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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의 주인공이 공이 된 이유(외전)-3화 (132/143)

3화

협회 건물 앞.

연우는 긴장한 얼굴로 차헌을 붙잡았다. 차헌은 손을 끌어 입을 맞췄다. 괜찮냐고 묻는 다정한 목소리에도 협회 건물로 들어가는 연우의 발끝은 잘게 떨리고 있었다.

“힘들면 다음에 올래요?”

연우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언제 오든 똑같을 것이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는 쉽게 사라지지 않을 거니까. 연우는 크게 숨을 고른 뒤 차헌의 손을 꼭 잡은 채 건물로 들어섰다.

“오셨습니까.”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로터스 길드장과 라운드 길드장이 두 사람을 반겼다. 사람 좋은 얼굴로 웃으며 다가온 라운드 길드장은 협회장이 자리를 비웠다고 알려주었다. 그 말에도 연우의 얼굴에서 긴장감이 사라지지 않았다. 납치를 지시한 협회장이 없어도 이곳은 어린 시절에 갇혀 있던 곳이다. 몸이 자연스럽게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다.

도망가고 싶은 듯 움찔거리는 연우를 차헌이 끌어안았다. 지금이라도 죽여 버릴까. 중얼거린 차헌은 연우를 감싼 손에 힘을 풀지 않았고, 라운드 길드장과 로터스 길드장도 주변을 기만하게 경계했다.

있는 대로 날을 세운 채 검사실에 도착하자,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직원이 연우를 안내했다.

“한연우 님. 아이템 제거 후 들어가실게요.”

연우는 피어싱을 하나씩 제거하다 말고 팔찌에 손을 올려두었다. 머뭇거리는 손짓을 눈치챈 드래곤이 발랄한 목소리로 응원을 보냈다.

[누가 이상한 짓 하려고 하면 내가 바로 던전으로 던져버릴게!]

그러니 안심하고 오라는 말에 옅게 미소 지은 연우는 팔찌를 풀고 기계 안으로 발을 집어넣었다. 들어가기 직전, 제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차헌에게 손을 흔들어준 연우는 기계에 몸을 맡겼다.

안내에 따라 이능을 사용하자 삐- 하는 경고음이 들렸다. 뭔가 문제가 생긴 것 같다는 직원의 말에 검사실에서 나온 연우는 기다리고 있던 차헌의 손을 붙잡았다. 잠시 후 나타난 직원은 당황한 얼굴로 검사지를 들여다봤다.

“오늘 C급 재심사 받으러 온 거 맞으시죠?”

“네.”

“음, 이쪽 기계로 다시 한번 해보실까요?”

직원의 뒤를 따르던 차헌은 어깨너머로 검사지를 훔쳐보다 말고 갑자기 연우를 끌어안았다. 그대로 구석으로 척척척 걸어간 차헌이 작게 속삭였다.

“형 그러다 S급 나오겠어요.”

“응?”

“저거 C급용 기계잖아요. 에러 뜬 거 보니까 형 마나 때문에 과부하 온 것 같던데요. 높은 등급 받는 게 편하겠지만, 괜찮겠어요?”

연우는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안 괜찮다. 이능불안정자로 분류되어 쉬다 온 애가 갑자기 등급이 높아졌다? 온갖 의혹이 쏟아질 게 뻔했다. 알려줘서 고맙다고 인사한 연우는 힘을 빼고 기계에 들어갔다. 최근 마구잡이로 이능을 사용하다 보니, 마나를 얼마만큼 사용해야 적당한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아냐, 더 적게.]

갈등하고 있을 때 드래곤의 목소리가 들렸다. 계약하기 전의 마나 코어 크기를 기억하고 있다며 조절을 유도하는 드래곤의 말에 따라 얇디얇게 마나를 흘려보내자 수고했다는 안내와 함께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왔다. 문이 열리자마자 기다리고 있던 차헌이 달려와 수고했다며 손을 주물러주었다.

평소 같았으면 검사받는 게 뭐가 힘드냐며 거절했을 연우는 말없이 그에게 몸을 기댔다. 손바닥 가득 고여 있는 식은땀을 닦아준 차헌이 얼음의자를 만들어 앉고 연우를 제 무릎에 올려두었다. 차헌이 꼭 안아주자 그의 체향이 느껴지며 안정이 찾아왔다. 눈을 감은 연우는 심장박동을 들으며 긴장을 풀었다.

“두 분 많이 친해지셨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라운드 길드장은 남은 자리에 걸터앉으며 한 몸처럼 꼭 붙어있는 두 사람을 쳐다봤다. 연우를 잘 꼬셔서 라운드 길드에 영입하려고 했는데, 저 꼴을 보아하니 말을 꺼내지도 못하겠다. 로터스 길드장 역시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착잡한 얼굴로 연우의 뒤에 섰다.

