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연우야, 괜찮아?]
진동이 멈추자 연우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농도 짙은 던전 마나 때문인지 약한 현기증이 나긴 했지만,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 시트에 몸을 기댄 연우는 어질어질한 시야를 정리했다. 점점 선명해지는 시야로 쩌저적, 갈라지는 틈이 보였다. 힘을 잔뜩 주고 꾸득꾸득 그린 것 같은 틈이 점점 벌어지며 균열이 생겼다.
게이트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던전이 커지며, 터져 나오는 현상. 던전 브레이크였다.
멍하니 감상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곧바로 도망가려 했던 연우는 옆자리의 로터스 길드장을 바라봤다. 그는 굳은 얼굴로 허공에서 쏟아지는 모래를 바라보고 있었다.
“삼촌? 괜찮아요?”
“너는?”
“저는 괜찮은 것 같은데… 저게 뭐예요?”
잠시 기다려라. 짧게 대답한 로터스 길드장은 문을 박차고 나가 반쯤 닫힌 조수석 문을 열어젖혔다. 연우는 그의 손에서 달랑거리는 문짝을 쳐다보며 입술을 말아 물었다. 이걸 못 본 척해야 해, 놀라는 척해야 해?
“밖으로.”
고민하는 사이 연우를 끌어낸 로터스 길드장은 차를 들어 올려 균열을 틀어막았다. 어느새 차도의 절반이 모래로 덮여 있었다. 차로 막지 못한 균열에서 흘러나오는 모래를 보던 로터스 길드장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연우 역시 시선을 옮기다 입술을 깨물었다.
안전 구역에서 게이트가 발견되는 것도 놀라운 일인데, 갑자기 던전 브레이크가 터졌다고? 쉼 없이 굴러가며 영역을 넓히는 모래를 보던 연우는 돌연 바뀐 시야에 눈을 깜박였다. 로터스 길드장이 무슨 포탄을 들쳐 메는 것처럼 연우를 들어 올리고 있었다.
“삼촌?”
"눈 감고, 이 꽉 깨물어라. 팔로 무릎 끌어안고."
설마 이대로 던지는 건 아니겠지. 생각하면서도 연우는 착실하게 무릎을 끌어안았다. 설마가 사람을 잡는다고. 웅크리자마자 로터스 길드장은 팔을 크게 휘둘렀다. 허공을 가르는 느낌에 연우가 헛웃음을 흘렸다. 자신은 지금 일반인이나 마찬가지니, 던전 브레이크가 본격적으로 활성화되기 전에 구역에서 내보내려는 시도는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방식으로 내보낸다고?
어디로 떨어지든 제대로 다칠 것 같아 온몸이 긴장으로 떨렸다. 모래가 닿지 않은 곳에 도달하자 이를 악문 연우는 낙법을 쓰려 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 전에 보이지 않는 막이 연우의 몸을 부드럽게 튕겨냈다.
그대로 바닥을 구른 연우가 어깨를 문질렀다. 거대한 젤리에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벌써 구역이 나뉠 줄이야. 혀를 찬 연우는 균열을 뒤로 하고 달려오는 로터스 길드장을 힐끔거렸다. 어떻게 하지. 기억이 있다는 걸 밝히고 같이 도망갈까? 아니다. 저 인간이라면 바로 연화한테 달려가 일러바칠 사람이다.
고민하는 사이 눈앞의 막이 길게 찢겨나갔다. 그대로 얼어붙은 막을 붙잡고 들어오는 인영에 연우의 눈이 동그래졌다.
[뭐야, 얘가 여기 왜 있어?]
그러니까.
하늘색 눈동자와 눈을 맞추고 있자 어디선가 달콤한 향이 풍겼다. 기괴한 풍경에 놀란 일반인을 달래기 위한 수면 향이었다. 그 향을 맡고 있자 한껏 솟아 있던 어깨에 힘이 빠지는 게 느껴졌다. 자신은 에스퍼라서 수면향이 통할 리 없는데도, 오랜만에 느껴보는 차헌의 온기에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지고 있었다.
“조금 자요.”
* * *
“잠드셨습니까?”
차헌은 향을 갈무리하며 연우를 끌어안았다. 이제야 숨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가슴팍에 귀를 묻고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을 느끼고 있는데 연우의 몸이 작게 흔들렸다. 차헌의 품에서 연우를 뽑아내려는 로터스 길드장의 손짓 때문이었다.
“뭡니까?”
“아시겠지만, 제가 한연우 에스퍼의 담당자라서요. 이제부터 제가 보호하겠습니다.”
