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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의 주인공이 공이 된 이유-112화 (112/143)

112화

약 한 달 전,

“헬리. 잠시만 이리 와볼래?”

드래곤은 황홀한 얼굴로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폴짝 뛰어내려 연우를 향해 기어갔다. 뭐가 또 안 풀리나 싶어 고개를 빼고 다이어리를 쳐다보자 연우가 뿔 사이를 쓰다듬었다.

“그때 네가 그랬잖아. 뿔이 날 때까지만 지켜달라고.”

[응, 그랬지?]

“그럼 이제 우리 계약은 끝난 거야?”

입을 쩍 벌린 드래곤은 연우의 손목에 감기며 외쳤다.

[왜애? 벌써 나를 내치려고? 평생 지켜준다며! 지켜준다며!]

“아니, 그게 아니라. 잠깐 진정해 봐.”

드래곤을 다독인 연우는 계약자와 드래곤의 동의하에 계약 해지가 가능하다는 설명을 들었다.

[안 할 거지?]

애처로운 얼굴로 고개를 기대는 드래곤을 내려보던 연우는 다이어리를 톡톡 두드렸다. 얼마 전, 차헌이 폭주하는 소동이 일어나면서 연화가 자신에게 묘한 힘이 있다는 걸 알아챘다. 흩어지기 직전, 연화는 연우를 붙잡고 이게 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겠다고 약속했다. 연우가 아는 연화는 빈말을 하는 애가 아니었으니, 조만간 연우가 과거를 기억한다는 것도, 드래곤과 계약한 사실도 알게 될 것이다.

“분명 가두겠지.”

[음. 잘은 모르지만 연화라면 가둘 것 같아.]

“그럼 내 계획에도 차질이 생길 거야. 헬리. 기억나지? 내 뜻을 돕겠다며.”

[내가 뭘 하면 돼? 죄다 죽일까?]

“그것도 나쁘지 않지만, 헬리오도르. 설명해 봐. 누가 시간을 어떻게 돌린 거야?”

[말 못 한다니까.]

“그럼 고개만 끄덕여. 연화가 시간을 돌린 건 맞아?”

눈치를 보던 드래곤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연화가 아니라고? 그럼 누구지? 턱을 괸 연우는 드래곤을 이리저리 굴리며 장난을 쳤다.

“누가 도와준 건 확실하지?”

[그만 물어봐. 남의 소원 궁금해하고 그러는 거 아니야.]

“소원?”

[아.]

연우는 꼬리로 입을 막는 드래곤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대체 어떤 방식으로 시간을 돌린 건가 궁금했는데, 소원이었군. 연우는 슬그머니 도망가려는 드래곤의 앞을 막았다.

“말해 봐, 소원은 어떻게 비는 건데?”

입이 방정이라며 꼬리로 입술을 찰싹찰싹 내려친 드래곤이 마지못한 얼굴로 설명했다. 드래곤의 마나코어, 드래곤 하트는 아더의 창조물이라 일정한 대가를 받고 소원을 들어줄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차헌이가 시간을 되돌린 거구나.”

고개를 끄덕인 연우는 모른 척하는 드래곤의 머리를 문질렀다. 정신계인 연화는 드래곤을 죽일 능력이 없었다. 그러니 분명 조력자가 필요했을 텐데, 모든 상황을 알면서 드래곤을 죽일 능력까지 있는 사람은 강차헌뿐이었다. 그럼 차헌이 시간을 되돌리고 연화가 자신을 살려낸 건가?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연우는 모르는 척 블루베리를 씹어먹는 드래곤을 바라봤다.

“그때 네가 그랬잖아. 나는 너를 못 죽인다고. 그건 무슨 뜻이야?”

한숨을 쉰 드래곤이 힘없이 입을 열었다.

[나중에 말해주려고 했는데, 음…. 원래는 차헌이가 다른 소원을 빌었는데, 그 소원은 대가가 너무 많이 필요해서 내가 거절했었거든? 그러다가 다른 소원을 빌었는데, 그 소원을 들어주기에는 연우 너를 포함한 몇몇이 좀 뒤틀린 상태였거든. 대가를 많이 받았으니 서비스로 뭘 알려준 것뿐이야. 이 이상은 나도 못 말해.]

