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오늘도 삼촌이 데리러 와요?”
“아니, 오늘은 친구 만나기로 했어.”
연우는 함께 피시방을 가지 못해 아쉬워하는 고윤을 내버려 둔 채 후문의 카페로 이동했다. 높다란 계단을 끝없이 올라가고 있자니 이능 생각이 간절했다. 그냥 눈 딱 감고 이동하고 싶었지만, 멀지 않은 곳에서 로터스 길드장의 마나가 느껴져 상상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연우가 흐르는 땀을 닦으며 카페 안을 둘러보자 금발 머리를 높게 올려묶은 과대가 손짓했다.
“많이 기다렸어?”
“아니. 이거 마셔. 숨 좀 돌리고 얘기하자.”
과대는 연우가 앉기도 전에 미리 시켜놨던 커피를 건넸다. 연우는 자리에 앉자마자 과대에게 그대로 커피를 돌려주었다.
“미안. 수중계 에스퍼가 주는 물은 함부로 먹지 말라는 충고를 들어서.”
방긋 웃은 연우는 표정을 굳히는 과대, 아니 무영 길드장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야.”
“어…떻게?”
“사정을 아는 것 같으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까?”
연우는 노트를 올려둔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며 뒤쪽을 눈짓했다. 로터스 길드장이 몸을 숨긴 채 연우를 지켜보고 있었다.
“환영 유지하기도 힘들 테고, 그러다 진짜가 나타나면 서로 곤란하잖아.”
“그…렇지.”
당황한 기색을 숨긴 무영 길드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연우에게 몸을 기울였다. 펜을 쥔 무영 길드장은 연우를 따라 필담을 시작했다.
>저를 재우는 대가로 거머리는 성공적으로 떼어내셨나요?
<이후에 방법을 알려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 그날 바로 잠드셨습니다.
>기다릴 필요 없어요. 제가 바로 떼어드릴게요. 대신 부탁 하나만 들어주세요.
<죄송하지만, 냉정하게 말씀드리자면 제가 한연우 에스퍼를 어떻게 믿,
>그럼 떼어내면, 제 부탁 들어주실래요?
신중한 표정으로 필담을 나누던 무영 길드장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데, 누군지는 아십니까?
“당연히 알지. 네 동생이잖아.”
무영 길드장이라고 부르다 보니 이름을 잊고 있었다. 조슬기, 조희서. 조금만 생각해도 퍼즐이 딱딱 맞아떨어지는 데 왜 눈치채지 못했을까.
참나, 나보고는 연화 믿고 까분다고 그 난리를 치더니, 자기는 누나 믿고 무영 길드에 들어갈 수 있다고 큰소리치고 다닌 거였다. 참나. 혀를 찬 연우는 무영 길드장이 쓴 글을 확인했다.
>그래도 같은 팀이었는데, 괜찮으십니까?
“팀이라니. 걔랑 나를 팀으로 묶지 마. 내가 걔한테 당한 게 얼만데.”
정말 지긋지긋할 정도로 당했다. 죽을 고비를 넘긴 게 한두 번도 아니었고. 한계에 도달했을 때 폭주한 것도 아닌데 뭔 요란이냐며 적선하듯 흘려주는 가이딩을 허겁지겁 받아먹으면서 얼마나 이를 갈았는지 모른다. C급이 폭주해봤자 뭘 할 수나 있냐며 빈정거리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생생했다. 툭하면 다른 에스퍼와 비교하던 조롱 섞인 어조나, 제게 오물이 묻은 것도 아닌데 혐오스럽다는 듯 쳐다보던 눈빛까지.
그래놓고 갈 곳이 없어지니 뻔뻔한 얼굴로 우리는 팀이 아니었냐며 접근하던 모습까지 치가 떨리도록 싫었다.
“죄송…,”
“됐어. 너한테 사과받자고 얘기 꺼낸 건 아니니까. 그래서, 너는 어디까지 원해?”
깍지 낀 손 위로 턱을 올려놓은 연우가 싱긋 웃었다. 드래곤은 던전에 던져버리자며 고래고래 외치고 있었지만, 일단 무영 길드장의 의사가 우선이었다. 펜을 쥔 채 머뭇거리던 무영 길드장이 입을 열었다.
