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우규정은 어디 있나.”
다짜고짜 쳐들어온 협회장은 센터장실을 둘러보았다. 정신없어 보이는 모습에 차헌은 예의를 따지기보다는 한 발짝 물러나 관을 보여주었다.
“진짜… 우규정이 맞나?”
몇 년이나 그렇게 뒤를 쫓았다더니, 협회장은 시체를 보고도 우규정이 잡혔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얼굴이 좀 많이 변하긴 했는데 에스퍼 협회에 등록된 정보와 일치하는 걸 확인했습니다.”
설명에도 의심을 거두지 못했는지 협회장은 관 주변을 돌며 시체를 살폈다. 그러던 중 관 옆에 놓인 스케치북을 발견한 협회장은 홱, 소리가 나게 차헌과 윤석현을 노려보았다.
“내용물을 봤나?”
“당연하죠? 시체에서는 읽어낼 수 있는 기억이 몇 개 없었지만, 스케치북에서는 꽤 많은 기억을 발견했는데…. 뭐야, 표정이 왜 저래요?”
나름대로 속삭인다고 속삭인 것 같은데 앞에 선 사람은 에스퍼였다. 윤석현의 말을 들은 건지 협회장은 미간을 문질렀다. 표정은 풀어졌지만, 이쪽을 쳐다보는 시선은 여전히 탐탁잖았다.
“알고 있겠지만, 헛된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걸세.”
“누가 한다고 그래요.”
코웃음을 친 윤석현은 손을 뻗어 협회장의 팔뚝을 붙잡았다. 협회장의 비서들이 달려드는 모습에 차헌은 한숨을 쉬며 얼음벽을 세웠다.
이번에는 협회랑 좀 잘 지내려나 했더니.
“평화를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한연화 에스퍼의 책을 보관해두는 척하면서 길드장들이랑 몰래몰래 거래하는 걸 누가 모를까 봐요? 와, 헛된 생각? 이런 사람한테 지적을 받으니까 기분이 조-금 많이 그런데? 헛된 생각을 하는 게 지금 누구인데요.”
서슬 퍼런 시선에도 무표정을 유지하던 협회장은 윤석현이 스케치북으로 손을 뻗자마자 이능을 사용했다. 솟아오른 바람에 둥실 떠오른 윤석현을 의자에 앉힌 협회장은 스케치북을 갈무리했다.
“그래서, 무슨 기억을 봤지?”
차헌이 윤석현을 바라보았지만, 다리를 꼰 채 협회장을 보고 있는 시선을 보니 순순히 입을 열 생각은 없어 보였다. 한숨을 삼킨 차헌이 스케치북을 가리키며 설명했다.
“센터장,”
“정영환이라고 부르게. 자네가 임시직을 맡은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그자를 센터장이라 불러.”
“아무튼, 윤석현 에스퍼가 확인한 바로는 그 인간이 우규정이 가지고 있던 스케치북으로 미래를 바꾸려 했습니다. 그리고 우규정과 그 인간을 연결해준 게 비서, 이진희라는 게 밝혀졌습니다. 주로 센터에서 만났고,”
말이 끝나기도 전에 협회장의 발아래서 바람이 휘몰아쳤다.
“우규정은 한연우를 납치, 감금한 1급 범죄자인데! 자신의 이득을 위해 어떻게 범죄자의 출입을 사사로이 허용해! 그것도 센터장이라는 작자가!”
“자기도 그랬으면서.”
거세진 바람에 코웃음 소리가 묻혔다. 윤석현의 말 하나 틀린 게 없었다. 협회장도 자신의 이득을 위해 한연우를 납치한 사람들 중 하나였다. 협회장은 노기 어린 눈으로 윤석현을 노려보다 바람을 가라앉혔다.
“나는 그 사람들이 정해진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인도한 것뿐일세.”
“겸사겸사 돈도 받고?”
“윤석현 에스퍼.”
그만하라는 뜻을 담아 부르자 윤석현이 새초롬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런 윤석현을 외면한 협회장은 스케치북을 넘기다 말고 차헌을 돌아봤다. 경계 어린 눈을 본 차헌은 작게 헛웃음을 흘리며 한 발짝 물러났다.
이미 내 이야기가 쓰인 책을 봤는데, 어린애 낙서가 눈에 들어오겠냐.
