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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의 주인공이 공이 된 이유-118화 (118/143)

118화

“아, 나는 왜애애.”

차헌은 가기 싫다고 버티는 윤석현을 잡아끌며 게이트로 향했다. 그곳에는 이상철과 청하 길드원들, 협회에서 나온 정신계 에스퍼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카메라 렌즈 같은 눈동자를 가진 정신계와 인사한 차헌이 윤석현을 소개해주었다. 정신계끼리 대화를 나누는 동안 차헌은 이상철과 눈인사를 나눴다.

이상철은 폭군처럼 제 한 몸만 챙겼던 이상원과 달리 팀원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빠트린 물건이 없는지 확인하고 있었다. 누군가 힘을 내라는 응원 소리에 이상철이 힘겨운 표정으로 미소를 그렸다.

“힘, 내야죠. 오늘 석현이도 찾고, 결백도 밝혀내야죠.”

설마 진짜 자기 아들이 아무 죄도 없다고 생각하는 건가? 저 모습이 쇼라면 대단하고, 아니라도 대단하다. 증거가 나온 상태에서 저렇게 부정하기도 힘들 텐데.

그날, 윤석현이 읽어 들인 기억들로 대강의 틀이 잡혔다. 윤석현이 제일 처음 봤던 기억은 배재영과 이진희가 다투던 모습이었다. 다른 기억은 배재영이 게이트에 끌려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기억이니, 둘 사이에 어떤 갈등이 있었다는 가설이 세워졌다.

실제로 무리의 반이 실종되었다고 하니, 내부에서 분란이 일어났을 수도 있었다. 죽일 수는 없으니 우규정의 스케치북으로 게이트가 언제 나타나는지 추측했고, 그곳으로 배재영을 유도한 게 아니냐는 말도 나왔다. 거기에 차헌과 연우가 휘말렸던 거겠지.

“잠시만, 그럼 우리 아들은?”

윤석현은 손부채질을 하다 말고 기억을 더듬었다.

“자주 접촉한 건 확실하고, 뭔갈 거래하기로 했다던데. 뭐인지 알고 있어요?”

그 말에 협회장이 얼굴을 굳히고 이상철을 쳐다보았다. 협회장뿐만 아니라 모여있는 사람 모두가 그랬다. 센터장의 비서인 이진희와 이상원이 거래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다. 센터장의 자리.

이상원이 대놓고 센터장의 자리를 욕심낸 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강차헌을 끌어와 대놓고 이상원과 대립하던 센터장의 이능이 갑자기 사라진 것도 수상쩍은데, 비서는 왜 그걸 비밀로 했을까?

이상철과 윤석현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자연스럽게 가설이 세워졌다. 센터장의 자리를 노린 이상원이 비서와 거래해 정영환의 이능을 잃게 만든 건 거의 확실했다. 그렇다면 이상원은 인과율의 부메랑을 맞아 죽은 게 아닐까, 하는 가설이.

그런 분위기를 눈치챈 이상철이 구선아를 보호하듯 끌어안았다.

“분명 우리 아들의 미래에는 이런 장면이 없었습니다. 멀쩡해야 할 애가 왜….”

멀쩡, 하다는 단어에 협회장이 불편한 듯 헛기침을 했다. 그와 동시에 싸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설마, 우리 아들이 이렇게 될… 운명이었습니까?”

입을 틀어막은 구선아가 쓰러질 듯 비틀거렸다. 그녀를 부축한 이상철은 그럴 리가 없다며 중얼거리다 차헌을, 로터스 길드장을 쳐다봤다.

“한연화 에스퍼는 어디 있습니까, 당장 우리 아들의 미래를 물어봐야겠습니다.”

“아시듯, 그분께서는 잠이 들면 무슨 일이 있어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제 출입은 물론, 무영 길드장의 출입도 막아놓으신 상태라 연락을 할 수 없습니다.”

“…한연우 에스퍼는?”

“그것 역시 아시듯, 그분을 모시는 건 접니다. 그분이 일반인으로 살아가실 수 있게끔 그 어떤 손길도 닿지 않게 지켜보라는 연화 님의 명이 있었습니다.”

차헌은 작게 입술을 오므렸다. 그 역할을 자신이 맡지 않았다는 게 짜증 났지만, 로터스 길드장이라면 안심이 되긴 했다. 그가 연화에게 얼마나 충실한 사람인지 알고 있으니까. 연화의 명이 있는 한 입이 찢어지면 찢어졌지, 끝까지 입을 다물 사람이었다.

