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책의 주인공이 공이 된 이유-106화 (106/143)

106화

“그쪽도 오라는데요.”

“네?”

윤석현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강차헌이 내미는 봉투를 받아들었다. 발신인은 역시나 에스퍼 인권 위원회였다.

출석 요구서에서 자신의 이름을 발견한 윤석현이 이능을 사용했다. 봉투의 기억을 읽어 들이자 협회 직원들이 영상을 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마… 강차헌이 가상 던전 훈련을 받을 때 같은데. 가이드도 없이 에스퍼 둘만 참여한 모습에 혀를 찬 직원이 봉투를 전송하는 모습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그래, 그건 신고당할 감이긴 한데….

눈을 뜬 윤석현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데 나는 왜 부르는 거지? 당한 건 내가 아니라 강차헌이랑 한연우인데?

“형은 왜 안 불러요?”

강차헌 역시 궁금했는지 부센터장에게 물어보고 있었다. 머뭇거리는 부센터장을 보던 이상철이 미소를 지으며 대신 설명했다.

“언제였더라, 몇 년 됐죠? 성은현이라고 가이드를 스토킹하던 에스퍼가 있었는데, 본인이 반한 가이드랑 각인해보겠다고 한연화 에스퍼가 쓴 책을 훔쳤다가 난리가 난 적이 있었거든요. 일반인까지 피해를 보자 협회가 수습해보겠다고 서두르다가 한연화 에스퍼를 좀… 압박했었죠. 그 수단이 한연우 에스퍼였고.”

급한 사안이긴 했지만, 좀 치사했죠. 비겁했고. 뒤따르는 말에 센터장이 불편한 듯 헛기침을 흘렸다. 센터장을 빤히 쳐다보던 강차헌은 계속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돌한 태도에도 이상철은 기분 상한 기색 없이, 오히려 흥미가 돋는다는 얼굴로 강차헌을 바라보며 설명을 계속했다.

“그때 한연화 에스퍼가 협회장한테 뭐라고 맞받아친 줄 알아요? 한연우 에스퍼 머리카락 한 올만 상하게 해 보라고, 그러는 순간 협회는 물론이고 당신 손자 미래까지 말아먹을 줄 알라면서 아득바득 소리치는데…. 어린 나이에 누구의 도움 없이 자신의 손으로 오빠를 지키겠다는 모습이 참 맹랑했고, 또 용맹했죠. 아무튼 그 사건 이후로 한연우 에스퍼는 협회에 출입이 금지되었어요. 다른 거 궁금한 건 없어요?”

“없어요.”

단답에 이상철은 대놓고 강차헌을 빤히 쳐다봤다. 그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핸드폰을 내려보던 강차헌이 윤석현에게 눈짓했다.

“가죠.”

윤석현이 엉거주춤하게 일어나자 그를 바라보던 강차헌이 허리춤에 매인 훈련복을 건드렸다.

“제대로 입고.”

* * *

차헌은 협회로 가는 차 안에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연우에게 전화를 걸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객님께서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전화를 끊은 차헌이 다시 한번 전화를 걸자 산발이 된 머리카락을 정리하던 윤석현이 돌아보았다.

“정화 작업 중인가 본데, 조금 있다가 다시 걸어봐요.”

어설픈 참견에 눌러두었던 불안감이 증폭했다. 그곳은 정화 작업을 할 필요가 없는 곳이었고, 연우는 벨 소리에 굉장히 예민한 사람이었다. 전화를 못 받는 이유가 뭘까. 차헌은 초조한 얼굴로 핸드폰을 두들기다 마중 나온 라운드 길드장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여긴 어쩐 일로 오셨대요?”

윤석현의 질문에 손수 문을 열어주던 라운드 길드장이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할 질문이었는데. 어쩐 일로 센터 밖으로 나오셨대?”

대답 대신 소환장을 보여주던 윤석현이 묘한 눈으로 협회 건물을 쳐다보았다. 차헌 역시 온갖 마나가 일렁이는 건물을 올려보다 연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역시나 받지 않는다.

“이번에 센터장님이 일을 저질러도 단단히 저질렀나 봐? 작정하고 다 모았던데. 한연화 에스퍼도 부를 정도면 아예 잘리는 거 아닌가 몰라.”

