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연우야! 나 여기 좀 긁어줘!]
차헌이 센터에 도착했을 무렵, 연우는 던전으로 향했다. 던전에 도착하자마자 달려온 드래곤은 곤봉 같은 꼬리로 제 몸 여기저기를 가리켰다. 설명하는 그 순간도 못 견디겠는지 몸을 꼬던 드래곤이 석순에 몸을 비볐다. 우두둑, 석순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몸집을 줄인 드래곤이 연우의 발목을 타고 올라왔다. 연우는 드래곤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꼬리로 가리키는 곳을 손톱으로 긁었다.
[이놈의 다리들은 나올 거면 그냥 나올 것이지!]
자신의 다리에게 역정을 낸 드래곤은 가려움에 몸부림쳤다. 바삐 손을 움직여 드래곤을 긁어주던 연우가 보조 가방을 뒤져 포션을 꺼냈다.
“혹시 모르니까 한번 마셔볼래?”
[으.]
고개를 빼고 포션 병을 바라보던 드래곤이 그대로 고개를 물렸다.
[그거 맛없는 거 아니야?]
“그건 센터에서 준거고. 이건 차헌이가 챙겨준 건데.”
[그럼 조금만.]
마나 포션과 치료 포션을 꺼낸 연우가 고민하다 치료 포션의 뚜껑을 열었다. 조심스럽게 병을 기울여 드래곤의 머리 위로 포션을 한 방울 떨어트리자, 드래곤이 푸르르 몸을 털었다. 잠시 후, 드래곤의 머리가 갈라지며 두 마리로 분리되는 충격적인 광경에 연우가 입을 틀어막았다. 드래곤은 부드럽게 허물에서 벗어나며 넋을 놓고 있는 연우의 손가락을 깨물었다.
[나 조금 더 마실래.]
손바닥에 놓인 허물을 저 멀리 던져버린 연우가 드래곤의 주둥이에 대고 포션 병을 기울였다. 꼴딱꼴딱 받아마시던 드래곤이 살겠다는 듯 길게 한숨을 쉬었다. 연우는 색이 좀 더 진해진 것 같은 비늘을 쓰다듬다 다리가 나올 부분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잠은 좀 잤어?”
[간지럽고 배고파서 못 잤어.]
칭얼거린 드래곤은 꼬리로 홀쭉해진 배를 가리키더니 먹을 건 없냐며 보조 가방을 기웃거렸다. 그런 드래곤을 붙잡은 연우가 한 걸음 내딛자 주변의 풍경이 바뀌었다. 정글형 던전을 둘러보던 연우는 블루베리를 따 드래곤에게 내밀었다.
[나 그냥 너랑 있을래.]
한참 동안 블루베리를 받아먹던 드래곤이 연우의 손가락에 머리를 비볐다. 연우는 걱정을 담아 드래곤의 눈꺼풀을 문질렀다. 보석처럼 반짝거리던 드래곤의 황금빛 눈동자가 평소보다 탁한 색을 띠고 있었다.
“던전 마나 없이도 괜찮겠어?”
[눈만 벗겨지면 끝나니까 괜찮아. 거기서도 미약하지만 던전 마나가 느껴지고.]
어리광을 부리듯 여기저기에 머리와 몸을 비비던 드래곤이 손목에 감겼다.
[혼자 있으니까 외로워서 안 되겠어. 너랑 같이 있어야할 것 같아.]
연우는 옅게 웃으며 팔찌를 내려보았다. 연우 역시 허전한 손목을 내려보며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던 터였다. 가볍게 손목을 흔든 연우가 드래곤의 상태를 다시 한번 점검했다. 허물을 벗은 덕인지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 같던 팔찌의 외형이 이전처럼 매끄럽게 변해있었지만, 탈피가 완전히 끝난 게 아니라 조금 불안했다.
[안되면 아까 그거 조금 더 주면 되잖아. 큐브로 갈 거지? 나 씻고 싶은데.]
“혹시 모르니까 여기서 씻고 나가자.”
호수형 던전으로 이동한 연우는 드래곤이 자맥질하는 모습을 보며 생각에 빠졌다. 큐브로 돌아가기 전에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센터에 들러보고 싶었지만, 도착하는 순간 차헌에게 발각될 게 뻔했다. 그렇다고 협회로 갈 수도 없고. 궁금한데 이대로 기다리기만 해야 한다는 게 조금 답답했다. 이래서 사람들이 연화의 이능에 집착하나….
혀를 깨문 연우는 물기를 털며 다가오는 드래곤을 데리고 큐브로 이동했다. 팔목에 올라탄 채로 큐브를 둘러보던 드래곤인 눈을 가늘게 뜨며 연우를 쳐다봤다.
