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형!”
계단을 올라가던 연우는 동기의 부름에 재빨리 강의실로 몸을 숨겼다. 악! 형! 애처로운 울부짖음을 외면한 연우가 강의실에 자리를 잡자, 고윤이 달려와 옆자리에 가방을 올려두었다. 힘들어서 반쯤 죽어가는 하결과 달리 쌩쌩하기만 한 고윤은 연우의 가방을 붙잡고 늘어졌다.
“나라 사랑 동기 사랑 길드 사랑 몰라요? 얘 승급전이라는데 그것만 도와주고 가요.”
“아니, 나는 괜찮다니까.”
“뭐가 괜찮아. 승급전은 절대 솔로로 못 돈다니까? 연우 형이 탱 서주고, 내가 딜러 해준다고 할 때 감사하다 인사나 하세요.”
“승급전만 돌 거면 돌아줄 수 있는데, 조고윤 너 하결이 승급하자마자 무기 맞춘다고 뺑뺑이 돌 거잖아.”
“당연하죠?”
“그럼 같이 못가.”
“아- 왜요.”
연우는 반쯤 드러누워 칭얼거리는 고윤에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캘린더에 적혀 있는 일정을 확인한 고윤은 뒷목을 긁으며 자세를 바로 했다.
“아, 벌써 건강검진 가는 날이에요?”
“응. 삼촌이 데리러 오기로 해서 길게는 못 놀 것 같네. 하결이 승급전은 내일 도와줘도 될까?”
“네!”
하결 대신 고윤이 경쾌하게 대답했다. 하는 김에 자기 길드전도 도와달라며 신난 기색을 숨기지 못하던 고윤은 강의가 끝난 뒤 연우를 기다리는 삼촌을 보며 표정을 굳혔다.
“형, 있잖아요.”
다가온 고윤이 작게 속삭였다.
“형 삼촌 진짜 뭐 하는 사람이에요?”
“좀 이상하긴 해. 삼촌… 맞아?”
하결이 동의하자 고개를 끄덕인 고윤이 재차 속삭였다.
“우리한테만 살짝 말해봐요. 형 진짜 어디 대기업 손자 그런 거 아니에요? 저분은 뭐… 어… 형의 비서? 같은 분이고.”
“아니라니까, 아빠랑 삼촌이랑 나이 차가 많이 나다 보니 깍듯하게 대하던 게 버릇이 들어서 그래.”
보통은 반대이지 않아? 하결에게 눈짓한 고윤은 연우의 삼촌이 공손하게 가방을 받아들고, 문을 열어주는 걸 지켜보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뭐, 세상은 넓고 가족관계는 다양한 법이지.
그런 고윤을 뒤로한 채 병원으로 향한 연우는 의사에게 인사를 건넸다.
“몸은 좀 어떤가요, 아직도 두통이 심해요?”
“심한 건 아니고 가끔요.”
의료진을 따라 검사실로 들어간 연우는 눈을 감은 채 검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교통사고 후유증은 오래 봐야 하는 거 알죠? 지금은 괜찮지만, 나중에 혹시라도 두통이나 이명이 심해지거나, 심장에 통증이 느껴지면 바로 방문하셔서 정밀 검사 받아보셔야 합니다.”
심장 초음파를 마지막으로 모든 검사가 끝나고, 젤을 닦으며 일어나자 기다리고 있던 삼촌이 조심스럽게 옷을 입혀주었다.
“아, 삼촌. 곧 엄마 아빠 기일인데 어떻게 하실 거예요? 바쁘시면 저 혼자 갈까요?”
“아니. 데리러 갈게.”
“그러실래요?”
연우 대신 가방을 챙기며 일어난 삼촌이 약속을 잡았다. 검사실을 나서던 연우는 세상에 하나뿐인 혈육을 바라보았다.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부모님을 대신해 자신을 알뜰살뜰 보살펴주는 삼촌.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연우는 저린 손끝을 주물렀다.
“아, 내일은 데리러 오지 마요. 친구들이랑 약속 있어서.”
“또 게임하려고?”
“공부하다 쉬는 날 하는 거예요. 그럼 들어가세요.”
차에서 내린 연우는 저린 손을 주무르며 골목 안을 살폈다. 분명 누가 있는데…. 눈을 가늘게 뜨고 지켜보자 동기 사랑 나라 사랑을 외치는 학생들이 보였다. 잘못 봤나? 연우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이내 집으로 들어갔다.
