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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의 주인공이 공이 된 이유-114화 (114/143)

114화

“그게,”

무슨 말이냐고 따지려 했던 조희서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한연우는 아니지만, 최동원이 폭주 증상을 보일 때 무시했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한연우에게 가이딩을 소홀히 한 것도 사실이었고.

하지만 C급은 굳이 가이딩을 할 필요가 않나. 마나 포션으로도 충분히 마나 코어를 가라앉힐 수 있는 용량인데? 굳이 마나를 낭비해가며 가이딩을 할 필요가 없었다.

중요한 건 그 사실을 다른 길드 사람이 알고 있다는 거였다.

“…어떻게 알았어요?”

“에이, 이 판이 얼마나 좁은데요. 벌써 소문 다 났죠. 그쪽, 등급으로 에스퍼 차별한다면서요? 그것 때문에 쫓겨나서 이직하는 거 아니에요?”

“누가 쫓겨났다고.”

발끈한 조희서는 방글방글 웃는 정광현을 보다가 홱, 고개를 돌렸다. 소문이 났다니. 사관학교 동기 몇몇을 제외하고는 연락하고 지내는 사람이 없어 소문이 난 줄도 몰랐다. 그래서 다른 길드에서 이력서를 안 받아준 건가? 초조하게 손톱을 튕기던 조희서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허리를 폈다. 무영 길드에 입사하면 사라질 소문이었다. 신경을 쓸 필요가 없었고, 인정할 필요가 없었다.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아, 네. 뭐….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오늘 테스트 잘 부탁해요.”

내민 손을 내려보던 조희서는 가볍게 악수했다. 맞닿는 손으로 느껴지는 가이드의 마나가 불쾌했지만 애써 웃었다. 아니, 누나는 분명 나한테만 기회를 준다고 해놓고 이 사람은 왜 부른 거야.

조희서는 입술을 잘근거리다 검사지를 들고 들어오는 직원을 보고 벌떡 일어났다. 직원의 뒤로 에스퍼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검사지를 내려보는 직원의 탐탁찮은 표정을 무시한 조희서가 에스퍼들의 등급을 확인했다. A급 세 명, B급 네 명. 꿈을 꾸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황홀한 등급에 입을 틀어막은 조희서는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센터처럼 자신의 가치를 못 알아보는 곳에 입사하는 게 아니었다.

나오길 잘했지. 이제부터 이곳에서 뜻을 펼치면 된다. 조희서는 벅찬 얼굴로 에스퍼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 잠시만요. 조희서 가이드.”

조희서를 붙잡은 직원은 입사 테스트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았다.

“일단, 사전에 설명 드렸듯 두 분은 입사 조건을 만족하지 못하셨잖아요? 그래서 얼마나 능숙하게 가이딩을 하는지 지금 하는 테스트로 판단하게 될 거고, 면접관분들이 지켜보시다가 입사를 결정하실 겁니다.”

엄마한테 이런 말은 못 들었는데? 테스트만 통과하면 무조건 입사시켜줄 거라는 말만 들었다. 조희서는 입술을 말아 물며 주변을 힐끔거렸다. 면접관은 누나겠지? 아니, 대체 무슨 테스트를 하길래….

“조희서 가이드.”

“네?”

“너무 긴장하실 필요 없고, 평소 기량만 보여주시면 됩니다. 이전에 몇 명까지 맡아보셨습니까?”

“사관학교에서 A급 두 명을 맡았고, 센터에서는 세 명을 맡았습니다. 팀 외 인원인 A급 에스퍼도 담당했으니 총 네 명이네요.”

“정광현 가이드는 고정팀 세 명 맞으신가요?”

정광현이 그렇다고 답하자 직원이 에스퍼에게 손짓했다. 정광현에게는 A급 두 명, B급 한 명이 자신에게는 B급 세 명이 선정되었다. 순간 오물을 뒤집어쓴 듯한 모욕감이 들었다.

“테스트가 준비되는 동안 마나 적응을 좀 하시면서 기다려주시겠,”

“잠시만요. 저도 A급 서포트 가능한데요.”

뒤에 선 B급 에스퍼가 헛웃음을 흘리는 게 들렸지만, 무시한 채 나가려는 직원을 붙잡았다.

“진정하시고, 이대로 고정팀이 정해지는 게 아니라 단순한 입사 테스트입니다. 가이딩을 얼마나 능숙하게 사용하고, 에스퍼와 어떻게 어우러지는지 확인하는데 등급이 중요합니까? 굳이 A급을 맡고 싶으시다면 테스트 중 상황을 보고 교체하든가 하겠습니다. 그럼.”