협회장도 이미 알고 있겠지만, 미래를 알고 있어도 큰 의미는 없다. 오히려 허망했다. 내일을 기대하는 나날보다 두려워하는 날이 많아질 뿐. 무슨 짓을 해도 책 속 미래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만 깨달았다. 책을 읽은 자들이 으레 그렇듯 차헌도 미래를 바꿔보려고 노력했지만, 자신의 미래는 바뀌지 않았다.
오빠의 복수를 해달라며 한연화가 찾아오기 전까지는.
차헌은 아무런 흉터도 없는 손목을 매만지다 말고 눈썹을 구겼다. 아니, 근데 지금은 왜 이렇게 바뀐 거지?
자신의 일생이 그대로 정리된 책을 읽자마자 불쾌함과 신기함을 느꼈던 경험은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었다. 덕분에 책의 내용이 아직도 생생했다. 분명 책대로라면 지금의 차헌은 임시 센터장이 아니라 A 구역에서 눈치를 보고 있어야 하는데 나는 왜 여기 있는 거지?
…모르겠다.
차헌은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고민하기를 포기했다. 머리 싸매고 있는다고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센터장이 미래를 바꾸려고 했다니 대충 그 행동에 영향을 받았겠지.
“그래서, 여기서 뭘 알아냈다는 건가?”
설명하는데 말을 끊을 때는 언제고. 차헌은 조금 지친 얼굴로 윤석현을 바라봤지만, 윤석현은 뭘 보냐는 표정으로 대놓고 하품을 하고 있었다. 빈정이 상해도 제대로 상한 모양이었다.
“확신하기는 이르지만, 이 사건에 얼마 전 게이트에 휩쓸려 실종된 배재영 에스퍼가 관련된 것 같습니다.”
이진희의 집에서 이진희와 배재영, 우규정이 함께 활동한 증거들이 발견되었다. 아마 스케치북의 정보를 팔아 벌어들인 초기 자본으로 무리를 키운 것으로 추측되었다. 우규정이 한연화의 이능을 노리고 한연우를 납치한 건 너무 유명한 사건이었다. 그 외에 배재영과 이진희가 가족을 잃은 시기와 무리의 사람들이 가족이나 이능 등등을 잃어버린 시기가 일치하는 걸 봐서는 이들이 노리는 사람이 누군지 분명해 보였다.
차헌의 설명을 들은 협회장은 우규정을 노려보며 비서들에게 명했다.
“그 이진희라는 에스퍼, 누구인지 얼굴 좀 보지.”
* * *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돼!”
센터에서 협회로 이동하는 내내 협회장은 핸드폰만 붙잡고 있었다. 한연화에게 쉼 없이 전화를 걸던 협회장은 연우에게도 전화를 걸다 말고 분통을 터트렸다.
“왜 하필 이때 이능불안정자로 분류가 돼서는….”
혀를 찬 협회장은 한연화가 아니라 로터스 길드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연우가 없는 지금 그가 유일한 연결 통로였으나, 그 역시 전화를 받지 않고 있었다.
형이랑 같이 있나?
자신과 달리 연우와 삼촌이라는 끈으로 엮인 로터스 길드장이 부러워서 미칠 것 같았다. 로터스 길드장을 죽여버리고 그 자리를 대신하는 꿈까지 꿀 정도였다. 그래도 센터장이라 로터스 길드장이 삿된 마음을 먹지 않는지 감시한다는 핑계로 연우의 행동반경을 지켜볼 수 있어 다행이었다. 그거라도 못 했으면 진짜 쳐들어갔을 거다. 한숨을 쉰 차헌이 차에서 내렸을 때, 중년의 부부가 달려와 협회장에게 매달렸다.
이상원의 부모, 이상철과 구선아였다. 둘은 차헌이 수색권을 넘기게 설득해달라면서 협회장에게 애원했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일어나게. 안 그래도 지금 그 사건으로 심문을 하러 가는 길이라, 심문이 끝나면 이야기를 나누지.”
그 말에 이상철이 눈을 빛내며 뒤를 따랐다. 이상철의 손을 꼭 쥔 구선아와 함께 협회 건물로 들어가자 익숙한 인물이 넷을 반겼다.
“아니, 자네는 왜 전화를 안 받나!”
협회장의 호통에 로터스 길드장은 느릿한 동작으로 핸드폰을 확인했다.
“아.”
