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정신이 들어요?”
멍하니 천장을 올려보던 차헌은 습관적으로 손목을 매만졌다. 손끝으로 만져지는 우둘투둘한 흉터가 없었다. 현실이구나.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키던 차헌은 지끈거리는 두통에 신음을 흘렸다.
“좀 더 누워있어요. 백두 길드장이 약을 세게 써서 당분간 힘이 안 들어갈 테니까, 일어나려고 용쓰지 말고.”
한연화의 경고에도 차헌은 일어나려 바둥거렸다. 모든 시도가 수포가 되자 차헌은 눈만 움직여 맞은편 소파에 앉아있는 한연화를 노려보았다.
“어디까지 기억나요?”
“…소원.”
마취약을 얼마나 먹인 건지 발음이 어눌했다. 한연화는 아하, 고개를 끄덕이더니 차헌을 삐딱하게 내려봤다.
“그런데 왜 그런 눈으로 봐요? 오빠를 위해 뭐든지 한다고 했던 것도 당신이고, 복수하겠다고 약속한 것도 당신인데. 미리 말했으면 뭔가 달라졌을 것 같아요? 아뇨. 혼자 흥분해서 날뛰다가 일을 그르쳤겠지.”
“…왜?”
“오빠의 이능을 빼앗았냐고요?”
힘을 끌어모아 고개를 끄덕이자, 한연화가 손톱을 세워 팔걸이를 톡톡 내려쳤다.
“가족이랑 사이가 어때요? 특히 누나랑.”
차헌이 미간을 찌푸렸다. 연우의 이능을 빼앗은 거랑 자신과 누나의 관계가 무슨 상관이지?
“보통 남매 사이가 비슷비슷하겠지만, 우리 오빠는… 조금 이상할 정도로 맹목적이에요. 어렸을 때 제가 몸이 약했던 탓도 있겠지만, 부모가 오빠를 세뇌했거든요. 너는 오빠니까 동생을 지켜야 해, 보호해야 해, 하면서. 나는 그게 잘못됐다는 걸 알면서도 무관심한 부모보다는 오빠한테 의지했어요. 그러다 보니 낳기는 그들이 낳았지만, 나를 키운 건 오빠였죠. 키우기만 키웠나, 그것도 모자라 대신 죽기까지 했죠. 항상.”
항상? 차헌이 되묻자 한연화가 발끝을 내려보며 말을 이었다.
“내 이능에 대해서 알고 있죠? 당신이나 나처럼 미래가 확실하게 정해진 사람들 말고, 보통 사람들. 그러니까 우리 오빠 같은 사람들은 정해진 미래가 없어요. 선택과 결정으로 인해 수많은 시간선이 생기고, 그에 따라 미래가 계속해서 바뀌죠. 그러다 보니 같은 사람이라도 다른 시간선을 걸으면서 똑같은 결정을 내리는 경우가 없어요. 그래서 나는 오빠가 죽지 않는 미래를 찾아 예지를 반복했는데….”
말끝을 흐린 한연화는 눈을 내리깔고 웃었다. 저 얼굴로 저렇게 웃으니까 연우 생각이 나서 짜증이 났다. 비슷하게 생기지나 말던가, 저렇게 웃지를 말던가. 아니면 눈앞에 한연우를 데리고 오던가. 인상을 쓰고 있던 차헌은 이어지는 말에 표정을 굳혔다.
“…대체 내가 어떻게 하면 오빠가 나 대신 죽지 않을까요.”
질문이 아니었다. 자조적으로 중얼거리던 한연화는 차헌과 눈을 맞췄다.
“신기하죠. 오빠와 관련이 없는 사람을 고르고 골라서 책을 선물했거든요. 분명 오빠와 당신은 아무런 접점이 없는 사이였는데, 그런데 어쩌다 둘이 엮이게 되었을까요? 왜 오빠는 당신을 살리고 죽었을까요?”
“형은, 어, 딨어?”
차헌은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을 움직여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디선가 희미하게 연우의 마나가 느껴지고 있었다.
“오빠는 왜 찾아요? 오빠의 죽음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두 손에 얼굴을 파묻은 한연화는 그 속에서 웃음을 터트렸다. 한참 동안 웃음을 터트리던 한연화가 천천히 손을 뗐다. 은빛으로 빛나는 눈동자가 눈물로 부풀어있었다.
