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이 사람 뭔가 좀 수상하긴 했어.”
탁, 소리가 나게 보고서를 내려 둔 윤석현이 팔짱을 꼈다. 사진 속 이진희를 노려보는 눈길이 못마땅했다.
“뭐, 자랑은 아니고. 내가 정말 별의별 훈련을 다 받았는데, 이런 사람은 처음 봤어요.”
“하나도 못 알아듣겠으니까, 무슨 말인지 알아듣게 좀 말해볼래요?”
윤석현은 쉽사리 입을 떼지 못했다. 그때의 일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 같은 불쾌함이 느껴졌다. 윤석현은 작게 몸서리치며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안 보였어요.”
그게 말이 되나? 차헌이 눈썹을 들어 올리자, 소파에 주저앉은 윤석현이 발끝을 잘게 떨었다.
“알잖아요. 나한테는 웬만한 아이템 안 먹히는 거. 백두 길드의 안개 포션도 안 통하는 게 난데 허, 아무것도 안 보이더라니까….”
말끝을 흐린 윤석현은 신경질적으로 손톱을 물어뜯었다. 자신을 정신계 나부랭이라며 폄하하고 있지만, 알고 보면 프라이드가 굉장히 높은 사람이다. 저 때 말을 걸면 자기가 얼마나 잘났는지 끊임없이 칭찬을 요구하기 때문에 내버려 둬야 했다.
꿍얼거리는 목소리를 무시한 차헌은 쌓여있는 보고서를 찬찬히 읽어 내려갔다. 센터가 정비할 수 있는 것과 협회에 넘겨야 할 것을 분류하고 있자 진한 현타가 몰려왔다.
내가 왜 이렇게 열심히 하고 있지? 어차피 미성년자라 인정도 못 받을 건데? 이러고 있을 시간에 먼발치에서 형을 보는 게 더 좋은 일 아닌가? 센터가 무너지든 말든 나랑 무슨 상관이지? 나는 이제 센터 소속도 아닌데?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상념을 떨친 차헌이 문을 쳐다봤다.
“강차, 아니, 센터장님.”
방문자는 도지원이었다.
“덕분에 복귀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도지원을 선두로 우르르 들어온 토벌대가 차헌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차헌은 그 모습을 복잡한 표정으로 지켜봤다.
이상원의 실종과 아무런 관련이 없음에도 이상철의 강력한 요구에 협회장은 토벌대원들의 근신을 명했다.
증거도 없는데 왜 사람을 가둬놓냐. 센터장도 없고, 이상원도 없는데, 토벌대도 없다, 는 뜻을 담은 협박성 짙은 편지를 보낸 게 아니었다면 지금까지도 근신 중이었겠지.
죽기 직전까지 자신을 조롱하고 무시하던 사람들에게 감사 인사를, 그것도 센터장실에서 받으니 기분이 묘했다. 네까짓 게 왜 센터장이냐며 무시할 줄 알았는데.
“그래서 어떻게 할까요? 토벌대가 복귀했으니 이번 던전은 협회에 안 맡겨도 되겠는데?”
윤석현의 말에 토벌대 중 한 명이 차헌의 눈치를 봤다.
“저기. 센터장님. 이상원 에스퍼가 복귀하기 전까지… 토벌대장 자리는 공석인가요?”
“설마 토벌대장 없이 저희끼리 가나요…?”
조심스러운 물음에는 차헌도 함께 갈 거냐는 뜻도 담겨 있었다. 도지원 역시 부담스러운 눈빛으로 차헌을 응시하고 있었다. 시선을 받은 차헌은 혀를 찼다. 다들 한 능력이 있는 에스퍼인데 이상원 하나 없다고 주눅 들어있는 모습이 기괴했다. 대체 팀원들 관리를 어떻게 한 거야. 작게 한숨 쉰 차헌은 호출기를 눌렀다. 자신은 어디까지나 임시고, 저 인간들의 정신머리를 개조할 사람은 따로 있었다.
“그, 어, 센터장님? 부르셨어요?”
“공격대장은 왜 부른 거야?”
“곽지후 에스퍼랑 도지원 에스퍼. 둘이 합을 맞춰 본 적 있어요?”
“왜 나 무시해?”
차헌은 대답 대신 윤석현에게 보고서를 안겨준 뒤, 어리둥절한 표정인 두 사람에게 손짓했다. 센터의 토벌 방법은 압도적인 힘으로 찍어 누르는 것. 빠르고 안전하게 공략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선두가 무너지면 몰살당한다는 단점이 있었다. 지금도 봐라. 이상원 하나 없다고 자기들끼리는 아무것도 못 한다며 발을 빼고 있었다.