입을 꾹 다문 드래곤은 그만 물어보라며 똬리를 틀었다.

“혹시 이번에도 연화가 너한테 소원을 빌 수 있어?”

[응?]

“내… 생각인데, 이때까지 경험에 따르면 연화는 나를 가둬놓기만 하는 게 아니었어. 나를 위협하는 모든 것들을 정리한 다음에야 풀어줬지. 설명하기 좀 어려운데, 내가 나를 위협한다면… 연화가 나를 어떻게 할 것 같아?”

[…엉?]

“나는 누구의 사주도 없이 나 스스로 죽기를 결정했잖아. 그 모습을 지켜본 연화는 나를 어떻게 처리하려고 할까.”

눈썹을 문지르며 생각을 정리하던 연우는 드래곤에게 손을 뻗었다. 드래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손에 올라타자 연우가 심장이 있는 곳을 콕, 찔렀다.

“새로운 심장이니까, 새로운 소원을 빌 수 있는 것도 맞지?”

[그렇긴 한데…. 내가 죽으면 너도 죽는데, 굳이 나를 건드리려고 할까?]

“드래곤 하트만 있으면 되잖아. 죽이지 않고 마나 코어만 뽑아내겠지.”

비명을 지르며 제 심장을 감싸던 드래곤은 이걸 어떻게 이만큼 키웠는지 줄 아냐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렇게 자랄 때까지 먹이를 구해준 건 누구라고 생각하는지. 드래곤을 흘겨보던 연우가 심장 위를 문질렀다.

“만약 네가 죽으면 이번에는 어디서 재생하는 거야?”

[보통 죽은 그 자리에서 재생하지만… 아마 네 심장 속에서 재생하지 않을까?]

심장 속에서 재생이라니. 심장에 똬리를 틀고 있던 드래곤이 제 배를 뚫고 나오는 모습을 상상하던 연우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끔찍하군.

[미쳤어? 나도 그렇게 재생하고 싶진 않거든? 네가 나를 느끼고 내 심장 조각을 토해낸다면 평범하게 재생할 거야.]

“그러니까, 지금 내 심장에 네 심장 조각이 섞여 있다. 이거지?”

[아?]

연우의 말에 드래곤은 파르르 떨다 꼬리를 팡팡 내려쳤다. 연우는 짜증 난다며 굴러다니는 드래곤을 붙잡았다.

[물어보지 마! 입 싼 드래곤에게 누가 소원을 빌겠어!]

소원….

연우는 입질하다 도망가는 드래곤을 바라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그러니까, 차헌이가 나를 살려달라고 소원을 빌었는데 그러기에는 대가가 너무 많이 필요하니까 시간을 돌리기로 합의를 봤다. 그런데 내가 비틀린 상태라 드래곤이 심장 조각을 넘겨줬다는 거겠지. 그렇다면 연화는? 입술을 말아 문 연우는 과거로 돌아온 직후 엉망진창으로 튀던 이능을 떠올렸다. 내가 던전에 들어갈 수 없도록 이능을 차단했구나. 모종의 이유로 그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러니 연화는 좀 더 확실한 방법으로 내가 자신을 구하지 못하도록 새로운 소원을 빌거나, 나를 가두겠지.

“헬리, 이리와 봐.”

[왜!]

앙칼지게 외치는 드래곤을 데려온 연우가 계약을 해지하는 것과 동시에 새로운 계약을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

[음, 안 돼. 못해 줘. 낙장불입이야. 그러게 신중하게 계약했어야지.]

“그러다가 나중에 내가 널 못 알아보면 어떡해?”

[응?]

“내가 아는 연화라면 분명 내 기억을 지워버릴 것 같거든. 기억을 잃은 내가 너를 챙겨줄 것 같아? 와, 내가 이때까지 너를 챙겨준 게 얼마인데 그렇게 매정하게 굴어? 이 배은망덕한 드래곤아.”

[아, 그런 거라면 미리 말을 하지. 나는 또 귀찮다고 치워버리는 줄 알았잖아.]

헤헤. 웃으면서 몸을 붙여오는 드래곤을 보던 연우는 숨을 고르며 드래곤의 이름을 불렀다.

