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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의 주인공이 공이 된 이유-127화 (127/143)

127화

“연화 언니를 아세요?”

연우는 은백색의 눈동자를 마주 봤다. 혹시 얘도 기억이 있는 건 아니겠지?

[아닐걸? 전혀 상관없는 애인데.]

드래곤의 말에 연우는 쪼그려 앉아 아이와 시선을 맞췄다. 이제 9살, 아니 10살쯤 됐으려나?

“나는 연화의 오빠 한연우야. 너는 이름이 뭐야?”

“부용희. 부용이라고 부르면 돼요. 연화 언니는 어딨어요? 같이 안 왔어요?”

“언니는 지금 자는 중이야. 혹시 언니랑 만난 적 있어?”

용희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금방 도리질을 쳤다. 그러고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안다는 거야, 모른다는 거야.”

“언니를 어디서 만났는데?”

다정한 물음에 차헌을 힐끔 쳐다보던 용희가 연우의 어깨를 짚었다. 귓속말하려는지 다가오는 용희에게 몸을 기울여주자, 그 사이로 차헌이 손을 쑥 집어넣었다.

“잠시. 떨어져서 얘기해.”

“차헌아.”

“형. 얘 가이드예요.”

지금 이 어린 애를 경계하는 거야? 웃으며 차헌을 올려보던 연우는 용희의 볼에 닿은 그의 손등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음, 방금 연우가 뭐라고 했지? 지금 이 어린 애를 경계하는 거야?]

깔깔깔 웃는 드래곤의 말에 얼굴을 붉힌 연우가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으며 용희를 쳐다봤다. 뚱한 얼굴로 차헌을 흘겨보던 용희는 두 손을 꼭 모은 채 귓가에 속삭였다.

“시간이 없다고 했어요.”

“…뭐?”

벌떡 일어난 연우는 집 안을 살폈다. 찾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않자 창문을 연 연우는 그대로 뛰어내렸다. 저 형이 이능 놔두고 뭐 하는 거야. 얼음 계단을 만들어 따라 나간 차헌은 집 주변을 맴도는 연우를 붙잡았다.

“형.”

“아, 말없이 나와서 미안. 방금 연화의 마나가 느껴져서….”

횡설수설 말하던 연우는 정신없이 주변을 살폈다. 덩달아 마음이 급해진 차헌이 발을 굴러 얼음 덩굴을 피워냈다. 사방으로 뻗어나간 얼음 덩굴이 소득 없이 돌아오자, 연우도 감각을 넓혀 주변을 살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분명 연화의 마나가 느껴졌는데?

울상이 된 연우가 차헌을 붙잡았다.

“시간이 없다는 게 무슨 뜻이지?”

“숙소로 가요. 처제가 머무는 곳도 아공간이라며. 저번에 걔가 넘어왔듯이 우리도 갈 수 있을 거예요.”

등을 도닥이는 손길에 당장이라도 넘어갈 듯 가쁘게 숨을 몰아쉬던 연우가 천천히 진정했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무영 길드장에게 숙소를 안 넘기고 버티고 있었다. 자신의 숙소도, 한연화의 아공간도 무영 길드장이 선물해준 곳이니 분명 접점이 있을 것이다.

품속에서 고른 숨을 뱉어내던 연우가 작게 고맙다고 인사했다. 형한테 고맙다는 인사를 들어본 건 처음인 것 같은데. 연우의 정수리에 턱을 문지르던 차헌이 불쑥 볼을 내밀었다.

“고마우면 뽀뽀.”

주변을 둘러보던 연우가 입을 맞췄을 때, 우와. 하는 소리가 들렸다. 얼음 계단을 조심조심 내려오던 부용희가 낸 소리였다.

“방금 뭐한 거예요?”

깜짝 놀란 연우의 손에 밀려난 차헌은 뻔뻔한 얼굴로 용희에게 다가갔다. 용희는 뒷짐을, 차헌은 팔짱을 낀 상태였다.

“네가 몇 살이지, 지금?”

“열한 살이요.”

“조금만 더 크면 해.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하는 그런 게 있어.”

“그럼 나도 연화 언니한테 해도 돼요?”

“된다고 하면. 아저씨는 허락받았어.”

애한테 못 하는 말이 없다. 흘겨본 연우가 미련을 담아 주변을 둘러보다 집으로 들어가자 차헌과 용희가 진지한 얼굴로 마주 보고 있었다.

