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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의 주인공이 공이 된 이유-126화 (126/143)

126화

“뭐야, 어디 가요?”

“집에요.”

차헌은 주머니 속 인형을 만지작거리며 카메라를 턱짓했다. 재판 과정을 꼭 현장에서 볼 필요가 있나. 앉아있는 이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차라리 서류를 한 장 더 보고 말지.

“지금 나를 두고 가겠다고? 증언하는 내 멋진 모습도 안 보고 그냥 가겠다고?”

헛소리. 코웃음 치는 차헌을 붙잡은 윤석현은 어딘가 조마조마해 보였다.

“바로 센터로 가요?”

“아뇨.”

“내일은? 센터로 갈 거죠? 아니,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게요.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센터장 재판 결과 나오면 임시직도 끝나잖아요.”

윤석현은 대답을 재촉했지만, 차헌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이전의 기억 덕분에 일을 수월하게 처리하고 있었지만, 그와 별개로 센터장의 일은 재밌었다. 예전처럼 인원도, 돈도, 아이템도 부족해서 골머리를 앓는 게 아니라 모든 게 풍족한 상태에서 여유롭게 상황을 지시하는 게 솔직히 즐거웠다.

하지만, 저 혼자 미래를 정할 수는 없다. 차헌은 끝끝내 대답하지 않은 채 일어났다. 불만을 담아 발끝을 까딱거리던 윤석현은 주먹으로 차헌의 허리춤을 쿡, 찔렀다.

“어디로 가든, 나중에 답답하면 얘기 들어줄 테니까 놀러 와요. 한연우 에스퍼한테도 안부 전해주고.”

둘이 놀러 왔다가 눌어붙어도 되고. 씩 웃는 윤석현에게 눈인사를 건넨 차헌은 무영 길드장에게 달려갔다.

“무영 길드장, 님.”

“강차헌 에스퍼. 이제 센터장님이라고 불러야 하나요?”

“아니요. 조희서 지금 어딨어요?”

재판을 보고 있으니 궁금해졌다. 연우야 자기 나름대로 복수를 했다며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했지만, 그 별거 아닌 복수가 뭔지 정말로 궁금했다. 무영 길드장은 잠시 고민하다 길드원에게 손짓했다.

길드원의 안내에 따라 무영 길드가 관리하는 구역으로 향한 차헌의 귀에 큰 소리가 들렸다. 한참 동안 뭐라 따지던 목소리는 뒤로 가면 갈수록 빈정거리는 목소리로 바뀌었다.

“왜요? 우리 같은 D급이랑 접촉하면 그쪽 등급도 떨어질까 봐?”

“좌천해서 여기까지 왔으면 가이딩이라도 잘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이제 여기 말고는 갈 곳도 없다면서요.”

이를 악문 채 가이딩을 방사하던 조희서는 익숙한 마나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것도 가이딩이라고. 앉아만 있지 말고 뭐라도, 악, 뭐예요!”

강차헌이었다. 저를 업신여기는 에스퍼를 밀어낸 조희서는 한달음에 차헌의 앞으로 달려갔다. 드디어, 드디어 나의 필요를 깨달았구나.

“왜 이제 왔어요? 빨리, 빨리 가요.”

조금 늦긴 했지만 괜찮았다. 원래 빈자리가 클수록 그리움도 커지는 법이니까. 그래, 나 정도 되는 가이드를 이런 곳에 방치할 리가 없지. 센터에 가이드가 얼마나 부족한데. 드디어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어. 환히 웃으며 빨리 센터로 가자며 재촉하던 조희서는 차헌이 뿌리친 제 손을 내려보았다. 왜? 왜 손을 뿌리치지? 내 손을 잡고 매달려야 하는 거 아니야?

“왜…. 저를 데리러 오신 거 아니에요?”

“내가 왜요.”

차헌의 목소리가 이명처럼 들렸다. 센터, 한연우, C구역. 자신이 듣기 싫은 단어는 모조리 걸러 들은 조희서는 코웃음을 치는 차헌을 재차 붙잡았다.

“한연우 에스퍼, 아니, 걔는 이제 에스퍼도 아니지. 최동원 에스퍼와 박서현 에스퍼에게 제 의사를 전달하셨나요? 팀원들이 원한다면 센터에 복귀할 생각도 있어요.”

