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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의 주인공이 공이 된 이유-119화 (119/143)

119화

[못 알아본다니까, 괜찮아.]

방금 들킬 뻔했다고 호들갑 떤 게 누구더라? 연우는 고개를 빼고 기웃거리는 드래곤을 잡아챘다.

“잠시.”

뭔가 찜찜하다며 이쪽을 가리키는 차헌의 말에 연우는 그것 보라며 드래곤을 짤짤 흔들었다. 차헌이 자신을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없었다. 집에 가서 두고 보자며 드래곤의 멱살을 쥔 순간, 솟아오르는 얼음 덩굴에 연우가 눈을 질끈 감았다. 서둘러 좌표를 그렸지만, 이동하기 전에 발각될 게 분명했다. 뭐라고 변명해야 할지 바쁘게 머리를 굴리던 때,

“하여튼 감도 좋다니까.”

끽, 하는 단말마와 함께 천장에 매달려 있던 박쥐가 툭, 떨어졌다. 저렇게 작은데 어떻게 알았냐며 박수를 쳐주던 윤석현이 이제 나가자며 차헌의 등을 떠밀었다. 차헌은 찜찜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면서도 순순히 몸을 돌리고 있었다.

[그것 봐. 안 들킨다니까?]

드래곤의 타박에도 연우는 말없이 게이트로 향하는 차헌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기분이 이상했다. 차헌의 뒷모습을 보는 게 굉장히 오랜만이라는 생각과 동시에 묘한 섭섭함이 밀려 올라왔다.

[왜 섭섭해애?]

히죽거리는 드래곤을 무시한 연우는 이상철이 오열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신기할 정도로 아무런 기분이 들지 않았다. 이상원을 죽였을 때는 뭔가 허무했고, 센터에서 쫓겨난 조희서가 수치스러운 얼굴로 무영 길드의 탐색대에 들어갔을 때는 후련함을 느꼈었다. 그런데 지금은 나른한 권태감이 어깨를 짓누르고 있을 뿐이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글쎄.”

공간을 이동해 집으로 향한 연우는 눈썹을 긁적였다.

이상철은 던전 브레이크에서 일반인을 구한 일로 국민 영웅이 된 이후로 명예에 집착해왔다. 때문에 제 아들이 범죄에 연루되었다는 걸 알자마자 그 자리에서 이상원과 손절할 줄 알았다.

예상과 다르게 마지막까지 이상원의 결백을 주장하는 모습을 보니 일이 길어질 것 같았다. 같은 에스퍼라서 그런가. 우리 부모님은 쉽게 연을 끊던데.

몸이 축축 늘어지는 기분에 기지개를 켠 연우는 문자가 도착했다고 알리는 핸드폰을 확인했다.

>형, 과제 다 했어요?

고윤이 보낸 메시지였다. 하염없이 우는 이모티콘과 함께 과제를 하자고 제안한 고윤은 하결에게도 함께 하자며 조르고 있었다. 이미 끝냈다고 답장하던 연우는 단톡방 아래, ‘삼촌’이 보낸 메시지를 눈으로 훑었다.

>오늘 회사에 일이 생겨서 데리러 못 갈 것 같다. 아무리 과제 때문이라지만 게임도 적당히 하고.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라.

누가 보면 진짜 보호자인 줄 알겠어. 헛웃음을 흘린 연우는 리모컨을 물고 소파로 올라가는 드래곤을 쳐다봤다. 적당히 보라고 한소리를 할까 말까.

과제를 할 때마다 옆에서 이건 뭐야 저건 뭐야 귀찮게 굴길래 TV를 보여줬더니, 드래곤은 밥 먹고 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온종일 TV 앞에 앉아 있었다.

어떻게 할지 고민하는 연우에게 꼬리를 흔든 드래곤은 주린 배를 문질렀다.

[나 배고파.]

“아까 그렇게 먹어댔으면서…?”

이상원의 시체를 가져다 놓으려 던전에 도착하자마자 폴짝 뛰어내린 드래곤은 사냥을 시작했다. 동굴 속 모든 마수를 죄 먹어 치웠음에도 배가 고프다고 호소하는 드래곤을 보고 있으니 어이가 없었다.

연우는 질린 표정을 지으면서도 주머니에서 보따리를 꺼내 드래곤에게 내밀었다. 드래곤은 뭐부터 먹을까, 이상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보따리 안을 살피다 불현듯 거울 앞으로 기어갔다. 힘을 조금 되찾은 덕분인지 예전처럼 눈물을 퐁퐁 쏟아내지는 않았지만, 시무룩한 기색으로 제 몸을 살폈다. 뿔이 있었던 자리를 한참 동안 노려보던 드래곤이 힘없이 기어와 마석을 삼키는 모습에 연우는 말없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따로 챙겨두길 잘했지.

