기한 윤석현은 바들바들 떨고 있는 도지원에게 손을 내밀었다.
“왜, 왜요?!”
따져 묻는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참나, 방금까지만 해도 자신의 결백을 증명해달라고 울며불며 매달릴 땐 언제고. 헛웃음을 흘린 윤석현은 큰소리에 다가온 부센터장에게 손을 까딱였다.
“보고서 주세요.”
“아, 잠시.”
“그리고 이거 언제 끝나요? 저 곧 낮잠 잘 시간인데.”
입이 찢어져라 하품하자 이상철이 눈싸움을 멈추고 이쪽을 돌아보았다. 누가 이상원과 부자지간 아니랄까 봐 쭉 찢어진 눈매가 똑같았다. 웃을 때 눈이 가늘어지는 것도 역시. 아니, 아들이 실종되었다는데 웃음이 나오나?
“저도 좀 볼 수 있을까요?”
나긋한 목소리에 도지원이 눈치를 보자, 센터장이 둘 사이를 가로막았다.
“말했잖나. 센터 내 기밀이라고.”
“제가 그것도 모르고 고집을 부리겠습니까. 저는 그저 제 아들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실종되었는지 알고 싶을 뿐입니다.”
“알고 싶다면 어떻게 센터에 출입했는지 먼저 알려주지 그러나.”
“말씀드렸잖습니까. 아비 된 자로서 아들을 걱정해 호신용품을 챙겨줬다고. 센터장님도 아시듯 저는 우리 상원이랑 달리 제가 곧 불이고, 불이 곧 저라 불이 있는 곳은 어디든 갈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 상원이가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 달려왔을 뿐입니다. 칠칠맞은 아들놈이 여기에 두고간 모양이라 센터로 온 것 같은데…. 아니, 제가 사리 분별을 못 한 건 죄송합니다만, 아비가 실종된 아들을 찾으러 온 게 그렇게 수상쩍은 일입니까?”
“자네가 나타난 곳이 이상원 에스퍼가 실종된 던전이라면 상관을 안 하겠다만, 이곳은 내가 살피는 센터일세. 다른 곳도 아니고 훈련장에 타 소속 에스퍼가 나타나면 자네라도 경계하지 않겠나?”
호소력 짙은 얼굴로 부탁하던 이상철은 센터장의 말에 팔짱을 끼며 진하게 웃었다.
“그래서, 돌아가라?”
센터장이 고개를 끄덕이자, 두 사람은 다시 서로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지겨워. 흰 눈으로 천장을 노려보던 윤석현은 도지원이 내미는 보고서를 받아들었다. 옆에 앉은 도지원의 눈이 울먹울먹했다.
“저 진짜 억울합니다.”
그러면 놀라서 도망이나 가지 말던가. 코웃음을 친 윤석현은 한 손으로 슬렁슬렁 보고서를 넘겼다. 반대 손으로는 도지원의 손을 잡고 기억을 읽어 들이며 보고서와 토벌대의 행보를 비교했다. 팔랑, 팔랑, 보고서를 넘기는 소리가 날 때마다 토벌대원들은 초조한 얼굴로 윤석현의 눈치를 살폈다.
평소에는 그렇게 꿔다 놓은 보릿자루 취급을 하더니. 장난이나 쳐볼까. 고민하던 윤석현은 보고서의 마지막 장을 읽어 내렸다.
18. 샐리멘더
-화염 지네를 토벌하고 이동하기도 전에 엄청난 수의 샐리맨더가 나타남.
-연료가 저장된 꼬리를 자른 뒤 목을 잘라 처치함.
-화염 저항 아이템이 통하지 않아 방어막을 치는 동안 이상원 에스퍼가 대부분의 샐리맨더를 처리함.
19. ?
-화상을 입은 선승지를 치료하는 사이 이상원 에스퍼와 동떨어짐.
-뒤쫓으려는 순간 누군가 낚아챔.
누군가. 마수가 아니라 사람이다?
보고서를 내려둔 윤석현은 손에 힘을 주며 집중했다. 도지원이 당시 상황을 숨기지 않은 덕에 기억을 뒤지기가 수월했다. 눈을 감은 윤석현은 도지원의 훈련복을 잡아채는 하얀 잔상을 바라보았다. 뚜렷한 형체가 없는데도 이상하게 낯이 익었다. 눈을 뜬 윤석현은 흥미 없는 얼굴을 하고 앉아있는 강차헌을 바라보았다.
그래, 강차헌 옆에 붙어 다니던…. 그… 한연화의 오빠, 한연우. 그 사람이었다.
토벌대에 들어갈 정도로 존재감이 크진 않았던 것 같은데. 던전엔 어떻게 들어간 거지? 발끝을 까닥거리던 윤석현은 탁, 소리가 나게 보고서를 덮었다.
