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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의 주인공이 공이 된 이유-115화 (115/143)

115화

“뭐, 뭐예요?”

까맣게 물든 어둠 속. 당황한 목소리가 여기저기 울려 퍼졌다. 조희서 역시 당황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다 빛무리가 떠오르자 후다닥 등 뒤로 손을 숨겼다.

“무슨 짓을 한 거예요?”

“아무, 아무것도….”

고개를 흔들며 부정하던 조희서는 코앞에서 생성되는 벽에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조희서 가이드. 무슨 문제 있으십니까?]

“아뇨, 그냥 나가려고….”

[…아, 제가 미리 설명해 드리는 걸 깜박했군요. 가상 던전 내부에 위치한 버튼은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다급한 경우에 눌러주시면 됩니다. 많이 힘드시면 문을 열어드릴까요?]

지금 열어달라고 부탁하는 건 이 정도 가이딩에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고 인정하는 나 마찬가지였다. 괜찮다고 대답한 조희서의 옆으로 다가온 정광현은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와, 당신 가상 던전 경험도 없구나?”

사실이었지만 인정하기 싫었다. 가상 던전 훈련쯤이야 한연우가 강차헌과 어울리지만 않았더라도 진작에 받았을 거였다. 한연우만 아니었어도 지금쯤 현장에서 활약하고 있었을 텐데.

[그럼 계속해서 심사 진행하겠습니다.]

“저기, 도중에 죄송한데요. 진짜 너무 궁금해서요.”

카메라를 향해 손을 들어 올린 정광현은 조희서를 천천히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실전 경험은커녕 가상 던전 경험도 없는 사람이 어떻게 입사 테스트를 받게 된 거죠? 같은 B급이라고 묶이는 것도 불쾌할 정도인데.”

[정광현 가이드.]

말조심하라는 듯한 음성에 정광현이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질문을 듣지 못한 척 심사가 재개된다는 말에 정광현은 못마땅하게 카메라를 노려봤다. 그리고 조희서를 보다가 흥, 하는 소리를 내며 자리로 돌아갔다.

수치심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가이드로 발현한 이후로 단 한 번도 이런 대접을, 아니,

‘그쪽이 뭔데요?’

강차헌…. 주먹을 쥐고 파들거리던 조희서는 아예 반대쪽으로 가 있는 에스퍼를 보며 코웃음을 쳤다. 줘도 안 가질 것들이. 입술을 깨물고 있던 조희서는 벽에 기대있는 A급 에스퍼를 바라봤다.

아, 희서야. 왜 이렇게 멍청하게 구니.

생각이 짧았다. 제가 노리는 건 B급 에스퍼의 파트너 자리 따위가 아니라 A급, 넘어서 S급 에스퍼의 파트너였다. 저 사람만 회유할 수 있다면….

마른침을 삼킨 조희서는 엉망이 된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A급에게 다가갔다.

“저기.”

눈을 맞춘 조희서는 사근사근하게 웃으며 마수들과 싸우는 에스퍼를 가리켰다.

“이왕 들어오신 김에 같이 하시면 좋을 텐데, 저랑 같이 하실래요?”

권유에 팔짱을 끼고 있던 에스퍼가 팔을 뻗었다. 활짝 웃은 조희서가 에스퍼의 손을 붙잡으며 가이딩을 불어넣었다. 이대로 눈도장을 찍어서 자연스럽게 팀이 되는 것까지 상상하던 조희서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맞잡은 손을 내려보았다. 분명 가이딩을 흘려 넣고 있었지만 뭔가 헛도는 기분이었다.

“잠시, 잠시만요.”

에스퍼의 손을 붙잡으려 했지만, 혀를 찬 에스퍼는 야멸차게 손을 뿌리쳤다.

“B급이라 그런지 효율도 떨어지는데 그만 하세요.”

픽, 웃는 소리에 조희서는 떨리는 손을 맞잡았다. 어깨까지 떨리고 있었다. 살면서 이런 수모를 당한 적이 없었다. 모두 가이드인 자신을 떠받들기 바빴지…. 조희서는 노골적으로 비웃는 정광현과 자신을 무시하는 에스퍼를 번갈아 보았다. 누나구나.

누나가 꾸민 짓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에스퍼들이 자신을, 가이드를 무시할 이유가 없었다.

입술을 깨문 조희서는 모든 심사가 끝났다는 방송이 나올 때까지 카메라를 노려봤다. 공간이 허물어지고 문이 열리는 순간 뛰쳐나간 조희서는 직원을 찾았다. 당장 누나를 데려오라고, 엄마아빠한테 다 말할 거라고, 동생한테 이래도 되냐고, 따져 물어야할 말이 두서없이 머릿속을 돌아다녔다. 흥분을 억누를 수 없었다. 거친 발걸음으로 건물 안을 돌아다닐 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희서야.”