“동생이 철이 없는 건 어떻게 보면 나 때문이라….”
“사정은 별로 안 궁금해. 너는 성적이 높고 걔는 낮다 보니 비교당해서 삐뚤어졌다고 말하고 싶은가 본데, 그럴 거면 내가 먼저 삐뚤어졌겠지.”
그쪽은 S급과 B급이지만, 이쪽은 S급과 C급이다.
“어떻게 하고 싶은지나 말해.”
“…이능을 잃거나, 기억을 잃는 건 바라지 않아. 그냥 부모님한테 동생 책임지라는 말을 안 들을 정도로만.”
남의 발목에 구속구를 채우던 사람이 할 말은 아니지 않나, 싶었지만 연우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희서가 무영 길드에 들어갈 실력이 아니라는 걸 확실히 보여주기만 하면 되겠군.
“그럼 이런 건 어때?”
연우가 써 내려가던 계획을 본 무영 길드장이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게 해결되고 나면 내 부탁을 들어주는 거로.”
“그런데… 이렇게 해도 되는 거 맞습, 맞아? 이걸로 내 미래가 바뀌는 건 아니지?”
불안해 보이는 무영 길드장을 바라보던 연우는 목덜미를 쓸어내리며 물었다. 내가 미래를 바꿔도 문제없는 거 맞지?
[당연하지. 네가 누구의 계약자인지 잊지 마.]
“걱정하지 말래.”
“그럼… 부탁드립니다.”
악수를 청하는 무영 길드장의 손을 붙잡던 순간, 쿠당, 하는 소리와 함께 인영이 솟아올랐다.
[아이구, 그래. 차헌이가 오래 참았지.]
연우는 놀란 표정으로 차헌을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돌렸다. 무영 길드장 역시 큰 소리에 놀란 듯 눈을 깜박거리다 태연한 얼굴로 연우와 악수했다. 둘 다 차헌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하던 중이었다. 연우는 기억을 잃은 척하는 중이었고, 무영 길드장은 과대의 껍데기를 쓰는 중이었으니까.
“먼저 들어갈게. 연락하고.”
“이거… 드세요. 아무 짓도 안 했으니까.”
“그럼 잘 마실게요.”
커피를 챙겨 일어난 연우는 아르바이트생에게 사과하다 말고 구석에 숨는 차헌을 무시하며 카페를 나섰다. 참나, 저 덩치로 거기에 숨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연우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리다 표정을 굳혔다. 귀여운 건 귀여운 거고 괘씸한 건 괘씸한 거다.
가상 훈련을 받을 때 동의 없이 계속하자고 한마디 했다가 제가 사람으로 보이냐는 둥, 자기한테 관심이 있냐는 둥, 우리는 가치관이 다른 것 같다는 둥 있는 대로 서운한 티를 낼 땐 언제고 자기는 말도 없이 기억을 지워버려? 내가 자기를 잊어도 괜찮다는 거야 뭐야. 연우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가라앉히며 차가운 커피를 힘차게 빨아 마셨다.
[연우 너도 생각이 있었던 것처럼 차헌이도 계획이 있으니까 그랬겠지.]
알고 있었다. 연화가 본 미래에서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질렀을 것이고, 그것을 막기 위해 기억을 지워버린 거겠지. 극단적인 방법이긴 하지만 정말 제가 기억을 잃었다면 효과는 좋았을 것이다. 저를 위해 한 행동이라는 건 알지만 서운했다. 이래서 그때 차헌이가 화냈었구나. 뒤늦게 반성한 연우는 근처를 맴도는 차헌을 외면하며 오피스텔로 들어섰다.
[그래도 인사라도 해주지.]
…다음에. 다 끝나고 나면.
말을 거는 순간 차헌은 자연스럽게 연우의 삶에 침입할 것이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어느 순간 오피스텔에서 함께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가볍게 웃던 연우는 제가 집으로 들어간 걸 확인한 차헌이 멀어지는 순간 허전함에 뒤를 바라보았다.
