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그러니까 준비해둬요.”
“무슨 준비?”
다급하게 붙잡자 차헌의 손가락이 손등을 타고 어깨로, 어깨에서 허리로 넘어갔다. 엄지손가락만 움직여 허리를 매만지던 차헌이 쪽, 소리가 나게 볼에 뽀뽀했다.
“다른 건 내가 다 준비할 테니까 형은 마음의 준비만 해요.”
[와우, 비켜주려면 빨리 자라야겠는걸.]
능글맞게 속삭이는 드래곤을 붙잡은 연우는 부엌으로 향하는 차헌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걸음걸이에 드래곤이 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점심 안 먹었죠? 뭐 먹을래요?”
“그냥 아무거나.”
“또 아무거나래. 오늘은 계란찜 먹어볼래요?”
“계란찜?”
[나는 명란젓 넣어줘.]
냉장고에 명란젓이 있었던가. 연우는 소파에서 일어나다 말고 팔을 끌어안았다. 온몸을 짓누르는 위압감에 어깨가 잘게 떨렸다. 이를 악물며 고개를 들어 올린 연우는 차헌을 찾았다. 그의 앞으로 이동하려는 순간 턱, 하고 발목이 붙잡혔다. 이능이 튀는 것과는 달랐다. 구속구를 찼을 때와도 다른 느낌이었다. 아예 마나 코어가 사라진 듯한…. 차헌 역시 놀란 표정으로 심장께를 더듬고 있었다.
“…이게, 뭐, 무슨?”
당황한 연우는 인형처럼 딱딱하게 굳은 드래곤을 붙잡았다. 미약하지만, 콩콩거리는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안도하기도 잠시, 반쯤 기어가 차헌과 맞닿은 연우는 인기척에 거실 한쪽을 바라보았다.
[음, 내가 너무 놀라게 했구나.]
그렇게 경계할 필요 없단다. 두 사람의 눈빛에 허공에 반쯤 둥둥 뜬 용희가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용희가 손을 가볍게 튕기자 어깨를 짓누르던 위압감이 사라졌다. 떨리는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일어난 연우는 차헌의 앞을 막아섰고, 차헌은 그런 연우를 제 뒤로 밀어 넣었다.
[어머. 서로를 아끼는 모습이 참 보기 좋구나.]
“누구…세요?”
마른침을 삼킨 연우는 차헌을 잡아당겼다. 은색 머리카락과 눈동자는 여전했지만, 앞에 있는 사람은 용희가 아니었다.
[편히 부르렴. 알아도 달라지는 건 없을 테니. 그나저나, 연우야. 그렇게 긴장할 필요가 없단다. 나와 잠시만 이야기를 나눠주겠니? 할 말이 있어 이 아이의 몸을 빌린 것뿐, 너희를 해치려는 의도는 조금도 없단다.]
그랬다간 연화에게 미움을 받게 될 테니. 작게 웃은 용희, 아니, 용희의 몸을 빌린 사람은 소파에 앉으며 엄지와 검지를 부딪쳤다. 딱, 하는 소리와 함께 차헌과 연우의 몸이 소파 위로 이동했다. 차헌을 살핀 연우는 맞은편에 앉은 사람을 노려보았다.
“대화를 나누고 싶으시다면서 차헌이 입은 왜 막아둔 거예요?”
[너랑만 대화를 나누고 싶으니까. 몇 번이나 불렀는데, 그때마다 저 아이가 훼방을 놓아서.]
차헌에게 윙크한 사람은 가볍게 한숨을 쉬며 이마를 짚었다. 설마 게이트가 터진 게 이 사람 때문인가? 의문이 드는 순간 고개를 돌린 사람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정답인가 보군.
[아주 잠시면 되었는데 말이야. 아무튼, 놀라게 해서 미안하구나. 본론으로 돌아가서 연화에게 말 좀 전해줄래? 연화가 잠을 자지 않아서 대화를 나눌 수가 없어.]
“연화가요?”
[그 애가 걱정되지? 나를 좀 도와주겠니?]
고개를 끄덕이자 차헌이 연우의 손목을 붙잡았다. 치켜뜬 두 눈이 뭘 시킬 줄 알고 고개를 끄덕이느냐고 다그치는 것만 같았다.
[우리의 부탁은 두 가지란다. 용희를 옆에 둘 것, 그리고 두 번 다시 제멋대로 흐름을 바꾸지 말 것. 연화는 싫어하겠지만, 마나 코어가 너무 손상되어 가이드가 꼭 필요한 상황이란다. 그리고 우리는 변덕스러운 연화도 사랑하지만, 그렇다고 내 살을 파먹일 수는 없잖니?]
눈을 가늘게 뜨며 웃은 사람은 연우와 차헌, 드래곤에게 차례대로 인사를 보낸 뒤 눈을 감았다.
