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그래서, 어떻게 할까? 자리 비켜줘?]
차헌의 재촉에 새끼손가락을 걸고 그의 손바닥에 사인하던 연우는 폴짝 뛰어내리는 드래곤을 붙잡았다.
“혹시 여기에 우리 말고 다른 사람이 있어?”
[우리 말고? 없는데?]
부자연스럽게 시선을 피한 드래곤은 와아, 수영해야겠다아, 어색하게 중얼거리며 호수로 향했다.
“위험한데 어딜 가게.”
제 옆에 있으라며 드래곤을 챙기는 연우의 모습에 차헌이 한숨을 쉬었다. 한연화만으로도 차고 넘치는 데 챙길 존재가 하나 더 늘었을 줄이야. 저렇게 정이 많아서 어떡하지. 발끝을 탁탁 내려치던 차헌은 손을 흔들어 호수에 수영장을 만들었다.
“제가 지켜보고 있을게요.”
[저 안에서만 놀 테니까, 둘이서 얘기 좀 해.]
마지못해 보내주자 연우의 손에서 미끄러지듯 떨어진 드래곤은 호수에 들어가는 것과 동시에 몸집을 키웠다. 자맥질하는 드래곤을 모습을 지켜보던 연우가 혀끝을 깨물었다. 부지런히 마석을 먹이고 있는데도 예전처럼 쑥쑥 크질 않았다. 뿔도 아직 자라지 않은 상태였고. 마나 포션이라도 먹이면 괜찮을까 해서 구해놨지만, 입맛이 어찌나 까다로운지 드래곤은 마석만 고집했다.
한숨을 쉬는 연우의 손을 차헌이 붙잡았다.
“저번에 형이 훈련장에 보석뱀이 나온다고 했었잖아요. 그게 쟤예요?”
“아, 응.”
고개를 끄덕인 연우는 조금 얼떨떨한 얼굴로 차헌을 올려보았다. 왜 이렇게 적응이 빠르지? 평온한 차헌을 보고 있으니 던전이 아니라 동네 뒷산에 산책을 나온 것만 같았다.
“형이 사실대로 알려주니까 좋다.”
씩 웃으며 연우의 양심을 자극한 차헌은 산책길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쭈뼛거리는 연우를 제 옆으로 이끈 차헌은 열심히 물장구치는 드래곤을 가리켰다.
“그전까지는 쟤 정체를 몰랐어요? 언제 알게 됐는데요?”
“너랑 가상 던전 훈련했을 때.”
“어쩐지 그 전부터 팔찌가 수상했다니까요!”
형이 아무것도 아니래서 아무것도 아닌 줄 알았다며 펄펄 날뛰는 차헌의 모습에 연우가 작게 미소를 지었다. 어쩐지 어깨가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다. 애써 숨기고 회피할 필요가 없어서 그런가.
“가상 던전하니까 생각난 건데, 에스퍼 인권 위원회에 신고한 거 형이에요?”
“응. 그거 어떻게 됐어?”
“아직 몰라요. 대충 해결됐으니까 이제 그날은 잊으면 안 돼요?”
길을 따라 걷던 차헌이 대뜸 안겨 왔다. 팔을 벌려 차헌을 받아준 연우는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잘못했다며 사과를 건넸다.
이상원을 끌어내리기 위해 차헌을 이용했으니 마땅히 사과해야 했다. 차헌의 손을 잡은 연우는 조금 힘겹게 입을 열었다.
사실대로 말하는 게 이렇게 힘들 줄은 몰랐다. 에스퍼로 각성하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자신의 속내를 감추고, 감정을 속이며 살아왔다. 연우의 주변에는 조금이라도 솔직해지는 순간 그 틈을 파고들어 이용하려는 사람들뿐이었으니까.
“됐어요. 형한테 사과받자고 꺼낸 말 아니거든요. 그냥 그날은 통째로 잊어버려요.”
연우의 입을 틀어막은 차헌은 손을 내려 연우의 손을 붙잡았다.
“그래서 조희서는 어떻게 된 건데요? 퇴사하겠다길래 그러라고 했더니 갑자기 그, 이름 뭐였죠? 형 팀에서 공격계. 그 사람 만나게 해달라고 이틀 동안 센터장실 앞에서 울다 결국 쫓겨났잖아요.”
“무영 길드장이 얘기 안 해줬어? 무영 길드에 들어갔잖아.”
“그걸 그냥 보내줬어요? 아니죠?”
“아니 뭐, 별건 아니고. 나도 내 나름 뭘 하긴 했는데… 이것도 말해야 해?”
“네.”