“보고서랑 다른 점은 없는데요?”
“제 말 맞잖아요.”
윤석현의 말에 도지원이 억울한 표정으로 센터장에게 말했다.
“화염 저항 아이템이 효과가 없어서 잠시 자리를 피했을 뿐이에요. 이상원 에스퍼랑 팀을 이룬 게 몇 년인데 그런 오해를.”
도지원의 시선은 센터장을 향해 있었지만, 변명의 대상은 이상철이었다. 절대 이상원에게 해를 끼칠 만한 일은 하지 않았다고 온몸으로 주장하는 도지원의 말에 이상철의 어깨 부분에서 열이 피어오르며 일렁거렸다.
“당신들 혼자 살겠다고 도망쳤고, 그래서 내 아들이 실종된 거다?”
이상철이 웃음을 흘리자 숨을 타고 불꽃이 넘실거렸다. 그때, 얌전히 앉아있던 강차헌의 발끝에서 얼음 덩굴이 솟아오르더니 도지원의 앞에 얼음벽이 세워졌다.
“여기 그쪽 길드 아니거든요.”
“아하….”
하늘빛 얼음벽과 강차헌을 보는 이상철의 눈이 호승심으로 불타올랐다. 주황색 불꽃이 튀어 오르는 걸 보던 강차헌 역시 다시금 얼음 덩굴을 피워냈다.
“이게 뭐 하는 건가!”
센터장의 호통에도 두 사람의 대치는 이어졌다. 길게 하품한 윤석현이 이마에 맺힌 수증기를 닦아내던 순간, 허공에 길게 금이 그어졌다. 그 틈에서 무언가 하늘하늘 떨어지자 부센터장이 얼른 달려가 낚아챘다.
“에스퍼 인권 위원회?”
파랗게 질린 부센터장이 숨긴다고 열심히 숨겨 보았지만 방을 채우고 있는 사람들은 일반인이 아니라 에스퍼였다. 몇 미터 밖에서도 마수를 조준하는 에스퍼가 봉투에 쓰인 발신자를 못 본다? 그건 에스퍼도 아니지.
이상철의 중얼거림에 센터장이 부센터장의 손에서 봉투를 빼앗았다. 내용을 확인하던 센터장의 고개가 휙, 돌아가 강차헌을 바라보았다.
“왜 날 봐요?”
삐딱한 목소리에도 대꾸 없이 편지의 내용을 곱씹던 센터장은 미간을 문질렀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건가?”
내가 뭘. 강차헌이 발끈했지만, 질문의 대상은 부센터장이었다. 다그침에 부센터장뿐만 아니라 토벌대원들도 눈치를 봤다. 뭔진 몰라도 저 사람들이 다 같이 짜고 강차헌을 친 모양이었다. 서늘한 침묵에도 이상철은 아랑곳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소환장인 것 같은데, 지금 당장 가보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잠깐. 가시기 전에 제 아들놈 찾을 수 있도록 수색권만 잠시 넘겨주시죠.”
이상철의 요구에 센터장의 턱에 힘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 죽어도 싫겠지. 이상철이 센터장의 자리를 놓고 정영환과 싸웠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센터장이 그토록 이상원을 경계하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긴, 청하 길드를 물려받을 수 있는데 센터에 입사한 것부터가 좀 수상쩍었지. 이상원이 토벌대 대장이 되었을 때도 아버지가 못 이룬 소망을 아들이 이룬다는 말이 돌기도 했고.
“알아서 할 수 있네.”
“음, 그렇다면 왜 곽지후 에스퍼가 여기 있죠?”
모두의 시선이 공격대장에게 향했다. 알아서 할 수 있다면 왜 지금 당장 찾으러 가지 않고 여기서 미적거리냐는 시선을 보낸 이상철은 고개를 돌려 강차헌을 바라보았다.
“강차헌 에스퍼도 그렇고.”
나지막한 중얼거림은 센터 소속도 아닌 강차헌까지 부를 정도면 자력으로는 해결이 어려운 거 아니냐는 말로 들렸다.
“그냥 게이트 좌표만 넘겨주시죠. 다른 건 안 건드리고 우리 아들이 무사한지만 살피고 오겠습니다.”
불안하시면 곽지후 에스퍼가 동행해도 괜찮고. 그 말에 공격대장의 얼굴이 환해졌다. 대놓고 안심하는 공격대장을 노려보던 센터장이 입술을 깨물던 순간이었다.
다시 한번 허공에 금이 가며 봉투가 떨어졌다. 자신의 손위로 떨어진 봉투를 확인한 강차헌은 망설임 없이 내용물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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