조희서는 직원의 설명에도 정광현에게 배정된 A급 에스퍼를 애처롭게 바라보다 풋, 하는 웃음소리에 표정을 굳혔다. 웃음소리의 주인공은 정광현이었다.

“왜… 웃어요?”

“아, 뭐. 자신감이 대단하다 싶어서요. 뭔가 억울한 것 같은데, 음… B급이라고 같은 B급은 아니잖아요?”

기가 막혀 입만 뻐끔거리는 조희서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준 정광현은 배정된 에스퍼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조희서 역시 에스퍼들과 인사를 나누려 했지만, 저들끼리 시선을 나눈 에스퍼들은 시큰둥한 태도를 보일 뿐이었다.

잠시 후, 준비를 끝내고 들어온 직원이 둘을 안내했다. 정광현과 오손도손 걸어가는 그의 에스퍼들과 달리, 동떨어져 걸어가는 자신의 에스퍼들을 보자 마음이 불편했다.

‘조희서 가이드. 여기 계셨습니까.’

박서현이 이런 건 잘 챙겼는데…. 입술을 말아 물고 ‘나 삐졌어요.’ 티를 내도 에스퍼들은 신경도 안 쓰고 있었다. 합격하자마자 저것들이랑은 안 한다고 해야지. 다짐하는 동안 검은 반구를 탁탁 두드린 직원이 설명을 계속했다.

“말이 가상 던전이지 홀로그램 마수를 상대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처음에는 가볍게 손발을 맞추기 위해 두 팀이 같이 진행할 거고, 그다음에는 조희서 가이드, 정광현 가이드 순으로 진행될 겁니다.”

검은 반구에 소용돌이 문양이 나타나자 테스트를 시작하겠다는 안내 방송이 울렸다. 가상 던전은 처음인데. 눈치를 보며 뒤로 빠지던 조희서는 마른침을 삼키며 소용돌이 속으로 발을 집어넣었다.

끈적한 안개를 통과하는 불쾌감과 동시에 숨이 턱, 막혔다. 괴로워 바둥거리던 조희서는 부축해주는 손길에 의지해 숨을 가다듬었다. 그런 조희서를 밀어낸 에스퍼가 손을 내밀었다.

“저기요. 가이딩 안 해요?”

“네?”

보조 가방에서 물을 꺼내다 말고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 명의 에스퍼를 둘러보았다. 자신을 부축하고 있는 에스퍼뿐만 아니라 다른 에스퍼도 불만 어린 표정으로 손을 내밀고 있었다.

“아니, 방금 들어왔는데 어떻게 가이딩을….”

헛웃음을 흘리며 셋을 노려보던 조희서의 눈에 멀쩡한 얼굴로 가이딩을 하는 정광현이 들어왔다. 저딴 인간에게 뒤처지는 모습을 보여줄 수 없었다. 마른침을 삼키며 멀미를 달랜 조희서는 그들의 손을 붙잡고 가이딩을 불어넣었다.

[아- 들리십니까? 첫 번째 마수가 곧 나타날 건데, 보이십니까?]

착하게 네- 대답한 에스퍼들은 앞발을 휘두르는 사막 사마귀를 응시했다.

[이 정도 난이도로 진행될 거고, 가이드 두 분 몇 마리까지 처리할 수 있으세요?]

“저는 세 마리? 그 정도는 자신 있는데 그 이상은 모르겠네요.”

대답한 정광현이 조희서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조희서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바라봤다.

“…설마 지금, 제가 마수를 몇 마리 처리할 수 있는지 묻는 거예요? 저는 가이드잖아요.”

그 순간 뒤쪽에서 크흠,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를 비웃는 소리가 분명했지만, 모욕감보다 황당함이 우선이었다. 가이드는 후방에서 보호받는 존재지 마수와 싸우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게 아니라면 에스퍼가 왜 존재하겠어.

[음… 일단 시작하겠습니다.]

신호와 함께 사마귀들이 달려들었다. 튀어 나간 에스퍼들의 손발이 딱딱 맞아떨어지며 사마귀의 목이 잘려 나갔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조희서는 넘실거리는 정광현의 가이딩에 눈썹을 찌푸렸다. 질 수 없다는 듯 가이딩을 방사하던 조희서는 올라오는 멀미에 입을 틀어막았다.

[잠시 휴식하고, 조희서 가이드 심사 시작하겠습니다.”