차헌은 처음부터 끝까지 세세하게 말해보라고 했지만, 사사로운 마음으로 복수했다는 게 조금 부끄러워 연우는 적당히 압축시켜 얘기했다. 입사 테스트를 받는 조희서를 지켜보고 왔다고.
“그게 끝이에요?”
“말했잖아. 별거 아니라고.”
“와, 형 이런 능력도 있으면서. 나 같으면 조희서 붙잡고 던전으로 이동해서 살려달라고 빌 때까지 버티고 있었다.”
그런 생각도 해보긴 했었다. 하지만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아무리 밉다 싫다 해도 동생이다. 개인적인 복수를 하겠다고 무영 길드와 척질 위험을 감수하는 것보다 길드장을 돕는 척 빚을 지워두는 게 두고두고 이득이었다. 잠깐의 공포로 정신을 차릴 조희서도 아니었고.
“형,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배재영이 무슨 짓 했는지… 아는구나.”
“왜 그때, 게이트에 휘말렸을 때. 네가 먼저 나갔잖아. 남아서 대화하다가 알게 됐어.”
“그걸 지금까지 나한테 비밀로 했고? 와…. 형이 생각해도 좀 너무했다, 그쵸?”
입술을 말아 문 연우는 차헌의 눈치를 살폈다. 그날 이후 차헌이 자다 말고 벌떡 일어나 자신을 걱정하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차헌에게 사실 드래곤과 계약했고, 이래저래서 던전에 보내버렸다고 말할 수가 없었었다.
분명 제게도 사정이 있는데, 속상해하는 표정을 보니 입안이 바싹 마르는 기분이었다.
“미안….”
한숨 대신 볼 바람을 분 차헌이 제 볼을 톡톡 건드렸다. 지금 뽀뽀해달라는 건가? 눈을 굴리던 연우는 미동도 없는 차헌의 볼을 보다가 천천히 발끝을 들어 올렸다. 허리를 숙여주는 차헌의 볼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추고 떨어지려는데, 연우의 허리를 붙잡은 차헌이 연우의 볼을 깨물고 떨어졌다.
얼얼한 볼을 문지르고 있는 동안 차헌은 뚱한 표정으로 연우의 허리를 간지럽혔다. 꽃봉오리처럼 모은 손이 허리와 옆구리를 스칠 때마다 연우는 간지러워 어쩔 줄 몰라 하다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민들레꽃이 터져나가는 듯한 웃음소리에 차헌이 만족한 듯 씩 웃었다.
“됐어요. 말했잖아요. 형한테 사과받자고 하는 말 아니라고. 이제부터 그런 일 있으면 짧게 언질이라도 해줘요, 걱정되잖아요.”
“응, 응.”
간지럼의 여파로 아직 웃고 있는 연우를 내려보던 차헌은 홀린 듯 그의 볼을 붙잡았다. 볼에, 이마에, 코에, 입술이 닿는 대로 쪽,쪽,쪽, 입을 맞추던 차헌은 연우의 입술이 닿기 직전, 허락을 구했다.
“뽀뽀해도 돼요?”
“방금까지 한 건 뭔데?”
“형이 너무 이뻐서 까먹었어요. 해도 돼요?”
…지금 하고 있는 건 뽀뽀가 아닌가? 얼마나 바짝 다가왔는지 차헌이 말할 때마다 입술산끼리 부딪힐 정도였다. 잠시 차헌을 바라보던 연우는 입술을 모아 꾹, 눌렀다. 연우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빠르게 쪽, 쪽, 입술을 부딪친 차헌은 입을 벌려 입술을 깨물었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조금 놀랐다. 움찔 솟아오른 연우의 어깨와 등을 달래듯 쓸어주던 차헌은 혀를 내어 깨문 부분을 삭삭 핥아주었다.
그대로 힘을 주고 파고드는 혀에 입술을 모은 연우는 살며시 혀끝을 빨아 당겼다. 입술 사이로 혀가 미끄러질 때마다 등을 끌어안은 힘이 강해졌다. 숨이 모자라 도망가듯 뒷걸음질 치자, 따라붙은 차헌은 연우의 혀를 깨물고 놓아주지 않았다. 혀끝이 잘게 씹힐 때마다 온몸의 세포가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잠시, 잠시만.”
“나무.”
발뒤꿈치에 뭔가 부딪히자마자 놀란 연우가 차헌을 밀어냈다. 안심시켜준 차헌은 아름드리나무와 자신 사이에 연우를 가두며 입술을 벌렸다.
차헌이 미는 힘에 등을 기대자 도망갈 곳도 없어졌다. 고개를 비트는 잠깐의 순간마다 숨을 몰아쉬던 연우는 참지 못하고 차헌의 가슴과 어깨를 밀어냈다.
