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이건 뭐야.”
[차헌아!]
현관문을 열자마자 튀어 오르는 물체에 흠칫 놀란 차헌은, 낚아챈 무언가가 제 이름을 힘차게 외치자 인상을 찌푸렸다. 그것의 실체를 확인하는 것과 동시에 손끝에서 얼음이 피어올랐다 사그라들었다.
이건 나중에. 연우의 인형이 갑자기 쓰러진 이유부터 알아야 했다. 드래곤을 내팽개친 차헌은 활짝 열린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그대로 굳었다.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눈앞이 흐려졌다.
“…왜.”
왜 형이 저런 모습으로. 차헌이 휘청거리자 발목을 타고 오른 드래곤이 손가락을 깨물었다.
[정신 차려. 연우는 멀쩡해.]
멀쩡하다고. 뒷말을 따라 하던 차헌이 드래곤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이대로 죽여버리고 싶었지만, 자신이 죽으면 연우도 죽는다던 말이 떠올라 함부로 힘을 줄 수가 없었다.
[멀쩡하다니까.]
잘게 떨리는 드래곤의 음성에 차헌은 멍하니 연우를 내려보았다. 얼굴은 파르라니 질려있었고, 웅크린 몸 옆에는 피 웅덩이가 고여 있었다. 저런데 멀쩡하다고. 보고 있기가 힘들어 눈을 질끈 감는 차헌의 손가락을 재차 깨문 드래곤이 폴짝 뛰어내려 연우의 앞으로 기어갔다.
저것이 무슨 삿된 짓을 할지 몰라 급히 뛰어가 드래곤을 낚아챘다. 그대로 던져버린 차헌이 떨리는 손을 연우의 코에 가져다 댔다. 연우의 죽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될까 봐, 계속해서 추락하는 손끝으로 약한 숨이 느껴졌다.
“형.”
그제야 차헌은 팔을 뻗어 연우를 붙잡았다. 힘없이 제 품에 끌려오는 몸이 서늘했다. 또다시 덜컥, 내려앉는 심장에 그대로 굳었던 차헌은 정신을 차리고 연우의 손을 붙잡았다. 착각이 아니었다. 철이 자석에 끌려가듯, 제 마나가 연우에게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맞닿은 손으로 마나를 넘겨주고 있을 때, 이내 쿨럭, 하고 밭은기침이 터져 나왔다.
연우의 등을 도닥여주며 부지런히 마나를 넘겨주자 혈색이 돌아오는 게 보였다. 차헌은 터져 나오는 한숨을 숨기지 않으며 연우를 끌어안았다.
[연우는 어때? 좀 괜찮은 것 같아?]
걱정을 담아 연우의 얼굴을 문지르는 차헌의 손 옆에 쑥, 하고 드래곤의 머리가 올라왔다. 몸을 기울여 연우의 상태를 확인하던 드래곤이 차헌에게 포션을 내밀었다.
[혹시 모르니까 이건 나중에 한 번 더 먹이자.]
홀린 듯 고개를 끄덕인 차헌이 주머니에 포션을 넣다 말고 인상을 찌푸렸다. 잠시, 이건 어디서 난거지? 색을 보니 흔히 구할 수 있는 포션도 아니고 최상급 포션이었다. 그때 분명 모든 물품을 압수한 걸로 아는데.
[연우 좀 씻겨야겠다.]
멍하니 연우를 내려보던 차헌이 연우의 몸을 받쳐 안으며 일어났다. 졸졸 따라오던 드래곤은 차헌이 욕조에 걸터앉자 꼬리를 세워 샤워기의 물 온도를 조절했다. 그동안 차헌은 제 무릎 위에 앉은 연우를 내려보았다. 코에서 흘러나온 피가 턱과 가슴팍, 허벅지까지 흠뻑 적신 상태였다. 제 손까지 적신 피를 내려보던 차헌은 연우의 손을 붙잡았다.
“죄송해요.”
멀쩡하게 살아가던 사람이었다. 데리고 오는 게 아니었다. 아무리 보고 싶어도 참는 거였다. 제 욕심을 채우기 위해 연우를 다치게 했다는 생각에 자꾸만 눈앞이 흐려졌다. 죄책감이 계속해서 심장을 옥죄었다. 차헌의 턱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이 연우의 손등에 떨어졌을 때, 뾰족한 목소리가 들렸다.
[뭐 하는 거야. 연우 계속 그렇게 둘 거야?]
염력으로 샤워기를 들어 올린 드래곤이 저리 비키라며 차헌의 손을 밀어냈다. 드래곤의 서툰 솜씨에 핏자국이 조금씩 씻겨 나갔다. 겨우 정신을 차린 차헌이 조심스럽게 연우의 볼을 문질렀다.
