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삐-삐-.
귓가에 울리는 소리에 정신을 차린 연우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거슬리는 소리가 사라지고 몸을 감싸는 온기에 다시 수마가 몰려들었다. 작게 하품하자 포근한 손이 어깨를 다독였다.
“조금 더 자요.”
그럴까. 안심하고 눈을 감기 직전, 기묘한 풍경이 보였다. 눈을 반짝 뜬 연우는 드래곤과 등 뒤의 차헌을 번갈아 보았다.
“왜요?”
태연한 대답에 연우의 연두색 눈동자가 빠르게 방황했다. 차헌이 볼을 문지르는 손길과, 손목에 감긴 드래곤의 비늘 감촉이 지나치게 생생했다.
꿈…은 아닌 것 같은데, 뭐지?
차헌은 빠르게 팔랑거리는 연우의 속눈썹을 내려보다 팔을 뻗어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깨달은 건데, 연우가 당황했을 때는 시간을 주면 안 된다. 지금처럼 열심히 눈을 굴려 가며 자기 혼자 생각을 끝내고 도망가 버릴지도 모른다.
“진정하고 조금 더 자요. 속은 괜찮아요?”
연우는 제 배를 문지르는 차헌의 손을 보다 눈을 깜박였다. 속은 괜찮은데 정신이 혼미했다.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지? 피어싱을 빼는 순간 잠시 눈앞이 캄캄해졌던 것 같은데, 정신을 차려보니 차헌의 품에 안겨 있는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목은, 안 말라요?”
정신이 없었다. 차헌이 내미는 컵을 받아든 연우는 손목에 감긴 드래곤을 쳐다보았다. 대체 무슨 상황이냐고 물어도 드래곤은 울망거리는 눈으로 올려보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저기….”
“상황 판단은 나중에 하고 마나 점검부터 해봐요. 마나 코어가 꼬인 것 같던데.”
마나 코어가? 깜짝 놀라 마나를 점검해보던 연우가 휙, 소리가 나게 차헌을 돌아보았다. 눈에 띄게 당황한 연우와 달리 차헌은 평온한 표정으로 맞닿은 손으로 마나를 흘려 넣었다. 포근하게 온몸을 감싸는 마나에 연우의 어깨에서 긴장이 풀리며, 곧 나른한 숨이 흘러나왔다. 아니, 잠시, 이게 아니라. 정신을 차린 연우는 차헌의 손을 밀어내며 드래곤을 등 뒤로 감췄다.
“다 알고 있으니까 좀 진정해요. 형 심장 지금 터질 것 같아요.”
“…뭘 알고 있다는 건데?”
“형이 자는 동안 쟤가 다 말해줬어요.”
[야! 내가 언제!]
어깨에서 튀어나온 드래곤이 언제 다 말해줬냐며 왁왁거렸다. 차헌의 어깨 위로 올라가서 캭캭거리는 드래곤을 쳐다보던 연우는 머리를 짚었다. 제발 누가 자신에게 설명 좀 해줬으면 했다.
어지러운 게 티가 났는지 차헌이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연우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대로 자신에게 기대게 만든 차헌이 만족스러운 한숨을 흘렸다. 연우 역시 온기를 느끼고 있다 손목에 감기는 드래곤을 내려보았다.
“…그래서 다 말해줬다고?”
[다는 아니야.]
차헌을 쏘아본 드래곤은 쓰다듬어 달라는 듯 손바닥에 머리를 문질렀다. 기계적으로 머리를 문질러주던 연우는 몸을 세워 차헌과 드래곤을 번갈아 보았다.
“내가 지금 정신이 없어서 그런데, 상황 설명 좀 해줄래?”
“설명이 뭐가 필요해요. 형도 나한테 안 해줬잖아요. 어떻게 나를 그렇게 모르는 사람이라고 차갑게 쳐다볼 수가 있어요?”
서운하다고 안겨 오는 차헌의 팔을 도닥거려주던 연우가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왜 얘를 달래고 있지?
“그게 싫었으면 왜 내 기억을 지운 거야?”
“내가 지운 거 아니거든요. 왜 나를 혼내요. 내가 한 게 아니라 형 동생이 한 거예요. 혼낼 거면 걔를 혼내요. 저는 동의한 적도 없어요.”
“연화가? 왜?”
살짝 찔러보자, 하나부터 열까지 다 말해줄 기세로 입을 열던 차헌은 울적한 얼굴로 연우의 어깨에 이마를 비볐다.
“그냥… 형이 형을 조금만 더 소중하게 생각하면 되는 일이에요.”
작게 중얼거리는 말에 연우가 입술을 말아 물었다. 짧은 설명으로도 미래의 자신이 연화를 구하기 위해 몸을 내던졌다는 걸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그러지 못하도록 아예 기억을 지워버린 거겠지.