복잡한 상념이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있었지만, 그럴수록 목표는 뚜렷해졌다. 마른세수를 한 연우는 오피스텔의 문을 여는 것과 동시에 공간을 접었다.
빨리 끝내자. 빨리 끝내고 돌아가자.
* * *
“씨, 왜 오라 가라야.”
자기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아. 입을 삐죽거리던 조희서는 감탄을 숨기며 건물을 올려보았다. 이렇게 성공했으면 하나밖에 없는 동생 좀 도와주고 그러지. 그나저나, 마중도 안 나오고 뭐 하는 거야? 오늘 오라고 자기가 말했으면서? 연락을 해야 하나, 들어가 봐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건물에서 직원이 나왔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입사 테스트받으러 왔는데… 그… 길드장이 따로 말 없던가요?”
“아, 들어오시죠. 조희서 가이드.”
이래야지. 조희서는 깍듯해진 직원을 보며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내부를 훑어보는 순간 감탄이 나올뻔했다. 쓸데없이 크기만 크고 노후화된 센터와 차원이 달랐다. 진작 여기에 입사해야 했는데. 그랬다면 저를 무시하던 강차헌에게 굽실거릴 필요도 없었고, 이수빈 같은 것들에게 무시당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결국 입사하게 될 건데, 아카데미 때부터 받아줬으면 좀 좋아. 투덜거리며 건물을 구경하던 조희서는 마중 나와야 할 인물이 보이지 않아 직원에게 물었다.
“누나는요?”
“길드장님께서는 본사에 계십니다.”
“본사?”
“여기는 연구 지부라 이곳에서 입사 테스트를 받은 다음 본사로 이동하실 거예요.”
사근사근한 말투에도 속이 들끓는 듯했다. 이런 건물이 본사가 아니라고. 헛웃음을 흘리던 조희서는 작게 이를 갈았다.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지 않아 찾아보지도 않았다. 무영 길드의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더욱더 철저하게 자신이 조슬기의 동생이라는 걸 숨겼다. 한연화의 오빠 한연우처럼 조슬기의 동생 조희서로 살아갈 마음이 조금도 없었으니까.
센터에서 두각을 드러내며 차근차근 이름을 알린 뒤, 조슬기가 자신의 누나라고 불리는 그날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하필 한연우랑 엮이는 바람에…. 혀를 찬 조희서는 직원을 따라 검사실로 들어갔다.
“잠시 기다렸다 한 분 더 오시면 검사를 시작하겠, 아, 오셨군요.”
나 혼자 받는 거 아니었어? 지금은 채용 기간이 아니라 거절한 누나는 엄마에게 기어코 한 소리를 듣고 나서야 자신에게만 특별히 기회를 준다고 연락했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뭐야? 조희서는 떨떠름한 기색을 숨기며 회색빛 눈동자의 가이드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정광현입니다.”
“네. 조희서입니다.”
“조희서라면… 아, 혹시 센터에서 오셨어요?”
그렇다고 대답하자 정광현이 흥미로운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자신을 위아래로 살폈다. 뭐야, 왜 저렇게 봐?
“그럼 일단 본격적인 테스트에 앞에서, 조희서 가이드. 가이딩 테스트실로 가실게요.”
안내에 따라 검사를 하고 나오자 검사 결과지를 든 직원이 테스트 준비를 하고 오겠다며 자리를 떴다. 왜 나만 검사를 받냐고 물어볼 틈도 없었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리로 돌아가자 핸드폰을 두드리고 있던 정광현이 신난 얼굴로 다가왔다.
“저기, 있잖아요. 센터에서 일했으면 한연우 에스퍼도 봤어요?”
“같은 팀이었는데요.”
조희서는 ‘팀.’을 강조하며 허리를 폈다. 순간 우리가 언제 팀이었냐는 한연우의 목소리가 떠올라 기분이 상했지만, 곧바로 미소를 지으며 정광현을 바라보았다. 한연우와 팀을 이뤘다는 것으로 명성을 얻을 줄 알았다면 좀 더 잘해줄 걸 그랬,
“와, 그럼 한연우 에스퍼 폭주하는 데 모른척했다는 것도 진짜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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