“그럼 한연우 에스퍼도 오나요?”

“당연히.”

라운드 길드장과 함께 협회로 들어가던 윤석현이 차헌을 힐끔거렸다. 들었죠? 그러니 들어오라고 윤석현이 손짓하자 차헌의 어깨에서 긴장이 풀렸다. 한연화 에스퍼가 머무는 곳도 아공간이라 했으니 전화 연결이 안 될 수밖에 없었다. 동생 데리러 간다고 연락은 해주지. 차헌은 원망을 담아 핸드폰을 노려보다가 건물 안으로 향했다.

앞서가던 라운드 길드장이 차헌을 바라보았다.

“이상원 에스퍼는 어떻게 됐어요? 찾았어요?”

“아직요. 센터장이 청하 길드장이랑 대화 좀 해보겠다고 우리보고 먼저 가라고 하던데요.”

“와, 말해도 돼요? 센터장이 기밀이라고 그렇게 신신당부했는데 오자마자,”

“다 봤으면서 뭘 물어요?”

“뭘요? 강차헌 에스퍼가 라운드 길드장님에게 정보를 넘겼고, 라운드 길드장님이 청하 길드장에게 전달했다는 거요? 당연히 봤죠.”

윤석현은 자신을 무시하는 거냐며 새초롬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결과는 만족스러워요?”

모르겠다. 차헌은 말없이 한숨을 쉬었다. 연우가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 것 같으니 그를 돕기 위해 일을 크게 벌려준 것뿐이다. 이게 잘한 짓인지, 못한 짓인지 확인을 받고 싶은데 연락이 되질 않으니….

“강차헌 에스퍼님은 이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직원의 안내에 차헌은 방으로 들어가다 말고 전화를 걸었다. 안내 음성에 초조함이 발목을 휘감았다. 그때 위치추적기도 달 걸 그랬다. 귀를 감싸 쥔 채 울먹이는 연우의 모습에 마음이 약해져 보류했던 게 후회되었다. 차헌은 방에 앉아있는 남자와 핸드폰을 번갈아보다 거칠게 의자를 빼며 앉았다.

“강차헌입니다. 빨리하고 끝내죠.”

“노력하겠습니다. 일단 조사에 앞서 이런 일이 발생한 것에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강차헌 에스퍼.”

차헌은 사과와 설명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본론을 꺼내라고 재촉했다. 차헌의 채근에 직원이 서둘러 화면을 열었다. 잠시 후, 영상이 재생되었다. 노이즈가 튀는 화면 속에서 차헌과 연우는 동굴을 둘러보고 있었다.

“이날, 기억나십니까?”

“네.”

가상 던전 훈련 날의 영상이었다. 빠르게 재생되던 영상은 동굴 벌레가 둘을 에워싸는 순간부터 느리게 흘러갔다. 차헌은 왁왁거리는 자신과 반대로 침착한 연우의 모습을 보며 목덜미를 문질렀다.

아, 이때 각 잡고 멋있는 모습을 보여줬어야 했는데….

“언제부터 마수들이 홀로그램 마수가 아니라는 걸 알았습니까?”

“저는 몰랐어요. 한연우 에스퍼가 알려줘서 알았지.”

“훈련용 환상 마수, 그러니까 홀로그램 마수와 실제 마수를 구분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습니까?”

“네.”

차헌은 조사에 고분고분 임하다가, 조사가 길어지자 대답에 점점 신경질이 묻어나왔다.

“이거 다 답해야 하는 건가요?”

“아무런 설명 없이 영상 제보만 들어와서요. 전후 상황을 판단하기 위한 질문입니다. 불편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차헌은 제보라는 단어를 곱씹었다. 마침 영상에서 증거를 모으기 위해 공략을 계속해야 한다는 연우와 당장 그만두자고 주장하는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앞으로 좀만 돌려줄 수 있어요?”

직원은 기꺼이 화면을 돌려주었다. 차헌은 거미를 피해 도망 다니는 연우를 보다가 팔찌에 시선을 주었다. 아니, 수상한 건 둘째 치고. 한숨을 쉰 차헌이 마른세수했다. 저 때 왜 그런 고집을 부렸을까. 조금이라도 빨리 나갔어야 했는데. 한숨을 쉰 차헌은 영상에 집중했다.