“냅다 집어던질 때는 언제고.”
“상황이 급했으니까요. 한시라도 빨리 위험 구역에서 내보내기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그 전에 구역이 나누어질 줄 몰랐지만. 입술을 말아 문 로터스 길드장이 모래로 덮인 주변을 둘러보았다.
게이트가 터지고 위험구역이 만들어지기까지 보통 일주일이 걸렸다. 그동안 주변을 단속하고 큐브를 들여놓은 다음 본격적인 정화작업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왜 이번 던전은 벌써 구역이 나뉜 걸까.
찜찜한 얼굴로 연우를 내려보던 로터스 길드장은 연우를 옭아매고 놓아주지 않는 차헌을 노려보았다.
“그동안 한연우 에스퍼 주변을 얼쩡거리는 건 알고 있었지만, 여기까지는 어쩐 일이십니까. 센터에 계셔야 할 분이.”
“신고받고 온 건데요.”
차헌은 로터스 길드장을 마주 노려보다 워프 아이템을 꺼내 들었다. 안전 구역은 협회와 센터가 보호하고 있는 곳이다. 게이트가 터졌다는 보고를 받던 때 연우의 인형이 바닥을 데굴 굴렀고, 그 모습을 보자마자 워프 아이템을 이용해 연우에게 이동한 것이다.
할 말 있냐며 눈썹을 까딱거린 차헌은 제 훈련복을 벗어 연우에게 입혀주었다. 왜 이렇게 살이 내렸지. 가까이에서 보니 확연히 티가 났다. 유일하게 살집이 있던 볼살은 온 데 간 데 보이지 않았고, 날렵한 턱 선만이 차헌을 반겨주고 있었다.
그를 안고 일어나자 솜털처럼 가뿐하게 들렸다. 앞으로 어떻게 뭘 먹여야 할지 고민하던 차헌은 고집스레 연우의 손목을 놓지 않는 로터스 길드장을 노려보았다. 책임지고 보호하겠다고 했으면 잘 챙기던가. 일반인이나 마찬가지인 사람을 그렇게 던져? 두 사람이 서로를 노려보고 있을 때 텅, 하는 소리와 함께 균열을 막고 있던 차가 굴러떨어졌다.
쏴-악, 하는 소리와 함께 모래가 거세게 떨어지며 모래 폭포 속에서 마수들이 몸을 드러냈다.
“박성광 에스퍼. 저기 전갈 나오는데요.”
“지금은 한성광입니다. 그리고 전갈이면 강차헌 에스퍼의 이능이 더 걸맞겠군요. 그동안 한연우 에스퍼는 제가 보호하고 있겠습니다.”
“그쪽이 어떻게 보호하겠다는 건데요? 지금 형 데리고 싸우겠다는 거예요? 그러다 형 다치면 어떻게 할 건데요?”
쏟아지는 질문에 로터스 길드장의 손에 힘이 빠졌다. 강화계인 자신보다 광범위한 이능을 다루는 차헌이 연우를 지키는 데 적합하긴 했다. 이유는 모르지만, 차헌이 연우에게 심히 집착 중이니, 다치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계산을 마친 로터스 길드장은 차헌에게 가볍게 묵례했다.
“부탁드립니다.”
“그쪽이 부탁 안 해도 알아서 잘 보호할 건데요.”
뚱하게 대답한 차헌은 발아래 두꺼운 얼음을 깔았다. 찌직, 하는 비명과 함께 모래에서 튀어나온 사막 두더지가 얼음을 피해 도망갔다. 그런 두더지와 반대로 샌비아 전갈은 꼬리를 높게 치켜들고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기세와 함께 몰아치는 모래바람에 무릎을 꿇은 로터스 길드장이 연꽃 모양 목걸이를 쥐고 기도를 올렸다.
저러니까 한연화가 싫어하는구나.
차헌이 질린 표정을 짓거나 말거나, 기도를 마친 로터스 길드장은 목걸이를 쥔 손을 그대로 휘둘렀다. 주먹이 닿기도 전, 파열음과 함께 전갈의 몸이 터져나갔다. 로터스 길드장은 쉼 없이 연화에게 올리는 기도문을 중얼거리며 전갈에게 주먹을 내리꽂았고, 그 뒤로 선인장들이 몸을 세웠다. 차헌은 핑, 핑, 소리를 내며 날아오는 가시에 얼음벽을 두껍게 세웠다.
어딜 감히.