보조 가방을 꽉 채우고도 넘친 부산물은 둘 곳도, 팔 곳도 없었다. 그렇다고 버리기는 아까워 꾸역꾸역 챙겨왔던 부산물을 드래곤 레어 내 연우의 집에 보관해 두었었다. 드래곤의 충성스러운 부하들 덕분에 부산물도, 레어도 안전했다. 자신을 못 알아보고 경계하는 종복 때문에 드래곤이 속상해하긴 했지만, 연우는 무사한 부산물을 모조리 싸 들고나와 무영 길드장에게 마석으로 바꿔 달라고 요청했었다.

그렇게 얻은 마석이 아니었다면 드래곤은 아직도 음울한 눈으로 거울을 보고 있었겠지.

[정확해.]

어느새 거울 앞으로 이동한 드래곤이 삑삑거리며 연우를 불렀다. 한숨을 쉬며 일어난 연우는 거울 아래 한일자로 길게 누워있는 드래곤을 내려봤다. 조금이라도 더 길어 보이려 애를 쓴 탓에 온몸이 파들거리고 있었다.

[나, 좀, 자란 것, 같지, 않아?]

조금도. 오전에 쟀을 때랑 달라진 게 조금도 없었다. 하루에 열 번씩 키를 재는 데 그 잠깐 새 자랐겠냐고.

[조용히 하고 재기나 해!]

혀를 차면서도 착실하게 키를 재준 연우가 드래곤을 달랑 들어 올려 목에 감았다.

“그렇게 신경 쓰면 자랄 것도 안 자란다니까.”

손목도 못 감는다며 통곡하던 드래곤은 어느새 목에 느슨하게 감길 만큼 자라있었다. 처음에는 무슨 초커도 아니고 목을 꽉 조르는 드래곤을 가리고 다니느라 힘들었지만, 지금은 길게 늘어져 옷을 입기도 편했다. 팔찌가 제일 편하긴 했지만, 팔찌가 드래곤이었다는 게 들통난 지금 같은 모습으로 다닐 수는 없었다. 투명화를 걸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목을 돌아다니는 드래곤을 보던 연우는 고개를 돌려 귀를 살폈다.

[왜? 아파?]

“아니, 그건 아니고. 이거 무슨 아이템인지 알아?”

[…어? 궁금해?]

당연하지. 자고 일어났더니 귀에 구멍이 뻥뻥 나 있고, 손목이고 발목이고 아이템이 주렁주렁 달려있는데 뭔지 안 궁금할 리가 있나. 생활계였다면 진작 알아봤을 텐데 아쉽게도 연우는 보조계였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물어보고 싶었지만, 울적한 표정을 짓고 돌아다니는 드래곤한테 이게 뭐냐고 물어보기도 좀 그랬다.

[으음. 위에서부터 차례대로 해주, 해독, 방어. 이건 누가 너를 공격하면 공격자에게 데미지를 반사하는 아이템인 것 같고, 제일 아래는 마나 구속구.]

어깨를 타고 내려온 드래곤은 손목을 휘감았다. 색색 끈이 꼬인 실 팔찌를 쳐다보던 드래곤은 꼬리로 하나씩 가리켰다.

[검은색, 흰색, 파란색까지 전부 방어 아이템이고. 노란색은 워프 아이템으로 보이는 데 도착지가 어딘지는 몰라. 빨간색은 피어싱이랑 똑같이 반사가 걸려있어.]

발찌에 대한 설명까지 들은 연우는 묘한 얼굴로 피어싱을 만지작거렸다.

[왜?]

“아니, 구속구를 찼는데 왜 이능을 쓸 수 있나 싶어서. 예전에 배재영이 만든 구속구를 찼을 때는 아무것도 못 했잖아. 그래서 좀 각오하고 있었는데, 멀쩡한 게 신기해서.”

차헌이가 실수했나? 제일 아래 달린 피어싱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을 때, 드래곤이 황급히 눈을 피했다.

“헬리?”

뭐지? 뭐 때문이지? 구속구? 배재영? 차헌이?

“뭔데, 왜 눈치를 보는데? 너 이번에도 차헌이 소원 들어준 거야? 그래서 그래?”

[아니거든? 이번엔 네 부탁이 있어서 순순히 잡혀준 거지만, 나를, 드래곤을 잡는다는 게 쉬운 건 줄 알아? 소원이라는 게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이룰 수 있는 게 아니야. 안 그래도 연화는,]

투덜거리던 드래곤은 잠시 연우의 눈치를 봤다가 태연하게 말을 이으려 했지만,

“연화가 뭐.”