“여기서 너 혼자 못 살아. 일단 우리 집에 데려가긴 할 건데.”

“우리 집이요?”

“아니, 형이랑 내 집. 대신 조건이 있어. 거기서 저 사람이랑 닿으면 안 돼. 가이딩을 하는 건 더더욱.”

“가이딩이 뭔지는 모르겠는데, 저는 연화 언니한테만 하고 싶어요.”

“좋아. 그럼 이제 가서 짐 챙겨.”

차헌의 허락에 쪼르르 뛰어간 용희가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어린 시절 연우의 방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둘러보자 집 여기저기에 생활감이 묻어 있었다. 부엌으로 들어간 연우가 찬장을 열어 라면 봉지의 유통기간을 확인했다. 비교적 최근 날짜였다.

“너 여기서 살았어?”

제 몸만 한 캐리어에 마구잡이로 짐을 챙기던 용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집이 조금이라도 멀쩡한 상태였다면 세를 내줬구나, 싶었겠지만 4층 위로는 반쯤 부서진 상태였다. 그런데 여기서 살았다고?

“아빠가 여기서 살라고 했어요. 그럼 누가 데리러 올 거라고.”

무슨 말이지? 연우는 무의식적으로 차헌을 돌아보았고, 못마땅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있던 차헌이 팔을 뻗어 연우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이 집이 좀… 유명해질 수밖에 없었잖아요. 뭐라도 하나 건져보겠다고 오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그러다 보니 그… 이능력자로 각성한 애들을….”

무슨 말인지 알겠다. 아이들의 손이 닿는 위치에만 손때가 묻어있는 이유가 그래서였구나. 한숨을 쉰 연우는 캐리어와 작은 가방을 들고 나오는 용희를 지켜봤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 아득한 기억이 몰려왔다.

“뭐야, 형 왜 울어요?”

[연우 울어?]

놀란 드래곤이 목을 감싸고 연우의 얼굴을 확인했다. 연우는 아니라고 도리질을 치면서도 눈물을 뚝뚝 흘렸다. 한연화 이 자식은 내가 얼마나 힘들게 키웠는데, 자기 혼자 큰 줄 알지. 효도하지는 못할망정 오빠 기억을 그렇게 지워버려. 어떻게 너를 잊고 살라고.

감정이 북받쳐 눈물을 뚝뚝 흘리는 연우를 보고 당황한 드래곤이 차헌을 쳐다봤다.

좀 어떻게 해 봐.

내가 뭘 어떻게.

당황한 차헌은 무릎을 꿇은 채 연우의 볼을 타고 줄줄 흐르는 눈물을 닦아냈다.

“아니, 처제도 형을 걱정해서,”

“자기만 걱정해? 나도 걱정, 뭐? 처제?”

“네.”

단호한 대답에 눈물이 쏙 들어갔다. 딸꾹질이 나올 것 같아 입을 막고 있자, 화장실에서 나온 용희가 수건을 건넸다. 버석한 수건에서는 눅눅한 냄새가 났다.

“…나 혹시 결혼했어?”

“꿈에서는요. 한 번씩 꿈이랑 헷갈릴 때가 있어요. 형이 이해해요.”

뻔뻔하게 대답한 차헌은 얼음을 만들어 수건으로 감쌌다. 눈 위에 올려놓고 그대로 연우를 끌어안으려는 데 옆구리가 아렸다. 용희가 한 번만 더 해보라며 작은 우산으로 옆구리를 찌르고 있었다.

“용희야. 사람을 우산으로 찌르면 안 되지.”

“신기한데 만지기는 싫어서요.”

싸가지 한번 기특했다. 차헌은 용희에게 얼음을 두두두 날린 뒤 연우를 부축하며 일어났다. 그리고 못마땅한 얼굴로 연우가 잡은 용희의 손을 내려보았다.

“이동하려면 어쩔 수 없잖아.”

“그래도요.”

투덜거린 차헌이 연우의 허리를 끌어안자 맞닿은 몸으로 조곤조곤한 연우의 목소리가 울렸다.

“다른 곳으로 이동할 건데, 조금 어지러울 수도 있어.”

“연희 언니가 있는 곳으로 가는 거예요? 괜찮아요. 저 롤러코스터 열 번도 넘게 타봤어요!”