마수들이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에스퍼들이 다가와 손을 낚아챘다. 이게 무슨 무례냐며, 허락도 구하지 않느냐고 소리치려던 조희서는 허리에 감기는 손에 기함했다.

“잠, 잠시만. 제가 드릴게요.”

억지로 뽑혀 나가는 가이딩에 약한 현기증이 올려와 비틀거리고 있는데도, 에스퍼들은 걱정 어린 말 한마디 없이 가이딩만 받아 갔다. 심지어 점막 가이딩을 하는 정광현을 보며 입술을 들이대기까지 했다. 고개를 비틀어 피한 조희서는 뒤에서 대기하고 있는 A급 에스퍼를 쳐다봤다. A급이 있는데 B급한테 점막? 접촉도 감지덕지할 줄 알아야지.

[심사 시작합니다.]

신호와 함께 바닥에서 넝쿨이 솟아올랐다. 발목에 감긴 넝쿨 때문에 엉덩방아를 찧은 조희서가 에스퍼를 불렀지만, 그들은 구하러 오기는커녕 작은 단검 하나를 던져줄 뿐이었다. 단검을 쥔 채 씩씩거리던 조희서는 점점 세게 감기는 넝쿨을 보다 결국 손을 움직였다.

겨우 넝쿨을 잘라내자마자 에스퍼가 다가와 가이딩을 요구했다.

이후 넝쿨을 피해 도망 다니고 있을 때도 새로운 마수가 나타났을 때도 정말 시도 때도 없이 에스퍼들은 가이딩을 요구했다. 당연히 그들을 쳐다보는 조희서의 표정은 곱지 못했다. B급이라 다른 줄 알았더니, 툭하면 가이딩을 조르던 최동원과 다를 게 없었다.

“저기요. 저도 왔다 갔다 하기 귀찮거든요.”

“질이 안 되면 양이라도 돼야죠.”

“받은 것 같지도 않은데.”

못마땅한 게 티가 났는지 가이딩을 받으러 오던 에스퍼마다 한 마디씩 툭툭 던지고 갔다. 감히, 내 이능을 무시해? 수치심에 이마 끝까지 붉어진 조희서는 눈물까지 보였지만, 사과하는 에스퍼는 없었다.

입사 테스트고 뭐고 안 하겠다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진짜로 돌아가라고 하면 어떡하지? 무영 길드로 이직한다고 그렇게 큰소리를 쳤는데, 이대로 센터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이를 악문 조희서는 에스퍼의 조롱에도 끝까지 가이딩을 이어 갔다.

심사가 끝났다는 말에 주저앉은 조희서가 저린 손발을 주물렀다. 머리까지 어질한 것이 탈진 증세가 분명했다.

“저기, 조희서 가이드.”

차례를 기다리며 몸을 풀던 정광현이 옆에 쪼그려 앉았다.

“현장 경험 없죠?”

“왜 물어보는데요.”

뚱한 목소리로 대답하자, 정광현이 안타깝다는 듯 눈썹을 늘어트리며 웃었다.

“아니, 뭐 다른 뜻은 아니고. 곱게 자란 티가 나서요. 한계까지 가이딩해 보는 거, 그거 꽤 중요한 경험이거든요.”

뒤로 물러나라는 손짓에 엉덩걸음으로 물러서자, 정광현의 심사가 시작되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니 서러움이 몰려들었다. 제가 이렇게 앉아있는데 도우러 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한연우가 있었다면 제가 주저앉기도 전에 자리를 옮겨줬을 텐데. 최동원은 파편이 튀지 않도록 막아줬을 것이고, 박서현은 호들갑을 떨며 옆에서 갖은 수발을 자처했을 게 눈에 선했다.

코를 훌쩍이던 조희서의 눈에 밖으로 나가는 퇴장 버튼이 보였다. 내 차례도 끝났는데 굳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필요가 있나? 빨리 집으로 가서 엄마아빠한테 위로를 받고 싶었다. 아빠는 하나밖에 없는 동생을 챙겨주지도 못하냐며 누나에게 혀를 찰 것이고, 엄마는 언제나처럼 자신이 최고라며 치켜세워 줄 것이다. 지금 당장 그런 위로가 필요했다.

그리고 박서현한테 말을 걸어봐야지. 공동구역에서 떠도는 것보다 나랑 있는 게 더 나을 테니까 분명 기쁘게 반길 것이다. 센터와 무영 길드를 저울질하던 조희서가 비틀비틀 일어나  버튼을 누르는 순간 웨-엥 하는 경고음이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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