“앞으로 2년 뒤, S급 가이드가 예지보다 일찍 각성해요. 오빠가 마음대로 당신의 미래를 바꾼 결과물이죠. 아무튼, 각인 상대가 없는 S급 에스퍼들은 그 가이드와 짝을 이루고 싶어 했지만, 그 가이드는 나를 원했죠. 그래서 온갖 개판이 일어났는데, 이건 뭐 알 필요 없고. 그 인간이 질투를 유발하겠다고 지랄하다가 나를 죽이려 해요. 그걸 막으려다가 오빠가 죽죠. 그때 당신이 어디 있었냐고요? 오빠랑 같이 던전 토벌 중이었어요. 게이트 석이 없으면 던전에서 빠져나오지도 못하는 당신이 오빠를 막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내가 그것도 못 봤을까 봐?”
웃음을 흘린 한연화는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내버려 둔 채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이야기의 시작은 달랐지만, 결과는 모두 같았다. 한연우는 한연화를 지키다가 죽을 것이다.
차헌은 떨리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 심장이 불쾌하게 뛰고 있었다.
“당신과 내가 오빠를 살려보겠다고 시간을 몇 번이나 돌렸는지 알아요?”
그때마다 한연우가 죽었다고, 또 혼자서, 나를 두고.
차헌은 솟아오르는 얼음벽을 올려보다 눈을 질끈 감았다. 서운했다. 속상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분명 또 혼자서 결정하고 혼자서 실행했겠지. 자기 몸이 축나든 말든 신경도 안 썼을 것이다. 한연화를 살리겠다는 의지만 가득했겠지. 제가 죽고 나면 차헌이 어떨지 고민은 했을까?
“…명, 당신이 내 계획을 방해할 것 같아서 알려주고 싶었어요.”
차헌은 멍하니 한연화를 바라보았다. 분명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데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방해하지 않을 거면 따라와도 좋아요.”
* * *
“형!”
곤히 잠들어있는 연우를 본 차헌이 뛰어가려 하자, 로터스 길드장이 차헌의 앞을 막아섰다.
“가만히 있어요. 방해할 거면 지금이라도 나가던가. 방해하는 순간 우리 오빠는 또다시 당신 때문에 죽게 될 거예요.”
그 말에 족쇄가 되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차헌은 못 박힌 듯 서서 한연화가 한연우의 손목을 들어 올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한연화는 손목에 걸린 팔찌를 쥐어뜯듯 잡아당기다가 실처럼 엉켜있는 구속구를 풀었다.
“나와.”
구속구가 풀리기가 무섭게 연우의 손목을 타고 스르륵, 흘러내린 체인 팔찌가 땅으로 툭 떨어졌다. 한연화는 그 팔찌를 낚아채며 로터스 길드장에게 눈짓했다.
“이제 됐으니 나가요.”
공손하게 손을 모으고 뒷걸음질한 로터스 길드장이 문을 닫고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부풀어 오른 체인 팔찌는 얇고 가느다란 보석뱀으로 변했다.
[- -.]
경악하는 차헌과 달리 보석뱀은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꼬리를 흔들다 불만스러운 듯 쉭쉭대며 연우를 향해 기어갔다.
“어딜.”
보석뱀을 낚아챈 한연화는 드래곤의 멱살을 쥐었다. 대롱대롱 매달려있던 보석뱀은 차헌을 똑바로 응시하며 꼬리로 제 몸에 감긴 구속구를 가리켰다. 보석뱀의 황금빛 눈동자를 보고 있던 차헌이 설마, 하는 표정으로 한연화를 바라봤다. 한연화는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 드래곤.”
어느새 한연화의 손바닥에 자리 잡은 보석뱀, 아니 드래곤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이 한 말이라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며 비웃었을 것이다. 손끝으로 세게 짓누르기만 해도 죽일 수 있을 것 같은 보석뱀이 드래곤이라고? 하지만 저것에서 느껴지는 압박감 때문에 믿을 수밖에 없었다. 차헌은 억지로 허리를 펴며 한연화와 드래곤을 번갈아봤다.
“대답해. 왜 당신이 오빠한테 들러붙어 있는 것이며, 왜 내 소원을 제대로 들어주지 않았지?”
드래곤이 다시 한번 꼬리로 구속구를 톡톡 두드렸다. 뻐끔뻐끔 입을 벌려 보이던 드래곤은 답답하다는 듯 꼬리를 휘둘렀다.