“있어요, 없어요?”
“합을 맞춰 본 적은 있지만, 저희가, 그러니까 공격대가 토벌대의 조력자에 가까운 포지션이었습니다. 같이 공격한 적은… 없죠?”
공격대장의 말에 도지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지금 가서 연습해봐요. 정글형 던전이라니까 덩굴 마수 위주로.”
차헌은 지금 토벌대가 들어가서 정리를 하고, 따라 들어간 공격대가 뒷수습하는 게 아니라 다 같이 들어가서 치고 빠지는 식으로 공격하는 거다. 할 수 있겠냐? 라고 묻고 있었다. 도지원과 공격대장이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센터에 있는 몇 없는 S급 중 하나는 실종되었고, 하나는 협회에 끌려갔고, 하나는 정신계고, 하나는 임시직이다.
“못 하겠으면 협회에 던전 넘기고.”
“아, 아뇨. 일단 연습은 해보겠습니다.”
그럴 수는 없었다. 계속해서 협회에게 던전 토벌권을 넘겨주게 되면 토벌대가 존재할 이유가 없었다. 다급한 대답에 차헌이 고개를 까닥였다.
“연습 며칠 할 건데요?”
“네? 어? 한 일…주일?”
“사흘 줄게요. 그 안에 끝내고 토벌 준비해요.”
사흘이라니. 울상을 짓는 도지원과 달리 공격대장은 조용히 눈을 빛냈다. 센터장과 이상원이 이해하지 못하는 전술이라 써보지는 못했지만, 공격대장 역시 한 번쯤 생각해봤던 작전이었다.
토벌대와 공격대가 힘을 합치면 방어하는 인원도 공격하는 인원도 배로 늘어난다. 보조하는 인원 역시. 가이드들이 조금 힘들겠지만….
“해보겠습니다.”
공격대장은 강차헌에게 시선을 떼지 못하는 도지원을 붙잡고 일어났다. 센터장실을 빠져나가는 이능력자들을 눈으로 좇던 윤석현이 차헌을 바라봤다.
“저들이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네.”
A급, B급이 아니라 C급, D급으로도 성공했던 방법이었다. 다들 차헌이 성공률이 높아서 그 작전을 사용한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아는 전술이 그것밖에 없었다. 전술이라곤 어깨너머로 배운 게 전부인 차헌에게 연우가 알려준 방법이었다.
한연우….
입속에서 연우의 이름을 굴려보던 차헌은 울적한 표정으로 책상 위를 돌아다니는 인형을 내려보았다. 강의가 끝났는지 연우를 닮은 인형이 뽈뽈 이동하고 있었다. 어디로 가지? 집으로 가는 건가?
“그래서, 이건 어떻게 할까요?”
간신히 인형에게서 시선을 뗀 차헌은 윤석현이 내미는 보고서를 받아들었다. 센터장 비서의 집에서 발견된 마수라. 잠시 고민하던 차헌은 명단을 골라 윤석현에게 건넸다.
“이렇게 다녀와요.”
“다녀와? 나도? 나도 가요? 이렇게 연약한 나를 현장에 보내겠다고?”
웃기는 소리. 총을 쥔 윤석현은 근접전에 한해서는 누구보다 강했다. 윤석현은 묘한 표정으로 차헌을 쳐다보다 명단을 확인했다. 공동 구역 에스퍼와 B 구역의 가이드. 방어계와 공간계로 구성된 걸 봐서는 여차하면 튀라는 건가?
“게이트도 아니고, 위험구역도 아닌데 마수가 나타난 이유가 궁금한 거잖아요. 그쪽이 비서의 기억을 못 읽는 것도 그렇고. 그 이유는 그쪽만 확인할 수 있을 건데, 당신이 아니면 누가 갑니까. 그리고 센터장이 이능을 잃었다는 걸 비서가 몰랐다? 말도 안 되잖아요. 가서 무슨 일인지 알아보고 와요.”
명령에 윤석현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쪽만 확인할 수 있다, 당신이 아니면 누가 가냐는 말이 꽤 기분 좋게 들렸다. 윤석현은 나가다 말고 차헌을 돌아봤다.
“이상철은 어떻게 해요?”
