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우리 오빠한테 그렇게 고마워요?”
“일단 앉으시죠.”
“대답부터 해요.”
차헌은 소파를 손짓하다 말고 멍하니 손목을 내려보았다. 흉터가 가득한 팔과 얼기설기 꿰매놓은 자국이 선명한 손목. 이상하리만큼 느릿한 움직임. 꿈이구나.
손목을 문지르던 차헌은 느릿느릿 걸어와 소파에 앉는 한연화를 관찰했다. 골반까지 치렁치렁 늘어진 머리카락, 핏줄이 다 터져서 원래의 눈 색을 알아보지도 못할 지경인 눈자위, 그리고 그 사람과 닮은 얼굴.
“다 봤어요?”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됐어요, 나도 거울 속에서 오빠를 보곤 하니까.”
한연화는 소파에 몸을 묻은 채 눈을 감고 있다가 그대로 잠에 빠졌다. 색색거리는 숨소리를 듣고 있던 차헌이 담요를 덮어주려던 찰나, 번쩍 눈을 뜬 한연화가 차헌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물었잖아요, 오빠한테 고맙냐고.”
눈물이 들어찬 눈을 보며 차헌은 대답 대신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아니, 꿇으려 했다. 뼈만 남은 손을 뻗은 한연화가 차헌의 어깨를 붙잡으며 제지하지만 않았더라도, 그날의 일을 사죄하려 했다.
“그쪽이 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당신이 살려달라고 매달린 것도 아니고 오빠가 제멋대로 한 행동이니까. 당신이 사죄한다고 해서 오빠가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눈을 내리깐 채 웃음을 흘리던 한연화가 핏줄 선 눈으로 차헌과 시선을 맞췄다.
“내가 궁금한 건 한 가지뿐이에요. 정말 오빠한테 고마워요?”
“네.”
“얼마나? 오빠를 위해서 뭐든지 할 수 있을 정도예요?”
차헌은 이전처럼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올려보던 한연화가 속삭였다.
“오빠의 복수를 하고 싶지 않아요?”
* * *
눈을 깜박거리자 장면이 전환되었다.
차헌은 어두컴컴한 동굴을 둘러보다 서둘러 한연화의 뒤를 따라 걸었다. 희미한 불빛에 의존한 채로 한참을 걸어 들어가자 우묵하게 패인 드래곤의 레어가 보였다. 그곳을 가리킨 한연화는 튀어 나가려는 차헌을 붙잡았다. 차헌은 들끓는 살기를 억누르려 노력했다.
…그놈이었다. 등에서 꼬리까지 솟아오른 가시, 곤봉 같은 꼬리, 선명한 검은색 비늘. 감은 눈꺼풀이 열리는 순간 황금빛 홍채가 번뜩일 게 분명했다.
“말했죠, 드래곤의 재생력을 우습게 보지 말라고. 작은 조각 하나만 있어도 멀쩡하게 되살아나는 게 드래곤이에요.”
천천히 물러난 차헌은 허탈한 표정으로 두 손을 내려보았다. 저걸 죽이려고 그렇게 애를 썼는데. 그렇게 난도질했는데 살아났다고. 그럼 대체 왜….
“정신 차려요, 약속했잖아. 복수하겠다고.”
한연화의 말에 정신을 차린 차헌은 손목을 흔들었다. 손목에서 찰랑거리고 있던 실리가 차헌의 의지대로 창으로 변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지금 말고는 기회가 없어요. 다음 탈피는 몇십 년 뒤일 테니까. 기회를 보고 단번에 치고 빠져요.”
차헌은 조곤조곤 일러주는 한연화의 목소리에 지그시 눈을 감았다. 목소리의 톤만 다를 뿐, 그 사람과 말하는 방식이 똑같았다. 몸을 풀던 차헌은 목을 빼고 드래곤을 지켜보는 한연화를 뒤로 물렸다.
“왜요? 다칠까 봐?”
따져 묻는 목소리가 사나웠다. 차헌은 드래곤이 깰까 경계하며 한연화를 잡아 앉혔다.
“그새 잊었어요? 나는 이러나저러나 일 년 안에 죽어요.”
손목을 비틀어 잡아 뺀 한연화가 시니컬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바보 같은 우리 오빠는 그것도 모르고, 제 살길 찾으라고 준 책으로 내 살길을 찾더라니까요. 이때까지 챙겨준 게 고마워서 이거 먹고 떨어지라고 선물한 건데, 그렇게 나를 생각할 줄 몰랐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던 한연화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투두둑,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으며 일어났다.
“저게 죽는 순간을 내 눈으로 지켜봐야겠어요.”
