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차헌은 문손잡이를 쥔 채 헛웃음을 흘렸다. 센터장의 마나가 희미하게 느껴지긴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에스퍼들처럼 나이를 먹으면서 마나가 옅어지는 줄로만 알았지, 이능을 잃은 줄은 몰랐다.
…분명 쫓겨나는 그 날까지 이능을 휘두르며 저항했던 것 같은데. 앞으로 10년은 멀쩡해야 할 인간이 이능을 잃었다는 건 달라진 현재에 영향을 받았거나, 아니면 스스로 미래를 바꾸려다 인과율의 부메랑을 맞았다는 거겠지.
“자세한 상황은 조사 중이라 알려드리지는 못하지만, 센터장이 강차헌 에스퍼를 영입하려고 했던 이유가 그것 때문이었다는 건 알고 계셨나요?”
“아뇨. 이상원의 대항마가 되어달라고는 했습니다.”
대항마. 중얼거린 직원이 조사가 끝났다며 문을 향해 손짓했다. 차헌은 밖으로 나오자마자 감각을 곤두세웠다. 손은 이미 연우에게 전화를 거는 중이었다.
-고객님께서 전화를 받을,
전화를 안 받는 거야, 못 받는 거야. 차헌은 초조한 손짓으로 핸드폰을 두들기다 본능이 알려 주는 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익숙한 듯 낯선 마나가 이끄는 대로 향하자 온갖 마나가 일렁이는 문이 보였다.
“오, 일찍 끝났네요? 들어와요.”
문을 열고 나온 최여름이 안쪽을 눈짓했다. 방 안을 꽉 채울 만큼 넓은 테이블을 둘러싸고 에스퍼들이 앉아있었지만 연우는 보이지 않았다.
“이제 무영 길드장이랑 한연화 에스퍼만 오면 끝이네.”
동생이랑 있어서 전화를 못 받는 건가? 차헌은 1이 사라지지 않은 메세지창을 들여다보다 보다가 윤석현의 옆에 자리 잡았다.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긴 윤석현을 내버려 둔 차헌은 연우에게 언제쯤 도착하냐고 연락을 보냈다. 데리러 가고 싶었지만 그러다 길이라도 엇갈리면 큰일이었다. 인정하긴 싫지만, 한연화와 있을 때의 연우는 자신보다 한연화를 우선시했다. 차헌이 전화를 걸었는지, 연락했는지, 이 자리에 있는지 없는지 신경도 안 쓰고 있을 게 뻔했다. 길이 엇갈려 속이 터지느니 얌전히 기다리는 게 나았다.
…진짜 위치추적기를 달까?
“자, 자.”
박수를 치며 시선을 끌어모은 최여름이 핸드폰을 노려보고 있는 차헌에게 신호를 주었다.
“다들 들으셨죠? 우리의 센터장님께서 거하게 사고를 치시는 바람에 그 자리가 공석이 될 것 같아요. 그동안 부센터장이 센터를 끌어가면 좋겠지만, 그 역시 공범이라 면책할 수 없을 것 같고. 이상원 에스퍼가 있다면 두 발 벗고 나섰겠지만, 지금은 자리를 비운지라….”
최여름은 아쉽게 되었다며 어깨를 으쓱거리고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우릴 부른 이유도 그 자리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의견을 묻기 위해서라는데, 어떻게 할래요? 말만 의견을 묻는다는 거지, 센터장이 정해질 때까지만 임시직을 맡아달라고 할 분위기던데, 일단 나는 못 해요. 백두 길드장님도 마찬가지실 거고. 이 자리에 없는 무영 길드장, 청하 길드장뿐만 아니라 모든 길드장이 길드와 센터를 한 번에 신경을 쓰기는 좀, 무리죠?”
백두 길드장에게 동의를 얻은 최여름이 나머지 S급을 둘러보았다. 제일 먼저 손을 든 건 백두 길드 공격대장이었다.
“전 싫어요.”
“저도 싫어요.”
상상만으로도 싫은지 에스퍼들이 손사래를 치자 최여름이 발끝을 까딱거리는 윤석현을 호명했다.
“윤석현 에스퍼는?”
“와, 벌써 귀찮다. 저는 빼주세요.”
의자 깊숙이 몸을 묻는 윤석현에게서 시선을 뗀 최여름이 빙긋 웃었다.