[그럼, 안녕.]
“잠시만요. 누구라고 전해드릴까요?”
[오랜 친구라고 하면 알 거야.]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차헌이 욕을 씹어뱉는 소리가 들렸다. 긴장이 풀려 차헌에게 기댄 연우는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새까만 시야에 허공을 더듬거리자 단단히 붙잡아주는 차헌의 손이 느껴졌다.
“형?”
언젠가 느껴봤던 감각이었다. 심장이 불쾌하게 뛰고, 귀가 찢어질 듯한 이명. 연우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몸을 비틀었다. 버둥거리는 연우를 끌어안은 차헌이 급히 입술을 부딪쳤다. 밀어내는 혀를 억지로 붙잡으며 마나를 넘겨줘도 겉도는 기분만 들뿐 섞인다는 느낌이 없었다. 차헌은 기어 온 드래곤과 함께 연우의 몸 주변에서 일렁거리는 마나를 내려봤다. 연우의 마나와 닮은 은백색의 마나.
“이건….”
[연화의 마나야.]
그 순간 숨을 토하며 일어난 연우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멀지 않은 곳에 연두색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속눈썹에 엉겨든 눈물을 닦아내며 발을 뻗는 순간 차헌이 연우를 붙잡았다.
“어딜 가려고.”
문양과 연우를 번갈아 보던 차헌이 한숨을 푹, 쉬며 일어났다. 초조한 듯 입술을 짓씹는 걸 보니 제가 말려도 듣는 시늉도 하지 않을 게 뻔해 보였다. 하여튼 한연화만 엮이면 눈이 돌아간다니까.
“같이 가요.”
갔다가 무슨 짓을 당할 줄 알고 혼자 가. 투덜거린 차헌은 연우의 손을 꼭 붙잡았다.
[나도 갈래.]
연우의 목을 감싼 드래곤이 초커처럼 딱 달라붙었다.
[이번에도 배 가르려고 하면 레어로 도망갈게.]
장난스러운 목소리와 다정한 온기에 주체할 수 없던 떨림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느리게 심호흡한 연우는 차헌과 함께 문양을 밟았다.
* * *
“왔어?”
책을 읽고 있던 연화는 여느 때와 같이 손을 흔들었다. 연우 역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벽에 등을 기댄 차헌은 말없이 둘을 지켜보았다.
“언제 일어났어?”
“안 잤어.”
그래 보인다며 혀를 차는 말에 연화가 핏줄이 다 터진 눈으로 웃음을 흘렸다. 그대로 벌렁 눕는 연화를 쳐다보던 연우가 방 여기저기에 흩어진 책을 정리했다. 사방이 책장인데도 책을 꽂을 공간이 없었다. 색깔별로 분류해 바닥에 쌓아둔 연우는 연화에게 다가가 엉망인 머리카락을 정리해주었다.
“밥은? 먹었어?”
연화가 힘없이 고개를 젓자 곧바로 냉장고로 달려간 연우가 문을 열었다. 냉장고에는 신선한 재료가 넘쳐났지만, 불을 쓰지 못하는 연우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아쉬운 대로 잼과 빵을 챙긴 연우가 칼을 찾았지만, 제대로 된 세간살이가 없었다.
이러니 애가 나올 때마다 먹을 것부터 찾지. 혀를 찬 연우는 빵을 대충 한입 크기로 뜯어 연화의 입에 밀어 넣었다.
“대충 요기만 하고 나가서 밥 먹자.”
한참 동안 빵을 씹던 연화는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연우를 올려보았다.
“…아무것도 안 물어봐?”
“물어보면 알려는 줄 거고?”
그 말에 나지막하게 웃음을 흘리던 연화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나 목 막혀서 못 먹겠어.”
“그럼 우유라도 먹을래?”
연화는 고개를 저으며 연우의 손목을 붙잡았다. 한참 동안 연우를 쳐다보고 있던 연화의 눈에서 눈물이 툭툭 떨어졌다.
“왜 내 소원은 안 이루어졌을까? 과거로 돌아가게 해 달라는 것보다 내 소원이 더 쉽잖아. 이능을 잃게 해달라, 기억을 잃게 해달라는 소원이 그렇게 어려워? 정말 간절하게 빌었는데 왜 오빠는 그대로지?”
잠에 취한 듯 몽롱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연화는 비틀거리다 연우에게 몸을 기댔다.
“다 나 때문이야….”
연화는 열이 올라 따끔거리는 눈을 감았다. 세계는 연화에게 수많은 미래를 보여주었다.
꿈을 통해 연화는 부모님이 단둘이서만 도망가는 바람에 각성하지 못한 연우를, 부모님을 따라갔지만 끝내 각성하지 않은 연우를, 부모님의 애정을 독차지하는 자신을 질투하는 연우까지 수많은 연우를 봤고, 그중에 자신을 아껴주는 연우를 선택해 그림을 그렸다.