“엄마? 아빠?”

걸음을 멈춘 조희서는 입구에 선 엄마와 아빠를 쳐다보았다. 아이고, 소리와 함께 달려온 엄마는 자신에게 포션병을 쥐여 주었다. 아니, 에스퍼들이나 먹는 포션을 왜 나한테.

“아, 엄마. 왜 이래.”

얼굴을 문지르는 손길을 밀어낸 조희서는 피가 묻은 손수건을 보고 나서야 자신이 코피를 흘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 지경이 되었는데 아무도 말을 안 해줬다고? 조희서는 배신감에 얼룩진 표정으로 에스퍼들을, 정광현을 노려보았다.

“아이고, 내 새끼.”

어르고 달래는 엄마의 손길에 서러움이 북받쳤다.

“엄마, 누나가아,”

칭얼거리던 조희서는 온몸을 덮치는 위압감에 그대로 굳었다.

“내가 뭐?”

오랜만에 듣는 음성인데도 전혀 반갑지 않았다. 이대로 도망쳐야 한다는 경고가 머릿속에 울리고 있었다. 조희서는 절박한 손길로 엄마를 끌어안으며 다가오는 누나를 경계했다.

“그만해라.”

손을 휘두른 건 아빠였다. 저와 같이 굳어있는 엄마와 달리 구속구를 차고 있는 아빠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누나를 향해 손가락질했다.

“너는 어릴 때나 지금이나 영 공격적이야. 네가 아무리 공격계라도 동생한테는 누나답게 굴어야지.”

떼잉. 혀를 찬 아빠는 조희서에게도 손가락질을 멈추지 않았다.

“너는 가이드가 되서 말이야. 어? 에스퍼 세 명도 감당하지 못할 거면 엄마한테 전화해서 우는 소리 내는 것도 그만해.”

“그만해. 희서도 속상할 텐데 위로도 못 해줄망정.”

“당신이나 그만해. 언제까지 치마폭에 감싸고 있을 거야?”

“듣지 마, 희서야. 엄마가 말했잖아. 그냥 공무원이 최고야. 엄마가 센터장님한테 말씀드려 볼 테니까 다시 센터로 돌아가서 잘해보자, 응?”

“두 분 다 그만하시고, 식당 예약 늦겠어요.”

그제야 못마땅하게 시선을 주던 아빠와 마지막까지 등을 도닥이던 엄마가 입을 다물고 직원의 안내에 따라 자리를 떠났다.

“그래서였구나.”

정광현의 목소리에 조희서는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었다.

“능력은 쥐뿔도 없는데 무영 길드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게.”

아무 말도 못하고 있던 조희서는 여전히 위압감을 뿜어내고 있는 누나를 노려보았다.

“누나는 내가 이런 소리 듣고 있는데 왜 가만히 있어? 아니, 그전에 엄마아빠는 왜 부른 건데?”

“언제는 밖에서 아는 척하지 말라며? 그리고 오겠다고 한 건 엄마야. 입사하고 집에 한 번도 안 갔다며? 엄마가 네 얼굴 잊겠다고 우는소리를 하는데 내가 어쩌겠어?”

희서가 이쪽으로 오는 김에 다 같이 밥 한 끼라도 하는 건 어떻겠냐고 운을 떼긴 했지만. 어깨를 으쓱거린 무영 길드장은 신이 나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정광현과 사태를 관망하고 있는 A급 에스퍼를 쳐다봤다.

무영 길드장의 시선을 받은 연우는 방긋 웃어주며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너는 거기서 어? 너한테 가이딩을 받느니 포션을 먹는 게 낫겠다. 그렇게 말했어야지! 아니면 이것도 가이딩이냐고 비웃어주던가!]

알았으니까 그만해.

[효율이 영 떨어지네요? 그렇게 착하게 말해서 저 새끼가 충격받을 것 같아? 그렇게 순해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래!?]

들은 대로 돌려준 것뿐이야.

[뭐? 저 새끼가 너한테 그런 말을 했어?]

캬아악 거리는 소리에 귀를 틀어막은 연우는 뛰쳐나가는 조희서를 눈으로 쫓았다. 툭툭 건드리는 손짓에 고개를 돌리자 정광현, 아니 이수빈이 입을 가리고 히죽거리고 있었다.

“아, 나, 무슨 십 년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간 것 같아. 너보고 맨날 연화 들먹이면서 혈연이 어쩌고저쩌고하더니, 자기는 더 하네. 그래, 조희서 주제에 무영 길드에 들어갈 수 있을 리가 없었지.”

속삭인 이수빈은 가발을 벗어 던졌다. 그에 환영이 벗겨지며 원래 모습이 드러난 이수빈은 다음에 이런 일이 생긴다면 또 불러달라며 어깨를 맞대왔다. 킥킥 웃던 이수빈은 귀에 주렁주렁 달린 피어싱을 보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몸은 좀 괜찮아?”