[헬리오도르.]

내 기억을 가지고 있어 줄래?

* * *

“여긴…어디, 지…?”

[내 뿔!!!]

낯선 곳에서 눈을 뜬 연우는 메슥거리는 속을 문질렀다. 심장이 뻐근해 견딜 수가 없었다. 한참 동안 웅크려있던 연우는 뿔이 사라졌다며 엉엉 우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무슨 소리….”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일어난 연우가 벨 소리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테이블 위에 놓인 핸드폰에는 [삼촌]이라는 글자가 떠 있었다. 삼촌?

전화를 받자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연우야, 삼촌이다.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많이 힘들 텐데, 오늘은 일단 자고 내일 연락하자.

국어책을 읽는 듯한 말투였다. 이상하게 여긴 연우는 알겠다는 말도 없이 전화를 끊었다. 뭐야, 삼촌 맞아? 사기나 그런 거 아니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내려보던 순간 검은 그림자가 튀어와 손목에 감겼다.

“뭐야, 뱀?”

[아니야!]

뱀이 말을 한다는 사실에 깜짝 놀란 연우는 뱀이 제 꼬리를 물려고 바둥거리는 사실을 눈치채지도 못했다.

[이게 뭐야, 짧아졌잖아.]

뿔도 없고, 몸집도 작아졌다고 서러워죽겠다며 흐느끼던 드래곤은 보관해두었던 기억을 연우에게 넘겼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은 채 심호흡하던 연우는 기억이 빈 곳이 없는지 확인하며 드래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괜찮아?”

[안 괜찮아!]

심장이 뜯겨나갔으니 당연히 안 괜찮겠지. 저 역시 비슷한 통증을 느꼈던 터였다.

[근데, 연화가 기억을 지울 거라는 건 어떻게 알았어?]

“내가 걔를 키운 게 몇 년인데. 날고뛰어봤자 내 손바닥 안이지.”

가볍게 코웃음을 흘린 연우는 주변을 둘러보다 차가운 물로 속을 달래 볼 생각으로 냉장고를 열었다. 물병을 쥔 연우는 꽉꽉 찬 냉장고를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이런 짓을 할 사람은 강차헌뿐이었다. 집을 챙겨준 건 연화겠지.

이렇게 챙겨줄 거면서 왜 기억을 없애려고 한 걸까. 미래에 내가 뭘… 하나? 고개를 갸웃거린 연우는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고 있는 드래곤에게 과일 팩을 내밀었다.

“우리 계약은 여전한 거 맞지?”

[당연하지.]

훌쩍거린 드래곤은 꼬리 끝으로 눈물을 닦아내며 과일 팩을 뒤적거렸다. 블루베리 한 알을 물고 오물거리던 드래곤은 기분 나쁜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떫어.]

“던전 부산물이 아니니까 네 입맛에 안 맞겠지.”

힘없이 축 늘어진 드래곤을 쥔 연우는 과일만 따올 생각으로 던전으로 이동했다. 블루베리를 따기 위해 쪼그려 앉자마자 위압감이 느껴졌다. 헤츨링이 된 드래곤을 잡아먹기 위해 몰려든 마수들이었다. 얼마 따지도 못하고 이동한 연우는 품 안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는 드래곤을 토닥였다.

상황이 이러니 당분간 던전은 못 갈 것 같고….

한숨을 쉬며 머리카락을 넘기던 연우는 화끈거리는 귓불에 눈살을 찌푸렸다. 조심스럽게 만져보자 이전보다 피어싱 개수가 늘어있었다. 거울 앞으로 달려가 확인하자 가지각색의 피어싱이 귀에 박혀있었다. 이 중에 하나는 마나 구속구겠지. 드래곤과 계약했으니 효과는 없겠지만, 공식적으로 이능 불안정자로 분류되었으니 다른 사람들과 함께 던전에 출입할 수도 없었다.

보조 가방도 빼앗긴 것 같은데 드래곤 밥은 어떻게 먹이지. 심각하게 고민하던 연우는 핸드폰을 들어 메시지를 남겼다.

>거머리 떼어드릴게요. 연락주세요.

[누구야?]

“무영 길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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