“강차헌 에스퍼는?”
“저요?”
차헌은 고개를 끄덕이는 최여름을 바라보다 헛웃음을 흘렸다.
“아니, 지금 미성년자인 에스퍼에게 센터를 맡기겠다고요?”
“정식으로 맡는 것도 아닌데 상관없지 않아요? 어차피 대리고, 협회가 하라는 대로만 하면 되는 건데 공석으로 비워두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어요? 현재 무소속이니까 치고 빠져도 상관없을 거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며 중얼거리던 차헌은 입을 다물었다. 나…쁘지 않았다. 통제권을 넘기라고 왈가왈부할 필요도 없이, 자신이 센터장이 되는 순간 자연스레 연우는 제 손으로 들어오게 되어있었다. 너희들이 하라고 시키니까 하기는 할 건데, 대가가 있어야 하지 않겠냐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미성년자 각인도 인정해달라고 해야겠다.
“저기, 한연화 에스퍼는요?”
수줍은 목소리에 방 안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눈을 내리깐 채 얼굴을 붉히고 있던 라운드 길드 에스퍼는 싸늘해진 분위기에 덩달아 얼굴을 굳혔다.
“제, 제가 무슨 말실수라도…?”
“한연화 에스퍼는 왜?”
라운드 길드장의 질문에 에스퍼가 눈치를 보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어린 나이부터 오랜 기간 에스퍼 활동을 해오셨고….”
어물어물 말을 잇던 에스퍼는 짓누르는 압박감에 사색이 된 채 외쳤다.
“다른 뜻은 없어요! 그냥 같은 정신계니까 반갑고 또, 계속 동경하던 에스퍼라,”
“그렇지? 우리 애기, 다음부터는 말조심하자?”
에스퍼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준 최여름은 혹여나 다른 누군가 한연화의 이름을 입에 올릴까 봐 입단속에 나섰다. 한연화나 자신이나 똑같은 미성년자인데 취급이 이렇게 달라도 되나. 입을 삐죽이던 차헌은 익숙한 마나가 느껴지자마자 벌떡 일어났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문을 열고 들어온 무영 길드장이 옆으로 물러나자 사방에서 끽, 하고 의자가 끌리는 소리, 헙, 하고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연화였다.
“오실 줄 몰랐는데.”
“참나, 내가 안 오면 오빠 불러서 여기 앉혀놓겠다잖아요. 그 인간들이, 아니 당신들도 마찬가지지. 오빠가 여기 왔다가 무슨 짓을 당할 줄 알고. 비켜요.”
다가오는 에스퍼들을 향해 파리 쫓듯 손짓한 한연화는 자연스럽게 상석을 차지했다. 한연화에게 제 자리를 내어준 최여름이 그녀의 뒤에 섰다. 무영 길드장 역시 뒤에 서자, 백두 길드장은 방긋 웃으며 한연화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로터스 길드장은 발치에 무릎을 꿇으려다 한연화의 눈길을 받고 조용히 물러섰다. 한연화를 둘러싼 네 사람의 기세에 다른 길드장이 머뭇머뭇 주변을 맴도는 동안 최여름이 입을 열었다.
“그럼 마저,”
“잠시만요. 형, 아니, 한연우 에스퍼는, 요?”
턱을 괸 한연화는 최여름의 말을 끊고 질문한 차헌을 바라보았다. 한연화는 말없이 무영 길드장을 가리켰다.
“한연우 에스퍼는 미연의 상황을 방지하려 화상으로 참여하고 계십니다.”
무영 길드장의 손에 들린 둥근 물체를 보던 차헌은 부루퉁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두들겼다.
>보고 있으면서 왜 답장을 안 해요.
>형 동생만 걱정하지 말고 저도 좀 걱정해주고 그래요.
>어디서 보고 있는 거예요? 큐브? 아니면 한연화 에스퍼 집?
>와, 형. 점 하나만이라도 찍어주고 그러자.
>걱정하는 거 알잖아요.
차헌은 원망을 담아 사라지지 않는 1을 노려보았다. 화상 구슬을 향해 핸드폰을 흔들어도 1은 사라지지 않았다. 연우가 뭘 하고 있는지 안 봐도 뻔했다. 한연화 뒤통수만 쳐다보면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겠지. 옆에 있었다면 사람들의 시선은 신경도 쓰지 않고 산발이 된 한연화의 머리카락을 땋아줬을 것이다. 자신이 지퍼를 명치까지 풀어헤치고 다녀도 신경도 안 쓰겠지!