센터장이 구금되고, 차헌이 임시 센터장이 된 이후로도 이상철은 꾸준히 수색권을 넘길 것을 요청하고 있었다. 흔쾌히 허용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이상철과 동행하겠다는 청하 길드원의 인원수가 너무 많았다. 누가 봐도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뽑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겠다는 속셈이었다. 인원을 줄여달라는 말을 못 들은 척하고 있으니, 차헌 역시 똑같이 대응해야 했다.
“뭘 물어봐요. 협회장한테 넘겨요.”
알겠다고 대답한 윤석현이 나가고, 차헌은 보고서를 정리하다 말고 웅크린 인형을 응시했다. 집에 도착한 건가? 아니면 또 피시방?
깊게 한숨 쉰 차헌은 의자에 몸을 기댔다. 한연화가 소원을 빈 지도 벌써 한 달째였다. 원래라면 연우에게 고백을 받고 알콩달콩한 하루를 보내고 있을 시간이었는데….
모르는 사람.
중얼거린 차헌은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온기 없던 눈빛을 떠올리자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래도 예전에는 에스퍼라는 공통점이라도 있었지, 이제는 뭐로 말을 붙이냐고. 한연화는 절대로 다시는 제 오빠와 엮일 생각을 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 말을 순순히 따를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연우가 한연화를 위해 희생할 수 없도록, 연우를 가둬두는 계획을 짜던 차헌은 턱을 괸 채 고민에 빠졌다. 연우의 이동 범위를 고려한다면 산속의 별장보다는 섬이 좋았다. 형이 수영을 잘했던가…?
지도를 내려보던 차헌은 거칠게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형을 못 보니까 별생각을 다 하게 되네. 지도를 치웠는데도, 한 번 시작된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제일 먼저 든 생각은 팔찌였다. 처음 봤을 때부터 수상쩍던 팔찌의 정체가 드래곤이었다니. 연우는 알고 있었을까, 모르고 있었을까. 그렇게 예민한 사람이 자신의 손목에 달린 마수를 못 알아봤을 리는 없으니, 알고 있었을 확률이 높았다. 그렇다면 왜 비밀로 했을까?
왜 드래곤과 연우의 마나가 비슷하게 느껴질까. 운명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연우와 자신의 마나의 파장은 닮아 있었다. 그렇다면 자신과 드래곤의 마나 역시 비슷하게 느껴져야 할 텐데, 드래곤에게서 느껴지는 감정은 적대감뿐이었다. 연우에게서 느낄 수 있는 포근함, 안정적인 느낌은 전혀 없고 날 선 느낌만 전해졌다.
그와 비슷한 느낌을 한연화에게서도 받았단 말이지. 자신을 노려보는 뾰족한 눈꼬리처럼 한연화의 마나는 뾰족함 그 자체였다. 그리고 아무리 가족이라도 마나까지 비슷할 수 있나?
그때 드래곤을 붙잡고 캐물었어야 했는데.
한연화의 기세에 휘말려 연우가 기억을 잃는 장면을 보고만 있어야 했다. 반대할 수도, 찬성할 수도 없었다. 나 때문에 죽니 마니 하는데 거기서 어떻게 말리냐고. 한숨을 쉰 차헌은 인형의 머리를 문질렀다.
궁금한 건 그게 끝이 아니었다. 자신과 연우가 운명으로 엮여 있다는 사실을 배제하고 좀 더 객관적으로 봐야 했다.
왜 형의 마나에서 가이딩이 느껴졌을까.
연우가 대단한 사람인 건 맞지만, 한 이능력자가 두 개의 이능을 부리는 경우는 아예 없었다. 에스퍼가 두 가지 이능을 부려도 난리가 날 판에, 에스퍼가 가이딩도 한다? 다른 건 몰라도 메스를 들고 뛰어오는 백두 길드장을 막기 위해 온 센터가 나서야 했을 것이다. 그 정도로 흔치 않은, 아니, 존재할 수 없는 일이었다.
…형도 내 마나로 가이딩을 느꼈을까?
그랬다면 좋을 텐데. 연우가 다른 가이드와 손을 잡는 모습을 보며 속이 뒤집히지 않아도 되니까. 아니, 근데 형은 이제 일반인이잖아.
절규하던 차헌은 벨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아닐 걸 알지만, 발신자를 확인하는 차헌의 심장이 바쁘게 뛰었다. 혹시, 형일까?
[윤석현.]
은 무슨.
“왜요.”
퉁명하게 물어보자, 조금 초조한 듯한 윤석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 이진희 에스퍼 집에 도착했거든요. 근데, 한 번 와보셔야겠는데요.
“왜요?”
-시체가 발견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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