서늘한 침묵에도 윤석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대충 흐름은 알겠으니까, 장부랑 비교를 좀 해봐야겠네요.”

“…더욱 확실하게 하려면 증거가 많은 게 좋겠지.”

차헌은 눈짓을 보내는 협회장에게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사람보고 증거라니. 어쨌든 이상원을 찾아오라 이거군. 차헌이 알겠다고 대답한 순간, 하얗게 질려있던 구선아가 발치에 매달렸다.

“제발. 우리 애 흔적만 어떻게, 살았는지 죽었는지만 좀….”

“나서지 않고 보조만 할 거니까, 나도 같이 데려가 줄 수 없을까?”

“이건 전적으로 센터장에게 맡기겠네. 혹시 모르니 기록용으로 에스퍼를 보내겠네. 같이 들어가도록 해.”

그렇게 해서 이런 괴상한 팀이 꾸려진 것이다. 이상철의 독촉에 마나 적응 훈련을 한다고 날밤을 새웠더니 어깨가 무거웠다. 눈 앞머리를 꾹꾹 누르던 차헌은 손등을 덮은 반장갑을 만지작거렸다. 일이 끝나고 나면 얼굴 한 번 보러 가야겠다. 결심한 차헌은 칭얼거리는 윤석현을 붙잡고 던전으로 향했다.

말랑한 점액질을 통과한 차헌은 던전의 광경을 둘러보다 숨이 멎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눈앞이 아득해지는 공포감에 눈을 질끈 감은 차헌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연우가 선물한 반장갑을 쥐고 숨을 고르던 차헌은 천천히 눈을 떴다.

동굴형 던전이지만 ‘그곳’과는 다른 곳이었다. 건조하기 짝이 없던 그곳과는 달리 숨이 턱, 막힐 정도로 습했고 여기저기 물웅덩이와 이끼가 끼어 있었다. 왜 도지원이 이상하다고 했는지 알겠다. 화 속성 마수가 나타날 환경이 아니었다.

차헌은 불쾌하게 널뛰는 심장 위에 손을 올려놓은 채 주변을 둘러보다, 우는 소리를 내는 윤석현에게 붙잡혔다.

“그, 포션. 마나 포션. 있으면 하나 줘요.”

보조 가방에서 포션을 찾아 건네주자 센스도 없다며 혀를 찬 윤석현이 마나 포션을 단숨에 들이켰다.

“어우, 멀미 나서 죽겠네. 증거 때문에 나를 데리고 온 건 알겠는데, 정신계한테 던전이 얼마나 힘든 곳인지 알아요? 그리고 나라고 무조건 다 읽을 수 있는 건 아니에요. 던전의 기억은 처음과 끝이 없어서 읽기 너-무 진짜 어-엄청 힘들단 말이에요. 던전뿐만이 아니라 누가 기억을 꼭꼭 숨기려 한다면 캐내기도 힘들어요.”

정신계한텐 가이딩도 제대로 안 해준다며 투덜거리던 윤석현은 마나 포션을 몇 개 더 받아 간 다음에야 조용해졌다.

수색대가 모두 도착하자, 이상철을 선두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뭔가 좀 이상하지 않아요?”

차헌의 뒤를 따라오던 윤석현은 도지원이 쓴 보고서를 꺼내 들었다. 도지원은 쉼 없이 마수가 나타났고, 코앞도 분간되지 않을 만큼 어둡다고 했었다.

“보고서랑 너무 다른데.”

윤석현의 말대로 던전은 환하지는 않지만, 시야가 확보될 정도의 밝기가 유지되고 있었고 허무할 정도로 마수가 없었다. 마치 죽은 던전 같았다.

“일단 보고서대로 길을 따라가 볼게요?”

토벌대가 해치운 마수의 흔적을 쫓아가던 윤석현은 엉망이 된 공터를 둘러보았다.

“아마 여기가 샐리맨더를 공략한 곳인가 보네요.”

샐리맨더가 여러 마리 나타났다더니, 동굴 벽이나 기둥들이 열로 인해 녹아내린 상태였다.

“여기서 이상원 에스퍼가 일행과 떨어졌다니, 각자 흩어져서 찾아보죠.”

열정적으로 흩어지는 청하 길드원과 달리 차헌은 계속해서 벽을 살폈다. 이건… 샐리맨더의 흔적도 이상원의 흔적도 아니었다. 샐리맨더는 화염방사기처럼 끝없는 불꽃을 쏘아내는 마수였고, 이상원은 화염계 에스퍼지만 불을 직접 다루는 것보다는 무기를 즐겨 쓰는 편이었다. 둘 다 이런 흔적이 남을 정도의 규모 있는 불꽃을 다루지 않았다.