“왜요? 나 손 안 댔는데.”
“아니, 아니. 나 숨 좀….”
나무를 짚고 있던 차헌은 그대로 주저앉는 연우를 따라 쪼그려 앉았다. 나무줄기에 걸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해주던 차헌은 연우의 허리를 안고 그대로 몸을 돌렸다. 별안간 차헌의 허벅지에 올라타게 된 연우는 숨을 헐떡이다 시선을 피했다. 민망해서 아래를 내려다볼 수가 없었다.
엉덩이를 물리는 연우를 끌어안은 차헌은 뽑뽑, 소리를 내며 입술을 부딪쳤다.
“뽀뽀만 할게요.”
의심쩍은 눈으로 차헌을 훑어본 연우가 살며시 입을 맞춘 순간이었다. 차헌이 손을 뻗어 연우의 눈 아래를 쓸어내렸다.
“형 눈….”
“눈? 왜?”
빛이 없는 나무 아래 그늘이었는데도 연우의 눈은 황금색으로 빛났다 연두색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던전 마나 때문인가?
“형, 저기로 이동할 수 있겠어요?”
차헌이 가리키는 바위를 보던 연우는 꾸물꾸물 일어나 발바닥을 붙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눈동자 색이 되돌아가자, 차헌은 자신의 마나를 흘려 넣어 보았다. 이제 알겠다. 드래곤의 심장이 만들어낸 마나 코어를 억누르기 위해서는 연우가 이능을 사용하거나, 차헌의 마나가 필요했다.
“깨달았다는 표정인데, 나한테도 설명해줄래?”
차헌은 팔을 뻗어 연우를 다시 제 허벅지 위에 올려놓았다.
“그냥 형한테 제가 필요하다는 얘기에요.”
“자세하게.”
차헌이 시도 때도 없이 입을 맞추며 설명하는 바람에 중간중간 흐름이 끊겼지만,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대충 제 심장에는 드래곤의 심장 조각이 섞여 있고, 그걸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차헌의 마나가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마음껏 가져다 써요.”
입을 맞출 때마다 넘어오는 마나를 얌전히 받아먹던 연우는 멀지 않은 곳에서 수영하는 드래곤을 바라보았다. 자세한 얘기는 드래곤에게 들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형은 앞으로 어떻게 할 거예요? 계속 일반인으로 살 거예요?”
대학 생활이 재밌긴 했지만, 영원히 일반인으로 살 생각은 없었다. 이능 불안정자로 분류되었어도 희망하는 자는 재심사를 볼 수 있다.
“안 그래도 조금 잠잠해지면 재심사 보려고 했어. 너는?”
“형이 센터로 복귀할 거면 센터에 남아있고, 아니면 길드 차리려고요. 협회 이 새끼들이 사람을 무보수로 부려 먹으려고 하길래 뜯어낸 게 있어서 자금도 넉넉하고요. 형하고 싶은 대로 해요.”
“나?”
“네. 뭘 하든 좋으니까 옆에 있게만 해줘요.”
안겨 오는 몸에 연우는 팔을 뻗다 말고 급히 시선을 피했다. 기분이 너무… 너무 이상했다. 작은 차헌이가 심장으로 쳐들어가 저를 보라며 문을 쾅쾅쾅 두드리는 기분이었다.
“…형?”
등을 도닥이는 손이 없자, 거절당할까 봐 겁을 먹었던 차헌은 달아오른 연우의 볼을 보자마자 달려들었다. 입술에 볼에, 머리카락 한 올 한 올 마다 입을 맞출 기세로 달려들던 차헌은 말려 올라간 옷을 내려주려다 그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흐, 아, 잠시만.”
“지금도 간지럽기만 해요?”
손을 모아 간지럽히는 게 아닌, 엄지의 지문이 느껴질 정도로 느리게 훑어내리는 행동에 짧은 숨이 터져 나왔다. 돋아 오른 소름에 바르작거리던 연우는 골반으로 내려오는 손에 차헌의 손목을 잡고 도리질을 쳤다.
“너, 흐, 너….”
“나 미성년자인 거 안 까먹었으니까 잔소리는 그만해요.”
뚱한 표정을 지은 차헌은 연우의 어깨에 머리를 비볐다. 한참 동안 심호흡하고 있던 차헌은 고개를 번쩍 들며 연우와 눈을 맞췄다.
“이번 주 금요일 오후에 뭐 해요?”
“…왜?”
“센터장, 아니, 정영환이랑 이상원 재판 있는 날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