“이걸 풀어달라는… 것 같은데.”
“안 돼요. 그러다 오빠가 다치면 어떡해요. 막 탈피를 끝내서 약해진 상태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잖아요?”
차헌의 말에 눈을 반짝 빛낸 드래곤이 한연화의 몸을 타고 폴짝 뛰어내려 차헌을 향해 기어 왔다. 드래곤은 꼬리를 들어 새끼손가락을 휘감은 다음 손바닥에 꼬리를 문질렀다. 그다음 꾹 하고 주둥이를 내려찍는 모습에 허, 하고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다치게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겠답니다.”
고개를 끄덕인 드래곤은 턱을 치켜들며 가느다란 구속구를 가리키다가 입을 뻐끔거리기를 반복했다.
“말을 할 수 있게 이것 좀 풀어달라는데요.”
바삐 고개를 끄덕인 드래곤은 애처로운 얼굴로 차헌과 연화를 번갈아 보았다. 잠시 망설이던 연화가 실처럼 꼬인 구속구를 풀어주자 머릿속으로 연령대와 성별이 모호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래, 내게 무슨 볼일이니? 연우가 아끼는 동생들아.]
차헌은 말없이 한연화의 앞을 막아서며 어느새 의자 위에 자리 잡은 드래곤을 노려보았다. 손목을 흔들어 소환한 레어피어의 손잡이를 쥐기도 전에 한연화가 차헌의 어깨를 밀어내며 앞으로 나섰다.
“말했잖아. 당신이 왜 오빠에게 들러붙어 있냐고, 그리고 나는 분명 오빠의 무능을 빌었을 텐데. 오빠는 왜 멀쩡하게 이능을 사용하지?”
[그거야 당신이 제대로 소원을 빌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두루뭉술하게 빌면 내가 어떻게 들어줘? 나는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란다. 과거로 돌아왔을 때의 한연우가 이능을 잃게 해달라고 빌었니, 아니면 그때의 한연우가 이능을 잃기를 빌었니? 아마 네 소원은 과거로 돌아오기 전 이루어졌으니, 그때의 한연우가 이능을 잃었겠구나.]
다음부턴 육하원칙에 따라 제대로 소원을 빌렴. 한연화에게 위로를 전한 드래곤이 차헌에게 고개를 돌리던 순간, 멍하니 앉아있던 한연화가 드래곤을 낚아챘다.
“친절하게 알려줘서 고마워.”
환히 웃은 한연화는 언제 준비해두었는지 날이 선 단검으로 드래곤의 목에 겨누었다.
[날 죽이게?]
살이 찢겨 스멀스멀 피가 배어 나오는 상황에도 드래곤은 여유롭기만 했다. 마치 한연화가 자신을 해치지 못할 걸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차헌아.]
드래곤은 꼬리를 흔들어 차헌의 시선을 끌었다.
[내가 죽으면 연우도 죽어.]
“뭐?”
[말했잖아. 인과율을 벗어난 사람은 예전과 같을 수 없다고.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썩어 문드러질 연우의 심장에 내 심장 조각을 조금 심어놨거든. 나를 죽이면 연우를 죽이는 거나 마찬가진데, 이대로 둘 거야?“
차헌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한연화를 바라봤다.
“내가 그것도 몰랐을까.”
한연화는 망설임 없이 단검으로 드래곤의 배를 갈랐다.
[연우야!!]
드래곤이 비명을 지르며 버둥거리는데도, 내장을 헤집으며 심장을 찾아낸 한연화는 그 옆에 붙은 마나코어를 잡아 뜯었다. 비명에 비명을 지르다 헐떡거리는 드래곤을 잡아 던진 한연화는 강차헌과 눈을 맞췄다.
“다시는 오빠를 찾아가지 말아요. 방금 오빠, 아니, 한연우 에스퍼는 정식적으로 이능 불안정자 판정을 받았고, 로터스 길드장이 관리하게 될 거예요. 오빠…를 정말로 생각한다면, 그를 잊고 지내요.”
말을 마친 한연화는 언젠가처럼 황금빛 덩어리를 붙잡고 속삭였다.
“오빠가 모든 걸 잊게 해줘, 특히 나를. 오빠가 온전히 자신의 삶을 살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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