“아직은.”

짧은 대답에 이수빈은 더 묻지 않겠다며 입을 다물고는 발걸음도 수줍게 무영 길드장에게 다가갔다. 이렇게라도 만나 뵙게 돼서 영광이라며 인사를 건넨 뒤, 에스퍼인 척 위장하고 있던 가이드에게는 다음에 꼭 같이 훈련할 수 있으면 좋겠다며 손을 내밀었다. 역할을 바꾸길 잘했다, 자신이었다면 그렇게 시원하게 비꼬지 못했을 거라며 깔깔 웃는 둘을 지켜보는 연우에게 무영 길드장이 다가왔다.

“어떻게 하기로 하셨어요?”

“동생이 센터에서 정식 퇴사한 게 아니라 일방적으로 뛰쳐나왔으니, 강차헌 에스퍼가 어떻게 처리하냐에 따라 고민해보려 합니다.”

씩 웃던 무영 길드장은 복잡한 표정으로 뒷말을 붙였다.

“이렇게 쉽게… 마무리될 줄 몰랐습니다.”

“미워도 가족이니까요. 내 손으로 하긴 힘들어도 남 손을 빌리면 쉽죠. 거머리를 떼어냈으니,”

방긋 웃어준 연우는 무영 길드장에게 보따리를 내밀었다.

“부탁, 들어주실 거죠?”

긴장한 표정으로 보따리 안을 들여다보던 무영 길드장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게 무슨…?”

“쪽지에 적어놨으니 그대로 부탁드려요.”

보따리를 뒤적여 쪽지를 찾은 무영 길드장은 눈썹을 찌푸렸다.

“끝입니까?”

“네.”

어이없는 얼굴로 안을 샅샅이 뒤진 무영 길드장이 직원에게 보따리를 넘겼다. 재차 끝이냐고 물어보는 무영 길드장에게 그렇다고 답한 연우는 목덜미를 문질렀다.

“말씀드렸잖아요. 저도 당한 게 많다고. 길드장님을 핑계 삼아 제 원한을 갚은 거나 마찬가지니까 그거면 충분해요.”

정말이었다. 드래곤에게 당하는 이상원을 봤을 때는 큰 감흥이 들지 않았는데, 울며 뛰쳐나가는 조희서를 보니 이수빈의 말대로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듯했다.

“그럼 빠른 시일 내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이제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가발을 돌려준 연우는 곧바로 집으로 향했다.

* * *

“저기, 센터장님.”

부름에 서류에 파묻혀있던 차헌이 고개를 들었다. 낯선 듯 익숙한 호칭에 미간을 찌푸리자 옆에 앉아있던 윤석현이 에스퍼에게 손짓했다. 서류를 확인하는 차헌을 대신해 보고를 들은 윤석현은 심상찮은 표정으로 지도를 펼쳤다.

보고서와 지도를 비교해보던 윤석현은 에스퍼를 돌려보낸 뒤 차헌을 불렀다. 목소리 한번 능글능글했다.

“센터장~님~”

“시끄러워요.”

“왜요? 잘 어울리는데? 그때도 우리 이런 사이였어요? 그쪽은 센터장이고, 나는 보좌관?”

무시해도 윤석현은 알려달라며 몸을 붙여왔다. 차헌은 손을 까닥여 얼음벽으로 윤석현을 저 멀리 밀어냈다. 비밀을 나누는 건 연우면 충분했다. 서류를 읽어 내려가던 차헌은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보고 싶어.

중얼거린 그는 시간을 확인했다. 곧 연우가 하교할 시간이었다. 절로 들썩이는 몸을 잡아 누르며 쌓인 서류를 노려보았다. 연우를 지키기 위해서 임시직을 맡은 거지 이 새끼들 뒤치다꺼리하려고 맡은 게 아니었다.

협회 이 자식들은 하라는 대로 하면 된다더니, 어느 정도 일을 쳐내는 것 같자 은근슬쩍 일을 맡기고 있었다.

“센터장님. 화난 건 알겠는데 서류는 얼리지 마시고, 이것 좀 보세요. 여기에 마수가 나타났다는데요?”

“어딘데요?”

휘날리는 얼음결정을 낚아챈 차헌은 지도를 확인했다.

“여기는 게이트도 아니고 위험 구역도 아닌데…?”

고개를 끄덕인 윤석현이 보고서를 들어 올렸다.

“일반 주거 지역이래요. 게이트 탐색대가 발견하고 수습해서 망정이지, 놓쳤으면 큰일 날 뻔했지 뭐예요. 자, 여기서 질문. 여기 누가 살게요?”

“제가 어떻게 알아요?”

“이진희 에스퍼요.”

“그게 누구…?”

보고서를 넘긴 윤석현은 사진을 가리켰다.

“센터장 비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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