“아? 자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아는가!”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말씀드리러 왔습니다. 이상철 에스퍼가 한연화 에스퍼를 내놓으라며 쳐들어와서요. 불법 침입 및 협박으로 고소할 예정입니다.”
그 말에 협회장이 홱, 소리 나게 고개를 돌려 이상철을 노려봤다.
“아들놈이 실종된 지 한 달이 넘었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찾아갔던 거였어요.”
“그래서 센터에 불법 침입한 것도 봐줬지. 얼마나 더 봐줘야 만족할 건가, 이상철 에스퍼?”
싸한 침묵에 제 남편을 뒤로 잡아끈 구선아가 앞으로 나섰다. 구선아는 협회장도, 로터스 길드장도 아닌 차헌에게 다가왔다.
“강차헌 에스퍼, 아니, 센터장님. 에스퍼가 던전에 들어갔다가 돌아오지 못하는 게 흔한 일이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흔적이라도 찾고 싶은 게 부모의 마음 아니겠습니까? 센터장님. 입장을 조금만 바꿔서 생각해주세요. 당신이 아끼는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실종되었는데, 죽었다고 생각하고 살라면 그게 되겠습니까? 저나 남편이나 월권을 행사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습니다. 아들을 하루라도 빨리 찾고 싶을 뿐입니다.”
말을 끝낸 구선아는 제발 부탁한다며 머리를 조아렸다. 이상철 역시 마찬가지였다. 차헌은 불편한 표정으로 목덜미를 문질렀다.
이상철의 주장이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인원이 많을수록 수색에 도움이 되긴 할 테니까. 그런데 그 수가 너무 많단 말이지.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협회장이 손을 내둘렀다.
“그건 나중에 하도록 하고, 일단 그 비서가 먼절세.”
“그렇대요.”
협회장을 따라 도착한 곳에서 차헌은 손발과 눈, 입까지 결박된 센터장의 비서, 이진희를 쳐다보았다. 저 사람이랑 죽어도 접촉하기 싫다며 발발 떠는 윤석현에게 이진희가 입고 있던 옷과 아이템을 보여주자, 윤석현은 마지못한 표정으로 기억을 읽어 내렸다.
“우규정이랑 비슷해요. 거의, 아니, 아예 안 보여요.”
윤석현은 자존심이 상한 듯 미간을 찌푸리며 팔을 뻗어 철장 속 이진희를 건드렸다. 잠시 후, 윤석현이 진저리를 내며 물러났다.
“이전이랑 똑같아요. 아무것도 안 보여요.”
“몸에 남아있는 아이템은 없는가?”
온몸을 몇 번이나 수색했다는 대답에 윤석현의 입이 뾰로통해졌다. 차헌은 벽에 몸을 기댄 채 비서를 내려봤다. 언젠가 연우에게 느꼈던 이상한 기운을 비서에게서도 느낄 수 있었다. 저 인간도 소원을 빌거나 뭐 그런 건 아니겠지?
그때 똑똑,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흰색 가운을 늘어트린 백두 길드장이 삐딱하게 서 있었다. 백두 길드장은 새끼손가락보다 조금 작은 병을 들고 협회장과 차헌을 번갈아 봤다.
“미리 말해두는데, 이거 진짜 비싸요. 누구 앞에 달아놔요?”
그게 뭔지도 모른다. 차헌은 망설임 없이 협회장을 가리켰다. 고개를 끄덕인 백두 길드장이 병을 넘기자 협회장이 소중하게 받아들었다.
“저게 뭔데요?”
“‘숨길 수 없는 비밀’이요.”
자백제라고 덧붙인 백두 길드장은 늘어져라 하품을 하면서도 흥미를 감추지 못한 얼굴로 비서를 쳐다봤다. 직원들이 구속구의 틈을 벌리자, 협회장이 자백제를 조금 흘려 넣었다. 약효가 돌 때까지 기다리던 사람 중 제일 먼저 나선 건 윤석현이었다.
버둥거리는 비서를 붙잡은 윤석현은 식은땀을 흘리며 기억을 읽어 내렸다. 헛구역질한 윤석현이 거친 숨을 토해내며 비서의 손을 뿌리쳤다.
“반항이 너무 심해서 다는 못 봤어요. 확실한 건 배재영 에스퍼와도 연관이 있고, 또….”
말끝을 흐린 윤석현은 이상철을 힐끔 쳐다봤다.
“이상원 에스퍼랑도 접촉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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