“왜?”
대답도 없이 폴짝 뛰어내린 드래곤이 냉장고 문을 열며 능글맞게 속삭였다.
[나 없는 동안 차헌이가 다녀갔나 봐?]
“아, 응. 먹고 싶은 거 있어?”
차헌은 금방 오겠다고 약속했지만, 연우의 계획대로 흘러간다면 당분간 큐브에 방문하지 못할 게 분명했다. 다른 건 몰라도 양상추는 빨리 먹어야…지? 샐러드 팩을 들어 올리던 연우는 의미심장하게 웃고 있는 드래곤을 쳐다보았다.
“왜 그렇게 봐?”
[아니, 그냥. 어제 매운 거 먹었어?]
“매운 거? 아니?”
흐흥, 웃은 드래곤은 꼬리를 들어 연우의 입술을 콕, 가리켰다.
[근데 입술이 왜 그래?]
입술? 입술이 왜? 어리둥절한 얼굴로 입술을 더듬자 어젯밤의 기억이 떠올랐다. 몸을 짓누르던 무게나, 끈질기게 달라붙던 손, 입술 사이를 파고들던….
‘조금만 더요.’
차헌의 환영에 연우는 눈을 질끈 감았다. 허리 언저리가 오싹했다. 몸에 남아있는 감각을 털어버리려 고개를 흔들던 연우는 드래곤의 웃음소리에 눈을 반짝 떴다. 평소처럼 깐죽거렸으면 그만하라고 소리라도 질렀겠지만, 드래곤은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게 더 민망해 달아오른 볼을 문지르던 연우는 꽃가위를 집어 들며 밖으로 나섰다.
“빨리 와, 보고서 써야 해.”
[알았어.]
냉큼 따라붙는 드래곤을 손목에 감은 연우가 카시나 옥잠을 바라봤다. 정화 보고를 위해 채집을 해야 했지만, 자르기가 미안할 정도로 옥잠은 볼품이 없었다. 옥잠을 빙글빙글 돌리며 어느 부분을 자르면 좋을지 고민하던 순간이었다.
[연우야!]
물속에서 무언가가 쏘아져 나와 연우의 발목을 낚아챘다. 옥잠에서 뻗어 나온 뿌리였다. 엉덩방아를 찧은 연우가 물속으로 끌려들어 가기 직전, 물뱀처럼 물살을 타고 날아간 드래곤이 입을 벌려 뿌리를 물어뜯었다. 꿈지럭거리며 반항하던 뿌리가 드래곤의 몸을 휘감는 것과 동시에 연우가 단검을 뽑아 들었다.
[이게!]
단검과 꽃가위로 뿌리를 내리찍은 연우가 드래곤을 보호하듯 품에 끌어안았다. 식식거리는 드래곤을 진정시키며 안을 들여다보자 진흙 밑바닥에 카시노 옥잠의 뿌리가 엉겨있었다. 저게 모체였구나. 뿌리를 어떻게 분해하면 좋을지 고민하는 사이 찰박, 하는 소리와 누군가의 손이 목덜미를 잡아챘다.
그 손에 잡혀 순순히 끌려가던 연우는 물가에서 완전히 벗어나자마자 단검을 역으로 쥐고 그대로 내려찍었다. 상대방이 피하는 것과 동시에 공간을 확보한 연우가 꽃가위를 던지자 물 장벽이 솟아오르더니 그 속으로 꽃가위가 빨려 들어갔다. 단검을 바투 쥔 채 경계하던 연우는 익숙한 얼굴에 미간을 찌푸렸다.
“무영 길드장님?”
“놀라게 했다면 사과드립니다. 끌려들어 가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습니까?”
연우는 해명하는 무영 길드장을 보면서도 경계를 풀지 않았다. 센터도 아니고 센터가 관리하는 구역에 다른 길드가 방문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 연우를 지켜보던 무영 길드장이 품에서 봉투를 들어 올렸다.
“한연화 에스퍼께서 찾으십니다.”
“연화가요? 왜요?”
무영 길드장은 진흙이 뚝뚝 떨어지는 연우의 손을 보며 물을 뭉쳐 내밀었다.
“진정하시고 흙부터 씻어내시죠.”
닥치고 봉투나 내놓으라며 다그치려던 연우는 코앞까지 다가온 몽글몽글한 물 덩어리를 노려보았다. 느긋하게 구는 걸 보니 급한 일은 아닌 모양이었다. 작게 심호흡한 연우가 손과 텁텁한 입 안까지 씻어내자 무영 길드장이 손을 가볍게 튕겼다. 보이지 않는 스포이드가 온몸을 빨아들이는 감각과 함께 물기가 제거되고, 손 위에 봉투가 놓였다. 보송해진 손으로 봉투를 확인한 연우는 ‘한연화 귀하’라는 단어에 미간을 찌푸렸다.