차헌의 발아래에서 피어난 얼음 동굴이 빠르게 기어가 선인장의 몸통을 옥죄었다. 그대로 터지는 선인장을 피해 찍찍거리며 도망가는 사막 두더지가 보였다. 어느새 동료를 불러 모았는지 제법 수가 많았다.
저걸 어떻게 할까, 하는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실리가 총이 되어 차헌의 손에 감겨왔다. 왼팔은 연우를 끌어안은 터라 한 손으로도 충분히 쓸 수 있는 총으로 변한 거였다. 차헌은 실리에게 기특하다는 눈빛을 한 번 보내고 거침없이 두더지를 겨냥했다.
쉼 없이 다가오는 마수를 하나하나 처리하던 차헌이 묘한 표정으로 연우를 내려보았다. 던전 내의 마수는 등급이 천차만별일 뿐만 아니라 던전 마나를 등에 업고 설치는 탓에 상당히 위험했다. 그와 달리 위험구역의 마수들은 대체로 등급이 낮고 온순한 편이라, 낮은 등급의 에스퍼들을 위험구역에 배치하는 것이고.
그러니 S급인 자신을 보자마자 도망가야 할 텐데, 마수들은 눈치를 보면서도 덤벼들고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차헌은 도발하듯 사막 두더지를 건드렸다. 얼음 덩굴에 얻어맞은 두더지는 쭈뼛 물러섰다가도 캬악! 하며 달려들었다. 시선은 제가 아닌 연우에게 향한 채였다.
두더지를 날려버린 차헌은 곧바로 연우의 손목을 확인했다. 손목에 걸려있는 건 실 팔찌가 유일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차헌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눈으로나마 연우의 몸을 살폈다. 마수들이 자신보다 상대적으로 약한 연우를 노리는 걸 수도 있지만, 그때처럼 연우가 아닌, 그의 몸에 기생하는 다른 걸 노리는 거라면?
옷을 벗겨 확인할 수도 없고. 혀를 찬 차헌은 실리를 부메랑처럼 날려 살랑거리는 선인장을 맞췄다. 일단은 연우를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켜야 했다. 마수의 수가 줄어들수록 위험구역의 크기도 줄어들고 있었지만, 두 사람이 감당하기에는 터무니없는 크기였다.
연우를 안으며 일어난 차헌은 위험구역을 나누고 있는 말랑한 벽을 발로 퍽퍽 걷어찼다. 뚫고 나가려면 나갈 수는 있었지만, 그 압박감을 연우가 견딜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시간을 확인한 차헌은 연우가 좀 더 편하게 기댈 수 있도록 고쳐 안았다. 보고를 받은 직원들이 곧 도착할 테니 도박을 할 필요는 없었다.
차헌이 애틋한 시선으로 연우를 바라보는 동안, 홀로 마수를 처리하던 로터스 길드장은 잠잠해진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정도면 당분간은 괜찮겠군요.”
숨을 몰아쉬던 로터스 길드장은 얼음 소파에 앉아 연우를 옭아매고 있는 차헌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제 연우 님을 제게,”
“그 꼴로 형을 부축하겠다고요?”
차헌의 지적에 길드장은 아래를 내려보았다. 검은색 정장이 각종 마수의 진액으로 질척해져 있었다.
“비켜요.”
자신의 몰골에 할 말이 없어진 로터스 길드장이 뒤로 물러서자, 벽이 길게 갈라지며 문이 생겼다. 들어오는 에스퍼를 확인한 차헌은 훈련복을 끌어 올려 연우의 머리카락까지 꼭꼭 숨겼다. 그 순간 벽이 갈라지며 센터의 에스퍼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이게 무슨….”
“바깥은, 수습했어요?”
어이없는 얼굴로 위험구역을 둘러보던 에스퍼가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홍영진 에스퍼가 임시 도로를 만들었고, 정화를 맡은 에스퍼들이 큐브를 들고 오는 중입니다. 외진 도로라 다른 피해자가 없긴 한데….”
말끝을 흐린 에스퍼는 진액에 젖어있는 로터스 길드장과 차헌이 싸매고 있는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그분은 누구…?”
“휘말린 일반인입니다.”
“아, 그럼 저희가 조사하고 피해 보상을,”
“아니, 내가.”
다가오는 에스퍼를 피해 한 발짝 물러난 차헌은 연우를 힘주어 끌어안았다. 연우 역시 꾸물꾸물 안겨 오는 모습에 환한 미소를 짓던 차헌이 로터스 길드장을 응시했다.
“제가 보호하고 감시할 테니, 무슨 일인지 제대로 조사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