“이능은? 이능은 괜찮아?”
“정말 문제없는 게 맞아?”
이전에는 내 이능을 앗아갔을 것이고. 아무리 미래를 알고 있다고 해도 이능력자가 아니면 던전에 들어갈 수 없을 테니까.
한숨을 쉰 연우는 차헌의 가슴에 뒤통수를 기댔다. 연화가 왜 그랬는지 이해가 갔다. 드래곤 하트에 그런 능력이 있는 줄 알았다면, 차헌을 살리고 죽는 게 아니라 어떻게든 드래곤의 배를 갈랐을 거다.
[지금은 안 그럴 거지?]
드래곤이 손가락에 머리를 비비며 아양을 떨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네 말대로 구속구를 뺀 건 기억이 나는데….”
차헌의 손을 밀어낸 연우는 심장 위를 더듬었다. 마나 코어가 꼬이는 듯한 기분을 받긴 했지만, 아주 찰나였다. 지금은 멀쩡하기만 한 마나 코어를 점검하는 데 차헌이 물 잔을 채워주었다.
“일단 물 좀 마셔요.”
연우는 물을 마시다 입 안에 퍼지는 비릿한 맛에 인상을 썼다. 뭐야? 피? 컵을 밀어내려는 데 조금 더. 하며 뒤에서 뻗어 나온 손이 연우의 손을 붙잡은 채 컵을 기울였다. 결국 물 한 잔을 비워내고 나서야 손이 떨어져 나갔다. 단맛이 맴도는 게 그냥 물이 아니라 마나 포션을 섞은 물인 듯했다.
“옷부터 갈아입을래요?”
차헌이 먹여주는 사탕을 받아먹던 연우는 옷을 살펴보다 말고 기함했다.
“아니, 진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아무도 말 안 해줄 거야?”
피로 물든 옷을 확인하고 나서야 잘게 떨리는 차헌의 손과, 울망울망한 드래곤의 눈이 보였다. 연우는 손끝에 힘을 주고 드래곤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뒤, 셔츠의 단추를 만지작거리다 차헌을 돌아봤다.
허리에 감겨있는 차헌의 팔 때문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나 옷 좀 갈아입자.”
“잠시만요.”
자신의 방이었는지 옷장을 연 차헌이 티셔츠를 건넸다. 예전 신세를 질 때 자주 입었던 옷이었다. 단추를 풀어 내리던 연우는 침대 옆에 버티고 있는 차헌을 힐끔거렸다.
“왜요?”
“보고 있을 거야?”
“네.”
[와우.]
차헌은 입을 딱 벌린 드래곤에게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연우에게 손짓했다. 얼른 갈아입으라는 재촉에도 연우의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셔츠야 그냥 갈아입겠는데 바지…도 갈아입어야 할 것 같은데. 잠시 비켜달라는 부탁에도 차헌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형. 내가 잠깐 일 보고 오는 사이 형이…. 아무튼 무슨 일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제가 형한테서 시선을 뗄 것 같아요? 생각해봐요, 형이 잠시 한눈판 사이에 한연화가 크게 다쳤어요. 형은 어떻게 할 것 같아요?”
눈도 깜박이지 않고 살펴보겠지. 잠시 고민해보던 연우는 이불 속으로 들어가 셔츠를 벗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차헌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형을 소중하게 생각하라는 말을 한 지 몇 분이나 지났다고 한연화 걱정부터 해. 자신이 다쳤다고 가정했으면 연우가 순순히 제 말을 따랐을까? 나가라고 당장 밀어냈겠지.
쓰게 웃던 차헌은 연우가 벗은 셔츠를 쳐다보다 거칠게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대체 뭘 하면 피를 저만큼….
[야.]
갑자기 시야에 가득 찬 드래곤에 차헌이 미간을 찌푸렸다.
“비켜요, 형 안 보이니까.”
[연우 바지 갈아입는 중이야. 내가 보고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저기 비스킷에 잼 좀 발라 봐.]
당당한 요구에 헛웃음이 나왔다. 잼 하나를 바르는 것도 이렇게 발라라 저렇게 발라라 훈수를 두는 모습이 어이가 없었다. 제일 어이없는 건 자연스럽게 수발을 들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었다. 베어 먹을 수 있도록 들고 있으라는 말에 염력은 국 끓여 먹었냐는 핀잔이 절로 나왔다.
그러면서도 차헌은 잼이 흐르지 않도록 섬세하게 비스킷을 기울여주었다. 얌전히 받아먹고 있는 드래곤을 흘기던 차헌은 재차 한숨을 쉬었다. 형도 이렇게 하나부터 열까지 자신에게 지시를 내린다면 얼마나 좋을까. 진짜 처음부터 끝까지 다 해줄 수 있는데. 그냥 얌전히 누워있기만 하면….