* * *
“형, 지금 바로? 아니면 밥 먹고?”
고윤은 강의가 끝나자마자 피시방에 가자며 달려왔다. 연우는 고개를 돌려 책상에 엎드려있는 하결을 쳐다봤다. 안색이 좋지 않은 게 어제 밤새 뺑뺑이를 돈 게 분명했다.
“일단 밥부터 먹자.”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곱다고…. 아련함을 담아 하결의 어깨를 두드린 연우는 서두르라며 재촉하는 고윤과 함께 식당으로 향했다.
“하결이 너는 초코라떼 마실 거고, 형은 아메리카노 맞죠?”
대답도 듣지 않고 식당을 뛰쳐나간 고윤은 카페로 달려가 커피를 사 왔다. 연우는 찰랑이는 커피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대체 얼마나 갈아먹으려고 커피까지 사다 받치는 거지….
고윤은 자리를 잡아둘 테니 천천히 오라며 달려 나갔고, 그런 고윤을 눈으로 좇던 하결이 입속으로 욕을 중얼거렸다. 하결은 두 손에 얼굴을 묻고 한참이나 욕을 뇌까리다 연우를 붙잡았다.
“제발 두 시간만 하고 가자.”
“노력해볼게.”
핼쑥해진 하결과 함께 피시방으로 가던 길목, 연우는 어느새 쌀쌀해진 날씨에 어깨를 잘게 떨며 두 손으로 컵을 감싸 쥐었다. 추위를 달래기 위해 김이 올라오는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시려고 할 때였다.
“저기.”
갑작스레 뻗어 나온 손이 컵을 붙잡았다. 뛰어온 듯 숨을 헐떡이는 남자는 연우의 안색을 확인했다.
“뭐야, 누구세요?”
하결의 질문에 말없이 연우를 지켜보던 남자는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잠시만요.”
자신의 손을 감싸 쥐듯 컵을 붙잡고 있는 남자의 손과 제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남자의 눈을 번갈아보는 연우의 눈동자가 다갈색으로 반짝반짝 빛났다. 연우는 조심스럽게 손을 잡아빼며, 남자에게 컵을 건넸다.
“드세요.”
가볍게 인사하며 몸을 튼 연우는 기다리고 있던 하결과 피시방으로 향했다.
“뭐야, 아는 사람이야?”
“아니, 몰라.”
“근데 커피를 왜 줘?”
“찝찝하잖아. 모르는 사람 손에 닿은 건데 어떻게 마셔. 고윤이한테는 오는 길에 쏟았다 그래.”
모르는 사람….
차헌은 울적한 표정으로 컵을 내려보았다. 뜨거운 커피를 마시는 연우를 보자마자 저도 모르게 발이 움직였다. 혹시라도 안 좋은 기억을 떠올릴까 봐, 불안해할까 봐, 그리고… 혹시라도 나를 알아볼까 봐.
헛된 기대였다.
한연화의 소원대로 연우는 모든 기억을 잃은 채 살아가고 있었다. 친구들과 그 나이대 애들처럼 어울리며 연우의 바람대로 평범하게. 이동할 때는 작은 발을 부지런히 움직이며 걸어 다녔고, 뜨거운 음식도 가리지 않고 잘 먹었다. 확실히 모든 기억을 잃었는지, 마나 구속구가 제대로 확인하는지, 어떤 트라우마도 남지 않았는지까지 확인했으니 이제 물러나야 했다.
“고윤이 저기 있네.”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 다리는 계속해서 연우를 쫓았다. 친구와 합류한 연우는 게임과 관련된 이야기를 떠들다 헤드셋을 쓰며 인상을 썼다.
“습, 아야.”
“형, 그냥 이어폰 끼고 하라니까. 안 아파요?”
“보면 은근히 까마귀라니까. 귀에 피어싱이 대체 몇 개야.”
“이어폰 안 가져왔어요? 형 그럼 사플은 어떻게 해요. 게임을 할 때만 잠시 빼고 있을래요?”
해독, 해주, 방어, 추적 공격, 그리고 마나 구속구까지. 차헌이 알고 있는 것만 해도 다섯 개였고, 한연화가 따로 준비해둔 아이템 또한 연우의 몸에 주렁주렁 매달려있었다.
“부모님 유품이라서. 떼놓기가 좀 그렇네.”