“그렇게 슬퍼할 거면, 그때… 왜 말을 안 했습니까. 이상원이나 다른 사람에게 조심, 하라고 알려줬다면….”
최대한 담담하게 말하려고 했지만 결국 원망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사실이었다. 미래를 알고 있는 한연화가 조심하라고 한 마디만 해줬어도, 이상원은 탈주하지 않았을 것이며, 연합팀은 몰살되지 않았을 것이고, 그 사람도 그렇게 죽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말했으면, 뭐가 달라졌을 것 같아요? 이상원이 개과천선해서 마음을 고쳐먹고 연합팀과 짝짜꿍하면서 드래곤을 죽였을 거라고 생각해요? 자기 계획이 실패하자마자 다 같이 죽자고 달려든 인간한테 뭘 바라는 거예요? 지금? 그리고 연합팀한테 알린다고 이상원의 미래가 바뀌었을까요? 똥이나 설사나, 이상원이나 연합팀이나 똑같은 것들이에요. 이상원이 배신한다는 걸 알자마자 뒤통수 갈기고 지들끼리 보상 나누려다가 개죽음을 맞이하는 게 그들이라고요. 내가 그 정도도 못 봤을 것 같아요?”
서늘한 시선으로 차헌을 내려보던 한연화는 이내 자조적인 웃음을 터트렸다.
“내 한마디 한마디가 어떤 파장을 불러오는지, 입을 열기 전에 하나부터 열까지 얼마나 계산해야 하는지 모르죠? 그러니까 그딴 소리를 쉽게 하지. 가서 드래곤이나 죽여요.”
차헌은 신경질적으로 몸을 돌리는 한연화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그대로 뛰어내렸다. 드래곤의 몸통에 착지한 뒤, 그 위를 달리고 있는데 환청이 들리는 것 같았다. 돌아보면 그 사람이 손을 뻗어 붙잡아줄 것만 같은,
[그르르르.]
드래곤의 울림에 정신을 차린 차헌은 발돋움하며 역린을 향해 실리를 휘둘렀다. 창의 머리가 단단한 비늘을 깨트리며 보다 부드러운 살점을 파고드는 감촉이 선명했다. 자루를 바투 잡은 차헌이 있는 힘껏 찔러 넣었다. 창끝에 걸리는 느낌이 나는 것과 동시에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괴로워하던 드래곤이 축, 늘어졌다. 마치 죽은 것…처럼.
거짓말. 이렇게 쉽게.
차헌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드래곤의 비늘을 내려쳤다. 솟아올라야 할 비늘도, 이빨 사이로 피어올라야 할 연기도 없었다. 어떻게 이렇게 쉽게…. 망연자실한 얼굴로 주저앉아있던 차헌은 환청에 뒤를 돌아보았다.
‘강차헌!’
그 사람이었다. 허둥허둥 일어난 차헌은 걸음걸음마다 얼음벽을 세우며 달려갔다. 이번에는 나를 지키고 죽지 못하도록, 내가, 당신을,
“비켜요.”
탁, 소리가 나게 차헌을 밀어낸 한연화는 솟아오른 얼음벽을 두드렸다.
“죽은 거 확실하니까 이것도 치우고.”
“어떻게….”
“그때는 성룡이었지만 지금은 재생한 지 몇 년 안 된, 갓 태어난 거나 마찬가지인 헤츨링이니까요. 못 봤어요? 뿔도 제대로 안 자란 거.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확실히 처리하게 배 좀 갈라줄래요?”
한연화의 요청에도 차헌은 넋을 잃은 표정으로 바닥에 주저앉아있었다. 이렇게 쉽게 죽을 마수에게 그 사람이 그렇게 죽어버렸어. 그런 차헌을 내려보던 한연화는 무표정한 얼굴로 드래곤을 가리켰다.
“그렇게 앉아있는다고 죽은 사람이 돌아온 것도 아니고, 시간을 돌릴 수도 없어요. 넋 놓고 있는 동안 이 새끼는 착실하게 재생하고 있을 텐데, 계속 그러고 있을 거예요?”
재생. 중얼거린 차헌이 실리를 지지대 삼아 일어났다. 얼음벽을 허문 차헌은 미동 없는 드래곤을 바라보다 손을 뻗었다. 착실히, 라는 이름에 맞게 차헌의 의지대로 검으로 변한 실리가 드래곤의 배를 갈랐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한연화는 도르륵, 말려 올라가는 드래곤의 가죽을 밀어내며 내장을 휘저었다.
잠시 후, 한연화가 몸을 물리며 무언갈 끌어안았다. 그리고 한참 동안 중얼거리던 한연화는 이내 울음을 터트렸다.
“뭐가 잘 안됩니까?”