호언장담하는 말과 달리 용희는 도착하자마자 그대로 앓아누웠다. 마나 코어가 제대로 자리 잡기도 전에 아공간을 통과한 여파였다.

용희의 머리맡에 마나 포션을 탄 물을 올려놓은 연우가 입술을 말아 물자마자 차헌이 손을 뻗어 턱을 끌어내렸다.

“왜요?”

“아니, 나 용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라서….”

“아, 거기까지 안 읽었구나. 저도 대충만 알아요. 저랑 비슷한 케이스라서, 18살에 각성한 걸로 아는데 아까 몇 살이라고 했죠? 11살? 쟤가 일찍 각성한 것도 미래를 바꾼 영향이겠죠?”

“그렇겠지?”

한숨을 쉰 연우는 용희의 통통한 볼살을 쳐다봤다. 우리 연화도 저랬을 때가 있는데. 흐뭇하게 웃는 연우의 볼을 잡고 저를 쳐다보게 만든 차헌이 그대로 안아 들었다. 익숙하게 차헌의 품에 기댄 연우가 소파를 가리켰다.

“이제 어떻게 하게? 센터로 데려갈 거야?”

“정신 차리면 물어보게요. 하는 거 보니까 뭐, 연화 언니랑 같이 있을래. 할 것 같은데. 한연화는 어디로 간대요?”

소파에 앉은 차헌은 내려가려는 연우를 제 허벅지 위에 끌어 앉혔다.

“아마 라운드 길드로 가지 않을까?”

“아, 인재 하나 들어오나 했더니 라운드한테 뺏기겠네.”

삐딱하게 혀를 차는 게 완벽한 센터장의 모습이었다. 작게 웃는 연우의 볼에 입을 맞추던 차헌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형은요? 앞으로 어떻게 할 거예요?”

무릎에 똬리를 튼 드래곤 역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재심사를 치면 센터로 돌아가겠지? 나 위약금 낼 돈이, 아, 있긴 하구나.”

드래곤의 레어에 쌓여있는 부산물을 팔면 위약금을 내고도 남을 테니까. 차헌은 슬금슬금 물러나는 연우를 붙잡아 단단히 끌어안았다.

“위약금은 신경 쓰지 말고 형하고 싶은 대로 해요. 센터장, 아니, 정영환 재판 받으면서 낮은 등급 후려쳐서 계약한 거 다 들통 나서 싹 다 계약서 새로 써야 해요. 형 계약서도 아마 파기될 거예요.”

괜히 임시직을 맡았다며 투덜거리는 차헌의 얼굴은 묘하게 신나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과거에는 가위바위보에서 가위만 들고 싸웠다면 지금은 모든 패를 들고 싸우는 상황이었다.

“너는 계속 센터장 할 거야?”

“보고요. 그리고 형.”

연우와 눈을 맞춘 차헌이 씩 웃으며 몸을 바짝 붙여왔다.

“나 임시직 맡는 대가로 여기저기서 받기로 한 게 있거든요?”

“뭘… 받기로 했는데?”

뭔가 불안했다. 마른침을 삼킨 연우가 몸을 빼자, 차헌이 뱀처럼 허리를 감아왔다. 살짝 드러난 살갗을 문지르는 손에 약한 현기증이 일었다.

“형도 알잖아요. 대표가 되기 위해서는 완전한 에스퍼여야 한다는 거. 그런데 지금 나는 미성년자고, 협회는 나에게 계속 센터를 맡기려 해요.”

쇄골에 쏟아지는 숨에 연우가 눈을 질끈 감았다. 차헌이 말할 때마다 입술이 목에 닿았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연우를 끌어당긴 차헌은 목덜미를 지분거리다 유난히 도드라진 목뼈에 입을 맞췄다.

“차헌아, 잠시만.”

닿은 부위뿐만 아니라 아랫배까지 오싹거렸다. 버둥거리는 연우를 놓아준 차헌이 연하늘빛 눈동자를 선득하니 빛냈다. 이전에 느꼈던 기분이었다. 마치 포식자 앞에 놓인 먹잇감이 된 듯한 기분.

“내가 센터장이 되는 날, 저는 에스퍼로 인정받을 거예요.”

연우의 허리를 놓은 차헌은 손을 끌어 네 번째 손가락, 약지를 깨물었다.

“그러니 미성년자 어쩌고 하면서 도망갈 생각은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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