새초롬한 목소리와 정반대로 간절한 손가락을 내려보던 차헌은 모처럼 친절을 발휘했다. 뿌리치는 대신 그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떼어냈다.

“박서현 에스퍼와.”

일단은 검지부터.

“최동원 에스퍼는.”

약지까지.

“두 번 다시 그쪽이랑 엮이고 싶지 않대요.”

* * *

“형!”

문이 열리고 차헌이 다다다닥 뛰어오는 소리에 연우가 등 뒤로 무언갈 숨겼다. 나 여기 뭘 숨기고 있어요. 하는 태도에 차헌이 눈썹을 치켜들었다.

“와, 우리 사이에 비밀 만들지 말자고 손가락 걸고 도장 찍은 게 엊그제에요.”

아직도 자신에게 숨기는 게 있냐며 성큼성큼 걸어간 차헌이 연우의 볼을 붙잡고 머리통을 깨물었다.

“너 지금 머…리를 깨문 거야?”

“네.”

버둥거리는 연우의 머리를 앙앙앙 깨문 차헌은 소파 위에 떨어진 봉투를 집어 들었다.

“압류 통지서? 이게 뭐예요?”

“우리 어릴 때 살던 집, 그게 담보로 잡혔나 봐.”

연우는 조마조마한 얼굴로 차헌을 올려보았다. 속아라, 제발 속아라. 대장 격인 이진희가 잡혀 들어갔으니, 몸을 숨기고 있던 무리에서 파벌 싸움이 일어날 것이다. 어차피 정체가 드러났으니 지금이라도 복수하자, 정체가 드러났으니 더욱더 몸을 사리자, 하며 싸우겠지. 어느 쪽이 이기든 상관없었다. 둘 다 처리할 거니까.

싸우다가도 자신이 알짱거리는 걸 보면 바로 튀어나올 것이다. 그것들을 어떻게 처리하지…. 고민하는 데 차헌이 예상보다 일찍 들어왔다. 지금이 아니면 무리를 일망타진할 기회를 놓칠 게 분명했다. 오늘 꼭 나가야 했다.

“잠깐 다녀와야 할 것 같아서.”

그러니 이 이상한 감금을 끝내는 게 어떨까. 두 손을 모은 연우가 염원을 담아 차헌을 올려보았다.

피를 쏟고 일어난 직후부터 차헌은 제게서 조금도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 손이든, 발이든, 몸이든, 입술이든 어느 한 부위는 연우와 맞닿아있어야 만족했다. 센터에 출근했다가도 연우가 뭘 하려고 마음먹는 순간 현관문을 벌컥 열며 쳐들어왔다. 자다 말고 일어나 확인해보는 손길이나, 눈이 마주칠 때마다 눈에 띄게 안심하는 얼굴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래서 최대한 얌전히 있었지만, 오늘은 아니다. 지금 붙잡지 않으면 언제 그들을 잡을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보내줄게요.”

“연화를 노리는 무리가 있어.”

냉큼 사실대로 말하자 차헌이 볼을 앙앙 깨물었다. 얌전히 깨물려주던 연우는 벌떡 일어나 챙겨두었던 지도를 꺼냈다. 본거지를 찾진 못했지만, 무리가 자주 드나드는 곳이 있었다. 그 앞에서 얼쩡거리다가 본거지로 쳐들어가 죄다 던전에 밀어 넣고 빠져나올 계획이었다.

“여기만 갔다가 바로 올게.”

“같이 가요.”

“나 혼자 있어야 노리고 다가오지 않을까?”

“형. 말이 되는 소리를 해요.”

혼자 둘 것 같냐며 코웃음 친 차헌은 반대쪽 볼을 깨물며 물었다. 무슨 계획이냐고. 머뭇거리자 깨무는 강도가 강해졌다. 아파서 흠칫거리자 볼을 감싸 쥔 차헌이 입술에 가볍게 뽀뽀했다. 병 주고 약 주는 건가…? 잇자국이 났을 게 분명한 볼을 문지르고 있는 동안 차헌은 지도를 살폈다.