터트리듯 폭발하는 불꽃을 다루는 마수는… 황금빛 눈동자를 떠올린 차헌이 눈을 질끈 감았을 때, 비명 같은 외침이 동굴에 울려 퍼졌다.

“저기!”

달려가자 이상철이 이상원의 시체를 끌어안고 오열하고 있었다. 차헌은 시체를 향해 손을 뻗는 윤석현을 끌고 다른 곳으로 향했다.

“우리 어디 가요?”

“천장 봐요. 길이 보일 테니까. 나갈 길도 찾아야죠.”

흥미가 동했는지 적극적으로 길을 찾겠다는 윤석현을 내버려 둔 차헌은 울음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이상원은 상종 못 할 자식이었지만, 그래도 아버지와 인사할 시간은 줘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금방 올바른 길을 찾아 안내하는 윤석현의 뒤를 따르던 차헌이 속삭이듯 물었다.

“이상원이 던전에 들어간 지 며칠째죠?”

“몇 주 됐죠?”

제가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이상원이 실종된 지는 거의 두 달째였고, 아무리 도망쳐 다녔다고 해도 죽은 지 한 달은 지났을 거다. 하지만 그렇다기에는 시체가 너무 멀쩡했다. 던전 안의 시간이 고정되어 있는 것도 아닌데.

마수에게 공격받은 상처는 있었지만, 가슴에 뚫린 구멍을 제외하면 마수에게 먹힌 흔적도 없었다. 마치 누가 곱게 보관해놨던 것 같은….

말도 안 되는 생각이다.

헛웃음을 흘린 차헌은 손목을 흔들어, 팔찌에 달린 대궁을 소환했다. 멀지 않은 곳에 박쥐가 매달려 있었다. 얼음 화살을 겨눈 차헌은 얼음벽을 얇게 펼쳐 초음파를 차단했다. 기척을 느낀 박쥐가 날아오르는 것과 동시에 차헌의 손에서 화살이 날아갔다.

박쥐의 눈을 맞춘 차헌은 게이트 석을 확보하기 위해 박쥐의 사체를 뒤적거리다 말고 고개를 쳐들었다. 방금, 뭐지? 정신없이 주변을 둘러보고 있자,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윤석현이 박쥐의 날개를 가리켰다.

“저거, 아이템 아니에요?”

날개를 들춰 아이템을 확인한 차헌의 얼굴이 천천히 굳었다. 실리? 작게 속삭이자 아이템이 미친 듯이 발광했다. 왜 이제 왔냐는 듯 섬광으로 차헌의 눈을 공격하던 실리는 길게 변형해 차헌의 손목에 휘감겼다. 쉼 없이 반짝거리던 실리는 갑자기 빛을 잃더니 칼로 변해 툭, 하고 무기참이 달린 팔찌를 끊어버렸다.

“와, 그 아이템 성깔 있네요.”

그러니까. 원래 이런 성격이었나? 차헌은 팔찌로 변형해 반장갑에 들러붙는 실리를 내려보다 게이트 석을 챙겨 들었다. 일단 일행과 합류해야 했다. 무슨 일이 있는 건지 저쪽에서 심상찮은 고함이 들려오고 있었다.

달려가자 협회의 정신계 에스퍼와 청하 길드원들이 대립하고 있었다.

“와, 치사한 새끼들. 정신계를 저렇게 압박하기 있어?”

뛰쳐나가려는 윤석현을 말린 차헌이 얼음 덩굴을 만들어 그들의 몸을 결박한 채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저기서, 스케치북을 발견했습니다.”

“아니야! 이건 모함이야!”

“스케치북은 어디에 있습니까?”

“제 가방 속에요. 뒷장에 이상원 에스퍼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이상철 에스퍼. 당신은 이능으로 주요 증거를 없애려 했으니 에스퍼 법 4장 증거 인멸, 획득한 저를 죽이려 하셨으니 에스퍼 법 8장 공무집행방해죄로 구속될 예정입니다.”

정신계는 무덤덤한 얼굴로 차헌을 돌아보았다. 빨리 나가자는 재촉에 게이트 석을 꺼내 드는 순간, 또다시 묘한 일렁거림이 느껴졌다.

차헌이 돌아보는 것과 동시에 드래곤이 꼬리로 입을 턱, 막았다.

[허우, 들킬 뻔했네.]

그러니까 너무 나가서 보지 말라고 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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