얼굴에 묻은 피를 다 씻어낸 차헌은 연우의 입을 벌려 흘러 들어간 피도 닦아냈다. 말캉한 혀를 문질러도 어떤 욕구도 들지 않았다. 이 사람이 이번엔 무슨 짓을 했을까, 하는 걱정만 들었다.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 손끝에 닿는 온기, 작게 오르내리는 호흡. 모든 걸 확인해도 불안했다. 힘을 주고 입술을 문지르자 연우가 끙, 소리를 내며 안겨 왔다. 작은 몸짓에 모든 불안이 씻겨 내려갔다.
희미하게 웃던 차헌은 연우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마나를 흘려보냈다. 맞닿은 모든 부위로 마나를 넘겨주며 등을 쓸어내리자 이내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들렸다.
차오르는 안정감을 느끼고 있던 차헌은 샤워기를 끄는 드래곤을 응시했다.
“그…쪽은,”
[연우보고는 그쪽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하면서 너는 왜 그쪽이라고 불러? 헬리라고 불러.]
새침한 목소리에 헛웃음이 터졌다. 서로 통성명할 사이가 아니지 않나?
“아무튼, 왜 여기에 있는 겁니까? 한연화가 보관하기로 했는데.”
[몰라도 돼.]
뾰로통한 목소리에 차헌은 잠시 고민하다 다가오는 드래곤의 꼬리를 낚아챘다. 잠시 허공에서 시계추처럼 흔들리던 드래곤이 빽, 소리를 질렀다.
[뭐, 뭐, 뭐 하는 거야!]
“그때 그 조건은 유효합니까? 그쪽이 잘못되면….”
[연우도 잘못되냐고? 당연하지! 연우랑 나는 한 몸이거든?]
삑삑거리는 목소리에 차헌의 미간이 좁아졌다. 이내 온 얼굴로 인상을 쓴 차헌이 기분 나쁘다는 티를 풀풀 풍기는데도 거꾸로 매달린 드래곤은 코웃음을 칠뿐이었다.
[내 몸에 손끝 하나라도 대기만 해. 연우한테 다 이를 거야.]
머리가 나쁜가? 이미 대고 있는데.
그것보다 아주 당연히 연우가 자신의 편을 들어줄 거라는 태도가 불쾌했다. 차헌은 거칠게 손가락을 움직였고, 움직임에 따라 드래곤의 몸이 짤짤 흔들렸다.
[야!]
기운을 모아 터트렸음에도 차헌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드래곤을 갖고 놀았다. 버둥거리던 드래곤은 약이 올라 차헌의 손가락을 물어뜯었다.
“형도 이렇게 깨물었습니까?”
[미쳤어? 연우는 이런 짓 안 하거든?]
“이런 짓?”
[안 놔? 안 놔!?]
수치심에 꼬리 끝이 파르르, 떨렸다. 헬리오도르로 산 지 약 1년, 나이를 정확히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까마득하게 오래 살아왔지만 이런 대접을 받기는 처음이었다. 울적해 보이길래 위로도 해줄 겸, 기분 전환도 해줄 겸 장난을 친 건데 반응이 이따위일 줄 몰랐다.
자연스럽게 통성명도 하고 연우와 제가 어떤 사이인 줄 알려주려 했던 드래곤이 캬약, 거리며 이를 딱딱 부딪쳤다. 어찌나 날랜지 손가락을 깨무는 것도 힘들었다.
“형한테 뭐라고 이를 겁니까?”
[왜애? 내가 이르든 말든 네가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너는 모르는 사람이라 연우가 신경도 안 쓸 텐데?]
흥흥거리는 목소리에 차헌은 더욱 힘차게 드래곤을 흔들었다. 허를 찔렀다는 기분에 드래곤은 흔들리면서도 깔깔 웃었다. 아, 재밌어. 연우한테 앞으로 계속 모르는 척하라고 해야지. 다짐한 순간 차헌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때를 놓치지 않은 드래곤은 날렵하게 날아 바닥에 착지했다.
“모르는 사람….”
인제 그만 놀려야겠다. 저러다 울겠네. 울적해진 차헌을 내버려 둔 드래곤이 수건을 찾았다. 연우 저대로 두면 감기 걸릴 텐데, 수건이 어딨지.
“나는 모르는 사람이지만, 그쪽은 아니다.”
[응? 무슨 소리야?]
“방금 그랬잖습니까. 형한테 이르겠다고. 모르는 사이인데 어떻게 이를 겁니까?”