“와, 그렇게 말하면 제가 쓰레기 같잖아요. 있어 봐요, 이어폰 있는지 물어보고 올 테니까.”
세뇌도 확실했다.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은 연우에게는 죽은 형을 대신해 조카를 알뜰살뜰 살피는 삼촌이 있었다. 너무 알뜰하다 보니 주변의 의심을 사는 경우가 있었지만, 그래도 로터스 길드장은 제가 맡은 역할을 완벽하게 해내고 있었다.
삼촌의 도움으로 교통사고 후유증을 이겨낸 연우는 게임공학과에 입학해 자신이 좋아하는 게임을 원 없이 하며 살고 있었다. 한연화를 위해 희생하며 살았던 지난 삶과 다르게 오로지 자신의 위해 살아가는 연우는 정말이지 즐거워 보였다. 센터에서 보여주던 가식적인 웃음과는 결이 다른 웃음이었다.
“형, 이어폰 빌려왔어요. 형이 사플로 핑 찍어주면 제가 달려가서 처리할 테니까, 하결이 너는 타이밍 맞춰서 서포트하고.”
이제 자신이 알려주지 않아도 연우는 막힘없이 게임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차헌은 그대로 몸을 돌렸다.
“125번 손님. 아이스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
“음? 제가 안 시켰는데요?”
커피를 내려놓은 알바생이 방긋 웃자, 고윤이 하결의 옆구리를 찔렀다. 형 진짜 아닌 척 인기 많다니까.
“카페인 수혈 기념으로 한 바퀴만 더 돌까요?”
“아니, 나는 이만할래.”
“벌써?”
“벌써는 무슨. 두 시간째라고 미친놈아.”
가방을 들고 도망가는 하결을 눈으로 쫓던 고윤은 울상을 지으며 연우를 올려보았다.
“이쯤 해. 그러다 하결이 진짜 도망가겠다. 그리고 서포트 없이 어떻게 돌아. 이만하고 너도 집에 가.”
연우는 이렇게 끝낼 수는 없다며 칭얼거리는 고윤을 내버려둔 채 집으로 향했다. 학교 후문에 위치한 오피스텔은 혼자 살기 과분할 정도로 넓었다. 방 두 개짜리 집에서 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연우가 가방을 내려놓는 순간 목에서 무언가 툭, 떨어졌다. 연우는 검은 그림자를 쫓아 방으로 들어갔다.
“그만 보라니까.”
[어떻게 그만 봐! 내 뿔이 사라졌는데! 곧 다리도 나올 거였는데!]
거울 앞에 선 드래곤은 맨둥맨둥한 머리를 보며 눈물을 후드득 흘렸다. 저럴 때는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소용이 없었다. 드래곤이 마음껏 슬퍼할 수 있게 문을 닫아준 연우는 얼음이 조금도 녹지 않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쳐다보았다. 컵을 두 손으로 감싸자 차헌의 마나가 느껴졌다.
“이럴 거면서….”
소원은 연화가 빌었지만 동의한 건 차헌도 마찬가지다. 그러면서 모르는 사람이라고 했을 때 왜 충격을 받냐고. 혀를 끌끌 찬 연우는 훌쩍거리며 기어 오는 드래곤에게 손을 내밀었다.
[언제까지 모른 척할 거야? 아까 보니까 차헌이 아주 울겠던데.]
“언제는 뿔의 원수라며. 온몸의 수분이 빠져나갈 때까지 울리라고 할 땐 언제고.”
[그래도 이건 금방 자라니까….]
연우는 눈물이 맺힌 드래곤의 눈꺼풀을 쓸어주며 천장을 올려보았다. 한 달 전, 이곳에서 눈을 뜬 직후 드래곤에게 사정 설명을 듣자마자 한숨부터 쉬었다. 연화와 차헌이 자신의 기억을 지워버린 이유에 대해서는 짐작이 갔다.
“괘씸해.”
그래, 괘씸했다. 그렇게 기억을 지워버렸으면 아예 모른 척을 하던가. 사람이 뜨거운 걸 먹든 말든 왜 신경을 쓰냐고. 미간을 찌푸린 연우는 감각을 넓게 펼쳐 주변을 살폈다. 로터스 길드장의 마나, 차헌의 마나, 그리고 저 멀리서 느껴지는 연화의 마나.
아니, 이럴 거면 왜 기억을 지운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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