침대에 누워있는 연우를 상상해보던 차헌이 급히 시선을 돌렸다. 달아오른 귀를 보던 드래곤은 비스킷을 베어 먹다 말고 흐흥, 작게 웃었다.
[내가 조금만 더 자라면 알아서 자리를 피해줄 테니까 지금은 자중해 둬.]
하고 있다. 하지 않았다면 제 품에 안겼던 연우를 가만뒀을 리가 없지. 손을 쥐었다 펴보던 차헌은 조금 더 달라며 재촉하는 드래곤에게서 비스킷을 빼앗으며 질문을 건넸다.
“그쪽은 언제까지 부활하는 겁니까?”
[헬리라고 부르라니까. 부활이라기보다는 재생에 가깝지. 뭐, 명이 다하면 죽지 않을까.]
“그럼 형은…?”
[아까 말했잖아. 제대로 융화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나도 연우가 나랑 오래오래 같이 살았으면 좋겠지만, 너무 지루한 일이니 권하고 싶진 않아. 나중에 생각해보면 연우가 그립고, 같이 살자고 우길 걸 그랬다며 후회하겠지만 나에게 이 순간은 찰나일 뿐이야. 언젠간 다른 인연이 오겠지.]
“누가 당신 얘기 물었습니까. 당신이 명을 다하면 형은 어떻게 되는 건지 물은 겁니다.”
[와…. 와, 너 나한테 조금도 관심이 없구나?]
당연한 말을 하냐며 드래곤을 쳐다보던 차헌은 연우가 옷을 다 갈아입자 얼른 옆에 섰다. 아까 보니까 죽이 그대로 남아있던데 배는 고프지 않냐, 필요한 건 없냐, 수발을 자처하는 차헌을 진정시킨 연우가 드래곤에게 손을 뻗었다.
“나 잠시 헬리랑 얘기 좀 해도 될까?”
“해요. 왜요? 내가 들으면 안 되는 이야기예요?”
[너 나가. 연우가 나랑 단둘이 얘기하고 싶다잖아.]
“어차피 얘가 다 말해줬다니까요? 우리 사이에 비밀이 왜 필요해요.”
“나중에 정리… 해서 말해주면 안 될까? 근데, 너 센터에 복귀 안 해도 돼?”
“그냥 지금 말해줘요.”
삑삑거리는 호출기를 던져버린 차헌은 연우의 손을 붙잡았다. 절대 떨어지지 않겠다는 의지를 단호히 표명하자 연우가 입술을 말아 물었다. 드래곤과 얘기를 나누겠다는 건 핑계였다. 이능을 사용하지 않았는데도 발아래에서 좌표가 제멋대로 그려지고 있었다. 마나 코어에 문제가 없는 게 확실한데. 왜 이러는 거지? 도착지가 어딘지도 모르는 상황에 차헌을 데리고 갈 순 없었다.
[차헌이가 애도 아니고 알아서 하겠지.]
그래도. 잠시 고민하는 동안 드래곤은 좌표가 점점 커지고 있다며 연우를 재촉했다. 차헌 역시 바닥에 그려지는 좌표를 눈채챘다.
“어디로 가려고요?”
“모르겠어. 지금 내가 이능이 좀 불안정해서….”
“그런데 혼자 가겠다고요? 같이 가요.”
“그, 놀라지 마.”
결국 연우는 차헌의 손을 마주 잡고 경고한 뒤, 그대로 공간을 접었다. 순간 아래가 쑥 꺼지는 기분에 차헌이 연우를 부둥켜안았다. 손을 뻗어 차헌의 등을 두드려주던 연우가 조심스럽게 품에서 빠져나가자, 차헌이 눈을 번쩍 떴다.
“여기가 어디예요?”
“던전인 것 같은데.”
연우와 드래곤이 종종 산책을 즐기는 호수형 던전이었다. 차헌이 익숙해지길 기다려주던 연우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분명 누가 부른 것 같았는데. 감각을 넓혀 주변을 살펴보던 연우의 손을 붙잡은 차헌이 대뜸 새끼손가락을 걸어왔다.
“이거 지금 온전히 형 이능으로 여기까지 이동한 거죠?”
“음.”
“눈 굴리지 말고.”
잠시 망설이던 연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반짝거리는 호수를 쳐다보던 차헌이 헛웃음을 흘렸다. 이런 능력을 숨기고 있었냐며 입술을 파르르 떨던 차헌은 반쯤 누워 생떼 부릴 기세로 새끼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우리 사이에 다시는 비밀 같은 거 없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