염력으로 수건을 꺼내던 드래곤은 꼬리로 입을 턱, 막았다. 허공에 둥둥 떠 있던 수건 역시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그 모습에 차헌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 드래곤 새끼는 기억하는 데 나는 잊었다? 말이 안 되지 않나? 형이랑 내가 어떤 사이였는데, 나는 잊고 쟤를 기억해.
[그, 연우한테는 비밀로 해줄래?]
조금 비굴하게 들리는 음성에 차헌은 연우를 내려보았다. 모든 걸 잊고 드래곤만 기억하는 건지, 아니면 기억이 있는 건지 확실하지 않았다. 드래곤을 쳐다보자 벌써 꼬리를 물고 고개를 잘잘 흔들고 있었다. 아무것도 말하지 않겠다는 태도에 차헌은 태도를 달리했다. 형처럼, 조곤조곤하게.
“비밀로 해줄 테니, 뭐 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내가 말해줄 수 있는 거면. 근데 연우를 이제 좀 따뜻한 곳에 눕혀야 하지 않을까?]
타당한 지적에도 차헌은 말없이 연우를 끌어안았다. 이대로 있고 싶었다. 연우가 자신에게만 의지하고 기댄 채 누워있는 모습에 뿌듯한 만족감이 차오르던 참이었다.
그러나 영원히 여기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연우를 단단하게 받쳐 안은 차헌은 방으로 가다 몸을 돌려 냉장고로 향했다. 물과 간단한 간식거리를 챙기던 차헌의 손에서 드래곤이 불쑥 튀어나왔다. 냉장고로 기어들어 간 드래곤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블루베리 잼을 끌어안았다.
[이거 연우가 좋아해.]
연우가 잠시 머물던 시절, 다른 건 몰라도 블루베리 잼은 항상 바닥을 보였던 것이 떠올랐다. 잼과 비스킷을 챙겨 방으로 향하자 드래곤이 문 앞에서 기웃거렸다.
[연우 방은 여기인데?]
“…피 때문에.”
짧은 대답에 드래곤은 말없이 차헌의 뒤를 따랐다. 침대로 올라간 차헌은 연우가 제 품에 기댈 수 있도록 자세를 잡았다. 피로 물든 옷을 갈아입혀 주고 싶었지만, 아직 옷을 벗겨도 될 정도의 사이는 아니었다. 아쉬운 대로 이불을 끌어 올려 덮어준 차헌이 연우의 몸 위에 똬리를 트는 드래곤에게 손짓했다.
“내가 과거에 시간을 돌렸다는 건 알겠고, 한연화가 형의 이능을 빼앗으려다 실패했다는 것까지도 알겠습니다. 그런데 형과 내 마나는 무슨 상관입니까?”
드래곤은 풀이 죽은 얼굴로 차헌을 올려봤다.
예전, 드래곤이 연우에게 심장 조각을 나눠주었을 때 차헌의 마나가 연화의 마나를 제대로 흡수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 상태로 연우의 심장에 들러붙은 드래곤 하트는 자체적인 마나 코어를 만들었고, 그 마나 코어가 만들어내는 마나가 차헌이 느끼는 가이딩의 정체였다. 원재료가 차헌의 마나이니 차헌이 기운을 익숙하게 느끼는 건 당연했다.
[네게 가이딩을 해주면서 마나 코어가 점점 커졌는데, 아무래도 본질은 내 심장 조각이니까 마나 코어가 커질수록 마수의 기운도 커졌을 거야. 그걸 연우의 마나 코어가 억누르고 있었는데 구속구로 제어하다 보니까, 아무래도 마수화…가 진행되는 것 같았거든. 그래서 잠시 구속구를 빼고 있으라고 했는데….]
침울하게 중얼거리던 드래곤은 차헌을 쳐다보다 인상을 찌푸렸다.
[너 무슨 말인지 이해 못 했지?]
대충은 이해했다. 중요한 건 형에게 자신이 필요하다는 거였다.
“잠시, 그래서 형이 마수가 된다는 겁니까?”
[언젠가는. 근데 그 전에 연우의 수명이 끝날 거야.]
“뭐?”
손을 뻗은 차헌이 드래곤의 멱살을 쥐었다. 그 와중에도 연우가 일어날까 봐 모든 행동이 조심스러웠다.
[아니, 당장 죽는다는 게 아니고!]
캭캭 거리면서 차헌의 손등에 이빨을 박은 드래곤이 뒤로 물러났다.
[제대로 융화하려면 이백 년은 걸리는데, 인간인 연우가 그때까지 살아있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