“그래서 무슨 얘기 중이었는데요?”
“아, 사정은 아실 테고. 강차헌 에스퍼가 임시 센터장이 되면 어떻겠냐는 얘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한연화 에스퍼 생각은 어떠십니까?”
설명을 마친 최여름은 조심스럽게 한연화의 눈치를 보았다. 의견을 구한다기보다는 허락을 받는 것에 가까웠다. 신나게 몰아세우던 때는 언제고 인제 와서 자신의 말 때문에 차헌의 미래가 비틀리는 건 아닐까, 걱정하는 것 같았다.
“마음대로 해요.”
그 말에 최여름이 안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연화의 허락이 떨어졌으니 차헌은 좋든 싫든 임시 센터장직을 맡게 될 것이다.
“이것 때문에 우리 오빠까지 들먹이면서 오라 가라 한 거예요?”
반장투표도 이딴 식으로 안 하겠다며 빈정거리는 한연화의 말에 차헌에게 눈짓을 보낸 최여름이 에스퍼들을 둘러보았다.
“음, 이렇게 모이는 것도 쉽지 않은데 다들 통성명이라도 할까요? 서로서로 알겠지만, 초면인 에스퍼도 있으니까? 자, 반갑습니다. 저는 라운드 길드장을 맡은 공격계, 최여름입니다. 이쪽은 정신계 에스퍼 한연화, 그리고 이쪽은,”
박수를 친 최여름이 옆에 선 무영 길드장을 가리켰다. 사람들의 시선에 무영 길드장이 떨떠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무영 길드장, 조슬기입니다. 공격계이고 물을 다룹니다.”
차례차례 순서가 넘어가며 이어지던 자기소개는 어느새 한연화에게 보내는 구애의 춤으로 변질되었다. 차헌은 업적을 줄줄 읊는 옆 사람을 쳐다보다가 자신의 차례가 되자 간단히 공격계 에스퍼라고 소개한 다음 핸드폰을 노려보았다.
>형. 나 S급 사이에 있었더니 기분이 너무 불쾌해요.
>열도 나는 것 같고
>좀 어지러운데
>가이딩 해주면 안 돼요?
“저기요.”
메시지를 보내던 차헌은 퉁명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길드장들을 뒤꽁무니에 달고 온 한연화가 삐딱하게 자신을 내려보고 있었다. 자신은 앉아있었고, 한연화는 서 있었는데도 눈높이가 비슷했다. 그런데도 한연화가 자신을 내려보고 있는 기분이 드는 건 오만하게 치켜올린 저 턱 때문이겠지.
“오빠가 그쪽도 데려오래요.”
한연화는 다른 설명 없이 몸을 돌려 밖으로 빠져나갔다. 벌떡 일어난 차헌이 그 뒤를 쫓아 차에 올라탔다. 무영 길드장이 운전석에 앉자 한연화는 대놓고 몸을 돌려 차헌을 훑어보았다. 차헌 역시 지지 않고 눈에 힘을 주고 있다가, 한연화는 연우가 아끼는 동생이라는 걸 상기하며 눈에 힘을 풀었다.
“오빠가 그렇게 좋아요?”
“네.”
망설임 없는 대답에 한연화가 작게 웃음을 흘렸다.
“왜요? 우리 오빠가 그쪽한테 잘해줘서? 다정해서? 아, 이건 똑같은 말인가.”
“그냥 좋은데요.”
“그냥….”
중얼거린 한연화가 멍하니 차헌과 눈을 맞췄다. 연화와 연우의 닮은 점을 찾고 있던 차헌이 ‘자신과 누나는 그렇게 안 닮았는데.’ 하며 실없는 생각을 할 때 한연화가 작게 중얼거렸다.
“오빠가 당신을 살리고 죽어서가 아니라?”
“뭐?”
한연화가 뭐라고 말을 한 것은 분명한데,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차헌은 귓가에서 웅웅거리는 이명에 눈썹을 찌푸렸다. 그 순간 한연화의 목소리가 귓가에 때려 박히는 듯 크게 울렸다.
“우리 오빠한테 그렇게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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