“겉모습이 이래서 그런가…? 형이 나를 어리게 보는 건 상관없는데, 저도 나름 서른 넘었거든요. 말만 센터장이지 뒤치다꺼리하느라 볼 거 못 볼 거 다 봤고요.”

연우의 손을 붙잡은 차헌은 한숨을 쉬며 소파에 몸을 기댔다. 과거, 영웅 놀이를 하던 이상철이 죽고 협회장이 바뀌며 센터는 오롯이 독립하게 되었다. 날이 갈수록 센터장이라는 직책의 무게가 더해지고 제게 의지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윤석현을 비롯한 다른 에스퍼들과 역할을 분담하는데도 센터의 기둥은 차헌이었다.

한연화가 찾아왔던 날, 차헌은 그 모든 것들을 버렸다. 가지 말라는 손을 뿌리치며 던전으로 들어갔다.

“나는 형만 무사하면 돼요.”

손등에 입을 맞춘 차헌은 씩 웃으며 연우를 독촉했다. 그래서 무슨 계획을 짜고 있냐고 재차 묻는 말에 연우는 망설이다 쥐어짜듯 대답했다. 연화를 노리는 무리를 처리하고 싶다고.

“좀 한가해지면 형 솔직하게 말하는 연습부터 해야겠다.”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맙다며 얼굴 곳곳에 입을 맞추던 차헌은 이상한 것들이 애를 다 배려놨다며 험악하게 중얼거렸다.

“그래서, 언제 갈 건데요?”

“지금. 헬리.”

연우의 부름에 등장할 타이밍을 놓치고 숨죽여 있던 드래곤이 부엌에서 기어 나왔다. 입가가 푸르죽죽한 걸 보니 또 블루베리를 먹고 있던 모양이었다. 밥 먹기 전에 간식 먹지 말라니까. 혀를 찬 연우는 드래곤에게 손을 뻗었다.

“밥 먹으러 가자.”

* * *

[여기야?]

드래곤은 으리으리한 저택을 올려보았다. 연우는 혼자 있어야 노리고 달려들 거라고 주장했으나 차헌은 그런 연우에게 딱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이래서 언제 쳐들어갈 건지, 혀를 끌끌 차던 드래곤이 인기척에 숨을 죽였다.

“늦었구나.”

“삼촌?”

로터스 길드장이 뒷짐을 진 채 저택을 올려보고 있었다.

“어떻게…?”

“다른 사람과 접촉할 때마다 달라진 게 없는지 살펴보라고 말했잖아. 왜 말을 안 들어.”

그 말에 차헌이 연우의 손목을 번쩍 들었다. 차헌과 함께 연우도 바삐 제 몸을 살폈다. 그때 실 팔찌 끝에 달린 작은 씨앗이 보였다.

“위치추적기란다. 던전 브레이크가 생겼을 때 혹시 몰라 달아둔 것인데, 이렇게 사용하게 될 줄은 몰랐지. 강차헌 에스퍼와 함께, 그것도 공간을 이동해 나타나신 걸 보니 기억을 되찾으신 것 같군요.”

공손히 인사한 로터스 길드장은 이진희가 고문 끝에 위치를 발설했다고 알려주며 무릎을 꿇었다. 하나둘 나타나는 로터스 길드원들이 그 뒤를 따라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연우 님의 분노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이 일을 저희가 마무리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시겠습니까? 감히 저것들이 연우 님의 손을 더럽히지 못하도록 저희가 연우 님의 칼이 되겠습니다.”

“그냥 자기들이 족치고 싶다는 말 아니에요?”

“조용히 해.”

눈치를 준 연우는 로터스 길드장을 내려보았다. 같은 편인 척하다가 뒤통수를 치는 인간들을 너무 많이 봐왔던 터라 믿을 수가 없었다. 이래놓고 짜잔, 배재영의 무리와 로터스 길드가 한 편이었습니다. 하면 닭 쫓던 개가 되어 지붕만 쳐다보고 있겠지.

연우가 의심하는 기색을 보이자 벌떡 일어난 로터스 길드장이 목걸이를 벗어 연우의 손에 쥐여 주었다. 그가 알려주는 대로 연꽃 모양 펜던트를 열자 연갈색 마나가 일렁거렸다.