도와주고 싶어 손을 뻗었지만, 드래곤이 흘린 피 웅덩이에 잠겨있던 한연화는 차헌의 손을 거칠게 쳐냈다.
“당신은, 이 이상 오빠 인생에 끼어들지 말아요.”
날 선 목소리에 차헌이 한연화의 품에 안긴 황금빛 덩어리를 내려보았다.
“그게, 설마 한연우 에스퍼입니까?”
“물러나라니까!”
설마. 중얼거린 차헌은 비틀비틀 다가가 황금빛 덩어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한연화가 다가오지 말라고 악을 쓰고 있었지만, 손쉽게 제압한 차헌이 그것을 붙잡는 순간이었다.
“큿.”
마나코어를 도려내는 듯한 통증과 함께 마나가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손쓸 새도 없이 마나코어가 텅 비어버리고 끔찍한 두통과 함께 울컥, 하고 입과 코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무슨….”
탁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차헌은 제 손과 연결된 황금빛 사슬을 쳐다보았다. 길게 늘어난 사슬은 차헌의 몸을 둘러싸며 기하학적인 문양을 그렸다.
[그대의 이름은?]
그것은 귓가에 들리는 소리가 아닌 기묘한 웅웅거림이었다. 대답하지 않으려 입을 다물었지만, 머릿속을 파고든 사슬 때문에 의지와 달리 입이 열렸다.
“강…차헌.”
[강차헌, 그대가 바친 제물에 따라 나 라트리줄리 헤미르나 코트제트나가 합당한 소원을 들어주겠다. 그대의 소원은?]
소원…? 그 순간 차헌의 머릿속을 스치는 사람이 있었다.
[죽은 자를 되살려주기에는 제물이 부족하군.]
그래서 한연화가….
절규하던 한연화의 울음소리를 떠올린 차헌이 눈을 질끈 감았다. 한순간이나마 피어났던 희망이 사라지자, 그보다 더 큰 절망이 몰려들었다.
[그 사람과 비슷한 사람을 원한다면 얼마든지,]
필요 없어. 이를 악물던 순간 한연화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요? 시간- 돌려 달-고 -해요.”
[그대도 동의하는가?]
“2-XX년 02월 18일. 오빠- 책을 -기 전날이에요. 그날로 돌려-라고 말해요!”
2월 18일. 중얼거린 차헌이 고개를 끄덕이자 주변에 황금빛 마나가 몰아쳤다.
[하찮은 소원에 비해 대가가 너무 크구나. 알려주자면 인과율을 벗어난 사람은 시간을 돌려도 그대로 돌아갈 수 없어. 그래도 괜찮겠는가?]
그 사람이 살아만 있다면.
[그렇다면 그대의 소원은 이루어질 것이다.]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환한 빛이 차헌의 몸을 감싸 안았다. 그대로 차헌의 몸에 스며든 빛무리는 점점 줄어들며 마나코어에 들러붙었다. 묘한 이질감을 느끼며 마나코어를 문지르던 차헌은 주저앉아있던 한연화에게 손을 내밀었다.
“드래곤 하트가 소원을 들어준다는 건 미리 말씀해주시지 그랬습니까.”
“당신이 무슨 소원을 빌 줄 알고?”
올려보는 표정이 서늘했다. 한연화는 언제 울었냐는 듯 멀끔한 얼굴로 황금빛 덩어리를 움켜쥐었다. 제 손과 연결된 사슬을 보던 한연화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연우의 이능을 없애줘.”
사슬이 한연화의 몸으로 흡수되는 것과 동시에 환한 빛이 두 사람을 덮쳤다. 게이트를 통과할 때처럼 불유쾌한 감각과 함께 누군가 손을 붙잡는 게 느껴졌다.
“알고 있죠? 오빠가 나를 살리기 위해 죽었다는 거.”
차헌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알고 있었다. 한연우는 동생을 살리기 위해 몸을 던졌고, 자신은 어부지리로 살아남은 사람이었다는 걸. 한연우는 자신을 살리고 죽은 게 아니라는 걸.
몇 년을 괴롭히던 의문이 해결되었는데도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자신과 그 사람 사이에 어떤 접점이 있길 바란 건 차헌만의 욕심이었다.
괜찮다. 다시 한번 기회가 주어졌으니 접점을 만드는 건 물론, 그 사람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결심한 순간,
[- - -- -.]
조금 전 들었던 기묘한 울림과 함께 온몸을 짓누르는 압박감이 느껴졌다. 한연화도 비슷한 상황인지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희미하게 들렸다.
“오빠가 던전에 들어올 능력이 없다면, 나를 살리겠다고 죽지도 못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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