혼자 남겨지기 싫었으니까.
그 결과로 자신을 대신해서 오빠가 죽었다. 자유롭게, 마음대로 살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단지 연화를 아낀다는 이유로 오랜 기간 억눌려온 사람이 그렇게 허무하게 죽었다. 그래서 다시는 그러지 못하도록 금제를 걸었는데, 예상과 달리 자신의 강제력이 오빠를 몇 번이나 죽게 만들었다.
천천히 눈을 뜬 연화가 연우를 붙잡았다. 반대쪽 손에는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책이 들려있었다.
“내가 오빠를 책의 주인공으로 만들면, 오빠가 나를 대신해서 죽지 않게 될까?”
“내 미래를 봤어?”
“지금이라도 보면 돼.”
단호한 목소리와 달리 연화의 눈꺼풀은 잘게 떨리고 있었다. 사실 과거로 돌아오자마자 연우의 미래를 살폈다. 그때마다 연우는 끔찍한 결말을 맞이했다. 책을 써 강제력을 발휘하려 했지만, 아무리 연화라도 보지 못한 미래를 책으로 쓸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막아보려 연우의 기억까지 지웠는데….
“…이번에도 그럴 거야?”
의미를 알 수 없는 질문은 예전에 차헌이 물어봤던 질문과 비슷했다. 자신을 살리기 위해 죽을 거냐는 질문이었다. 말없이 쏘아보는 차헌의 시선에 웃어준 연우는 고개를 저었다. 이제는 드래곤도 있고, 도망갈 능력도 있으니 그렇게 끔찍하게 죽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나를 살리겠다고 던전에 들어갈 거지?”
“응.”
“…왜 오빠한테는 내 이능이 안 통하는 걸까?”
연우를 향한 질문이 아니었다. 연화는 허공을 올려보다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몽롱한 빛을 띠는 눈은 금방이라도 잠이 들 듯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었다. 연우는 조심스럽게 연화를 안아 침대에 눕혔다. 연화는 잠이 들기 싫다는 듯 두 눈을 부릅떴다.
“네가 지금 몇 살인데 아직도 잠투정을 해.”
“오빠가… 잘못되는 미래를 볼까 봐 자기 싫어….”
힘없이 중얼거리는 말에 이불을 덮어준 연우가 연화를 도닥였다.
“아까 네가 그랬잖아. 나한테는 네 이능이 안 통한다고. 일단 얘기는 나중에 하고 조금 자. 친구가 할 말 있대.”
친구?
몽롱하게 중얼거리던 연화가 벌떡 일어나 연우를 붙잡았다. 몸이 휘청거릴 정도의 거센 손길에도 연우는 다정하게 웃으며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주었다.
“친구는 흐름을 바꾸지 말라는데 나는 네가 죽는 걸 두고 보지 않을 생각이고, 너를 대신해서 죽을 생각도 없어. 일단 자고, 용희랑 같이 밥 먹자.”
“용희? 부용희? 오빠가 걔를 어떻게 알아?”
연화는 잠에 취한 와중에도 인상을 사정없이 찡그렸다. 연화와 연우를 번갈아 보던 차헌이 손을 들었다.
“잘 생각이 없어 보여서 묻는 건데, 여기 있는 책 좀 읽어도 됩니까?”
무슨 말이냐는 연화의 표정에 차헌이 방 안 가득 쌓여있는 책들을 눈짓했다.
“친구라던 그 사람. 흐름을 바꾸는 게 싫었다면 부용희도 빨리 각성시키지 않았겠죠. 예전에 협회장에게 책을 몇 권 얻어 읽었는데, 다른 책에서는 내가 던전을 해결했다는 언급만 있고 당신은 물론, 다른 사람들이 죽었다는 말은 없었어요.”
“그래서요?”
“다른 책에도 그 내용이 있는지 살펴보려고요. 그리고 그쪽이 쓴 글은 그쪽이 못 지웁니까?”
“네?”
“찢든 태우든, 한 번이라도 책을 손상해봤습니까? 제가 시도했을 때는 아무것도 못 했는데, 당신이라면 다를 것 같아서요. 그 부분을 발견해 모조리 지우면 그 미래도 없어지는 거 아닙니까? 확정된 미래를 없앨 수 있다면 형도 그런 선택을 하지 않겠죠.”
차헌을 멍하니 바라보던 연화는 비틀비틀 일어나 책장을 뒤적였다. 구석의 구석에서 발견된 검푸른 책은 연우에게도 차헌에게도 익숙한 책이었다. 연화가 책을 펼치자 놀란 연우가 차헌에게 달려갔다.
“네 책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