“미리 믿음을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제 마나 코어와 연결된 펜던트입니다. 제 목숨과 연결된 거라,”

“미친, 형한테 이런 걸 왜 줘요.”

“제가 연우 님을 배반한다는 생각이 드신다면, 언제든 부수시면 됩니다.”

길드장이 공손히 인사하며 물러나자, 뒤에 있던 길드원들도 각자 목걸이를 벗어 연우에게 건넸다. 차헌이 질겁하며 받으려 하지 않자 발밑에 둔 채 머리를 조아렸다.

연우는 찜찜한 얼굴로 발아래 쌓인 목걸이와 저택을 둘러싼 인파를 쳐다보았다. 이 사람들을 설득해서 보내는 것보다 들키는 게 더 빠르겠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 길드장이 결의에 찬 눈빛으로 외쳤다.

“기억해라. 오늘의 싸움은 성전(聖戰)으로 기록될 것이다.”

“가지가지 한다, 진짜. 형 물러나요.”

연우 역시 질린 얼굴로 차헌을 잡아끌었다.

그로 약 한 달 뒤, 로터스 길드장은 뿌듯한 얼굴로 모든 마구니를 소탕했다며 알려주었다. 일반인은 위치추적기를, 이능력자들은 자기들이 만든 구속구를 차고 연화를 위한 성전(性典)을 지으며 하루에 세 번씩 연화의 행복을 비는 기도를 하게 될 거라고. 벌써 눈물로 참회하는 신도들이 많다며 로터스 길드장이 싱글벙글 웃었다. 뭐, 나쁘지 않은 결말이었다.

“그나저나, 집에는 안 가 봐도 돼요?”

“굳이… 갈 필요는 없어. 사실 나올 핑계 찾다 보니까 얻어걸린 게 그거라서.”

“와, 형 진짜 열심히 머리 굴렸네요. 나가고 싶다고 했으면 나가게 해줬을 건데 왜 그랬어요.”

잠시 갔다 오겠다고 할 때마다 네가 비 맞은 강아지처럼 쳐다봤잖아….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삼킨 연우는 말없이 웃었다. 제가 쌓은 업보이니 제가 감수해야 했다.

“그래도 한 번 가보는 게 좋지 않아요? 보니까 모레까지 물건 안 가져가면 다 압수한다던데. …사실 형이 어렸을 때 살던 집에 한번 가고 싶어요.”

그때 사관학교로 가면서 웬만한 짐은 다 가져간 것 같은데…. 눈썹을 긁적이던 연우는 묘하게 신이 난 차헌을 쳐다보았다. 집에 대한 좋은 기억은 없었지만, 차헌이 저렇게 가보고 싶어 하니 산책 삼아 갔다 오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공간을 접자 반쯤 허물어진 집이 보였다.

“…여기가 형 집이었어요?”

“응. 이제 집이라고 부르기는 좀 그렇지?”

그런데 이런 것도 집이라고 담보를 잡아주는구나. 계단을 올라가던 연우는 집 안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차헌의 앞을 막아섰다.

부모님인가? 부모님이면 뭐라고 해야 하지? 심장이 불쾌하게 쿵쿵 뛰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허리를 끌어안는 손에 몸을 맡긴 연우는 어질한 머릿속을 정리했다. 잘 살았냐고 물어봐야 할까, 우리는 잘살고 있다고 답해야 할까.

“괜찮아요?”

겨우 고개를 끄덕인 연우는 떨리는 손으로 문을 열었다.

“누구세요?”

외침과 함께 다다다, 뛰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연우의 시선이 아래로, 아래로 떨어졌다. 현관문을 연 건 연우의 허리쯤에 오는 작은 어린애였다.

“언니?”

반짝거리는 은백색 눈동자에 연우가 홀린 듯 손을 뻗었다. 그런 연우의 손을 막고 달려오는 아이를 세운 차헌이 어깨 위에서 찰랑거리는 은색 머리카락을 내려봤다.

“부용희?”

“네? 저 아세요?”

“아는 애야?”

차헌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다마다. 부용희. 향후 모든 S급이 탐내게 될 S급 가이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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