“이미 아시겠지만, 이상원 에스퍼 실종사건으로 협회가 S급 에스퍼들에게 출석을 요구한 상태입니다.”
“거기에 연화가 왜 참석해야 하죠? 미성년자인 에스퍼는 출석할 의무가 없는데요.”
“강차헌 에스퍼도 참석하셨습니다.”
“아하. 그럼 서채연 에스퍼도 출석했나요?”
무영 아카데미에 다니고 있는 S급 에스퍼의 이름을 언급하자 무영 길드장이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을 보며 작게 코웃음을 흘린 연우가 봉투를 찢었다. 최대한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출석 요구서를 읽어가던 연우에게 드래곤이 속삭였다.
[연우야, 뭔가 이상해. 물러나.]
뭐가? 한 발짝 뒤로 물러나며 묻던 연우가 귀를 붙잡았다. 피어싱이 있는 자리가 견딜 수 없이 아팠다.
“그거 아십니까?”
“무-,”
무슨 소리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혀끝이 저려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 새끼가?]
연우는 빳빳해지는 몸을 움직여 손목을 움켜잡았다. 가만히. 경고를 마지막으로 사고가 정지되었다. 비틀거리는 연우를 부드럽게 부축한 무영 길드장이 입을 열었다.
“수중계 에스퍼가 주는 물은 함부로 마시지 말라는 말.”
* * *
[연우-, 정신이 –어?]
연우는 멍하니 천장을 올려보다 뚝뚝 끊기는 드래곤의 목소리에 손목을 확인했다. 검은색 체인 사이사이에 꼬인 실타래를 보자마자 벌떡 일어난 연우가 실을 잡아당겼다.
[내 말 -려? 갑- 해, 본체- 어.]
허벅지 벨트에서 단검을 찾으려던 연우는 발목에 달린 구속구에 헛웃음을 흘렸다. 허전한 왼쪽 팔뚝, 텅 빈 허벅지 벨트를 확인하니 그제야 주변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화려하지만 스산하게 느껴지는 골방에는 웬만한 물건은 다 있었지만 유일하게 문이 없었다. 이 나이 먹고 납치되기는 처음인데. 혀를 찬 연우는 안 될 걸 알면서도 팔찌를 쥐고 이능을 사용했다. 드래곤이라도 풀어주려고 했는데. 마나코어를 옥죄는 답답함에 연우는 인상을 쓰며 허공을 노려보았다.
“일찍 깨어나셨군요.”
허공에서 나타난 무영 길드장을 응시하던 연우는 발목을 가볍게 흔들었다.
“연화의 눈치를 보는 줄 알았는데, 아니셨어요?”
마취 성분이 남아있는지 발음이 조금 어눌했다. 그런 연우에게 해독제를 건넨 무영 길드장이 사과를 건넸다.
“죄송합니다, 이렇게 해서라도 떼어내고 싶은 거머리가 있어서요.”
사과도 해독제도 무시한 연우가 팔찌를 숨기며 물었다.
“연화는요?”
“무사하시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침대 옆 의자에 자리를 잡던 무영 길드장이 연우를 보며 쓰게 웃었다.
“이런 상황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참 신기하군요. 가족이라고 무조건 사이가 좋을 순 없는데, 두 분은 참 돈독하단 말이죠.”
잠시 아래를 보고 있던 무영 길드장은 불편한 곳은 없는지 묻고는, 부족한 것이 있다면 호출하라며 침대 옆의 벨을 가리켰다.
“잠이 드신 사이에 피어싱은 모두 제거했지만, 팔찌는 잠금쇠가 없더군요. 죄송하지만 풀어서 주실 수 있으십니까?”
“영구 아이템이에요.”
착용자가 죽어야 제거할 수 있는 아이템이다. 곤란한 표정으로 팔찌를 내려보던 무영 길드장은 구속구를 하나 더 채우겠다며 연우의 손을 들어올렸다.
[이거 싫-.]
드래곤과의 소통이 완전히 차단되자, 감각이 마비된 듯 불편했다. 심장 위에 손을 올리고 호흡하던 연우가 물러나려는 무영 길드장을 붙잡고 물었다.
“저를 납치하신 이유가 뭐죠?”
“납치라니요. 그런 짓을 했다간 한연화 에스퍼의 저주를 받을 텐데. 말씀드렸잖습니까. 한연화 에스퍼께서 찾으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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