“언제 제보받은 거예요?”

“정확한 시기는 말씀 못 드리지만, 일주일쯤 되었습니다. 조사에 들어가기 전 조작 여부를 판단해야 했기 때문에 이제서야 조사가 시작된 점 사과드립니다”

뭔 사과를 저렇게 해? 차헌은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가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일주일 전이면 2주만 기다려달라던 연우의 부탁과 시기가 얼추 맞았다. 제보자는 형이겠군. 확신한 차헌은 자세를 바로 했다.

갑자기 성실해진 차헌의 태도에 직원은 반색하며 질문을 이어 갔다.

“가상 던전 훈련 관련 질문은 여기서 끝내고, 이제 배재영 에스퍼에 관련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끝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벌떡 일어났던 차헌은 질문이 이어지자 엉거주춤 자리에 앉았다.

“배재영?”

차헌이 말끝을 올리자 직원이 화면을 넘겨 배재영의 얼굴을 띄웠다. 아, 훈련에 미쳐있던 에스퍼.

“배재영 에스퍼, 그리고 한연우 에스퍼와 함께 게이트에 휘말렸던 사건을 기억하시나요? 혹시 그때 별다른 특이 사항은 없었을까요?”

질문을 듣는 순간 불안이 몰려왔다. 연우를 두고 홀로 던전에서 튕겨나왔던 기억에 손끝이 잘게 떨렸다. 차헌은 감정의 동요로 휘날리는 얼음결정을 쳐다보다 시선을 돌려 핸드폰을 내려봤다. 왜 연락이 안 되는 거지.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초조함을 숨기지 못하고 발끝을 탁탁탁 내려치던 차헌이 이번에는 꼭 위치 추적기를 달아놓겠다고 다짐하며 일어났다. 그대로 연우를 찾으러 가려 했던 차헌은 저를 붙잡는 손길에 서늘하게 내려보았다.

“왜요?”

“그, 아직 조사가 끝나지 않아서…. 금방 끝내겠습니다.”

호언장담하는 직원의 말에 차헌은 망설이다 의자에 앉았다. 한연화가 협회로 온다고 했으니, 분명 형도 따라올 것이다. 조금만 진정하자. 심호흡한 차헌이 질문을 들을 자세가 되자 직원이 재차 질문했다. 게이트에 휘말렸을 때 이상한 걸 느끼지 못 했냐고.

기억을 더듬던 차헌은 미간을 문질렀다.

“던전에서 나온 게 아니라 쫓겨나는 기분이긴 했어요.”

“누군가 낚아채는 기분은 못 받으셨고요?”

“네. 왜요?”

“으음. 이건 그냥 저의 추측입니다만…. 이상원 에스퍼 실종 사건에 배재영 에스퍼가 관련되어있는 것 같아서요.”

목소리를 줄인 직원은 센터 직원이 이상원의 요구로 가상 던전에 마수를 풀어놓았다고 자수한 것을 알려주었다. 마수를 어디서 조달했나, 했더니 그 공급처가 배재영이었다고. 위험 구역 어쩌고 하는 말을 흘려들은 차헌이 핸드폰을 내려보았다. 형은 언제쯤 도착하는 거지?

“…해서 한연우 에스퍼에게도 따로 물어봤으면 하는데.”

말끝을 흐리는 직원은 차헌이 쥐고 있는 핸드폰을 힐끔거렸다. 그 시선에 차헌이 핸드폰을 엎어버렸다. 센터 직원들에게 둘러싸여 고생하던 연우와 협회 직원들이 지독하기는 더럽게 지독하다며 혀를 차던 최여름의 말이 떠올랐다. 한연화도 온다고 하니 같잖은 짓거리는 못 하겠지. 차헌은 멈추지 않고 솟아나는 얼음결정을 낚아채며 일어났다. 조사고 뭐고 빨리 연우를 만나 그 사람이 현실에 존재한다는 걸 확인하고 싶었다.

“아, 잠시만요. 강차헌 에스퍼. 마지막 질문입니다. 센터장이 이능을 잃었다는 건 언제부터 알고 계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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