그 짧은 침묵을 놓칠 연우가 아니었다.

[아니, 연화는 어리잖아. 부담이 없는 건 아니거든.]

드래곤은 최대한 순진한 표정으로 연우와 눈을 맞췄다. 연우에겐 미안하지만, 아무리 계약자라도 말해 줄 수 있는 게 있고, 없는 게 있었다. 연화 역시 인과율을 비튼 사람이라, 어딘가 비틀려있었다. 그 부분을 바로 잡기 위해 드래곤은 연화에게도 자신의 심장 조각을 나누어주었다. 티도 안 날 정도로 작은 조각이었고, 이걸로 자신이 해를 입는다고 해도 그 역시 오랜 삶의 유희가 되어줄 테니 나쁜 거래는 아니었다.

하지만 연화는 보통 애가 아니었다. 제가 심장 조각을 떼어줬다는 사실을 눈치채자마자 권능까지 뜯어갔다. 드래곤이 즐겨 사용하던 능력 능력인 세뇌를 가져간 연화는 자신의 권능으로 연우의 기억은 물론 차헌의 기억까지 멋대로 주물러댔다.

그것도 모자라 다시 한번 인과율을 비틀었지. 아무리 세계의 사랑을 받는 연화라도 이번에는 인과율의 부메랑을 피해갈 수 없을 것이다.

* * *

>도착했다. 기다리고 있을 테니 천천히 내려와라.

진짜 올 줄 몰랐는데. 연우는 소파에 반쯤 누워있던 자세 그대로 손만 뻗어 드래곤을 붙잡았다. 목에 감긴 드래곤이 보이지 않게 옷깃을 정리한 연우가 문자를 읽다 말고 헛웃음을 흘렸다. 진짜 부모님의 생사도 모르는데 가짜 부모님의 기일을 챙기게 될 줄이야.

“오셨어요.”

로터스 길드장에게 인사한 연우가 안전벨트를 매자, 차가 부드럽게 출발했다. 물어보는 대로 근황을 답하는 동안 길을 안내해주던 음성이 목적지에 도착했음을 알렸다.

유골함을 확인한 연우가 쓴웃음을 흘렸다. 부모님의 이름이 아니었다. 이런 것까지 꾸며낼 줄이야. 정성도 이런 정성이 없었다. 덕분에 부모님이 살아계신다는 건 알게 됐다. 돌아가셨다면 유골함을 꾸며낼 이유가 없었을 테니.

“밥은 뭐 먹을래? 먹고 싶은 거 있어?”

“삼촌은요?

“네가 먹고 싶은 걸 먹어야 네가 한입이라도 더 먹지.”

로터스 길드장은 운전하다 말고 연우가 얼마나 적게 먹는지에 대해 심각하게 토로했다. 그가 지적하지 않아도 연우 자신도 자신의 식사량에 대해 의문을 느끼고 있었다. 원래도 식사량이 적은 편이긴 했지만, 요즘은 삼시 세끼 합쳐 밥 한 공기는 무슨, 반 공기도 못 먹고 있었다.

속이 안 좋은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안 들어가지….

배를 문지르던 연우가 돌연 위를 쳐다보았다.

[연우야.]

무언가…가 머리 위를 맴돌고 있었다. 마수가 나타난 건가? 그렇다고 하기에는 로터스 길드장이 너무 평온한 얼굴로 운전을 하고 있었다. 마수가 아니면 뭐지? 목을 감싸 쥔 연우는 천천히,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바깥을 쳐다보았다.

저게… 뭐야?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존재가 하늘을 기어 다니고 있었다. 연우는 차를 앞서 기어가는 존재를 바라보다 로터스 길드장을 붙잡았다.

“삼촌, 저 잠시, 멀미가 나서요. 잠깐 쉬었다,”

“연우야!”

로터스 길드장이 연우를 붙잡는 것과 동시에, 차가 끼-익 하는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멀지 않은 곳에서 균열이 갈라진 게 보였다.

게이트? 여기에 게이트가 왜 나타나? 이곳은 연화의 예지에서 단 한 번도 게이트가 발견되지 않은, 안전 구역이었다.

굳은 얼굴로 게이트를 보던 로터스 길드장이 연우의 안전벨트를 풀었다. 차에 이상이 생긴 것 같다며 밀어내는 손에 연우가 차 문을 여는 것과 동시에, 일렁거리던 게이트가 폭발하듯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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