“가이드는 언제 소개해줄 거예요?”

“제 가이드는 왜 궁금해하시는데요.”

“아, 그분이 강차헌 에스퍼 가이드예요?”

차헌의 날 선 태도에도 라운드 길드장은 유들유들한 목소리로 얘기를 이어 갔다. 차헌이 이번에 한 이능력자를 후원하기로 했고, 그 아이가 가이드라는 말에 한동안 시끌시끌했었다.

센터장이 된 지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각인을 하냐고. 그 성질머리를 받아주는 가이드가 누군지 정말 궁금하다고. 차헌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는 로터스 길드장을 보다, 연우의 허리를 끌어안은 손에 힘을 줬다.

“제 인생에 가이드는 한 명뿐일 거고, 그게 그 애는 아니에요. 후원은 무슨, 성인이 될 때까지 보호자가 되어주기로 약속한 것뿐입니다.”

“그게 후원이죠? 아무튼, 아직 사관학교에 등록 안 했던데. 어디로 보낼지 고민 중이에요? 가이드면 빨리 교육을 받는 게 좋을 텐데…. 다음에 라운드에 한번 데려와 봐요. 계약을 어디랑 할지는 모르지만, 교육은 다양하게 받아보는 게 좋지 않겠어요?”

솔직히 어디든 사관학교보다는 나을 텐데. 밉지 않게 윙크한 라운드 길드장의 말에 연우가 입술을 말아 물었다. 라운드 길드장의 말대로 학교를 알아보고 있었지만, 용희는 연화와 한시도 떨어지기 싫다며 차헌과의 합의 끝에 둘의 집에 머물고 있었다.

그런 용희를 보는 연화의 눈길은 썩 곱지 못했다. 용희는 제가 과거에 어떤 일을 했는지 기억하지 못했고, 연화는 말해주기 싫다며 입을 다물었다. 쫓아내라는 말이 없었고, 용희가 옆에 있을 때 연화의 상태가 좋아지는 게 눈에 보일 정도라 곁에 두고 있지만, 연화가 불편하다면 다른 곳으로 보낼 마음은 있었다.

“한연우 에스퍼님?”

[연우야! 에스퍼래! 통과했나 봐!]

오랜만에 듣는 호칭에 연우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재심사에 통과했다고 알려준 직원은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해 일주일의 유예 기간이 있다고 알려주었다.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는 물음에 차헌이 준비해뒀던 센터 입사 지원서를 꺼내 들었다.

아쉬워하는 길드장들을 두고 나오는 길에 차헌이 등을 쓸어주었다. 솟았던 긴장이 날아가는 걸 느낀 연우가 홀가분한 기분으로 차헌의 손을 잡았다.

“통과 축하해요.”

“고마워.”

“말로만?”

제 입술을 톡톡 두드리는 차헌을 보던 연우는 구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뭘 하려고 자리까지 옮겨…!

터질 것 같은 심장을 누른 차헌이 눈을 감자 연우가 가볍게 입을 맞췄다. 반쯤 흡입하는 차헌의 입맞춤과 달리 연우는 입술 산만 살짝 부딪히고 떨어졌다. 멀어지는 연우를 붙잡고 숨이 차서 어쩔 줄 몰라 할 때까지 혀를 섞고 싶지만, 혼나겠지. 차헌이 물러서자 연우는 아쉬운 얼굴로 손등을 문질렀다.

[자리 비켜줘?]

조용히 해. 팝콘 먹고 싶다고 사람을 쫄 때는 언제고. 드래곤을 흘겨본 연우는 입을 삐죽이는 차헌을 붙잡고 타워로 향했다. 미리 예매해둔 영화표를 찾아 영화관으로 들어서니 어정쩡한 시간이라 그런가 텅 빈 좌석들이 연우를 반겼다. 주변을 둘러보던 드래곤은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내 팝콘을 먹기 시작했다.

이전의 경험을 교훈 삼아 이번에 고른 영화는 말랑 달콤한 로맨스 이야기였다. 연우는 금세 이야기에 빠져들었고, 차헌은 그런 연우에게 팝콘도 먹여주고 콜라도 물려주다 어느샌가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노골적인 유혹에도 영화만 보고 있던 연우는 차헌의 손을 끌어 깍지를 꼈다. 팔걸이가 불편한지 뒤로 젖혀버린 연우가 꿈질꿈질 다가와 차헌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몸을 붙여오는 연우의 모습에 하늘을 날아갈 듯하던 차헌의 기분은 집에 도착하는 순간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오빠 왔어?”

한연화가 거실에 앉아 있었다.

“한연화! 너 언제 깼어.”

깍지를 풀지도 않고 공간을 접은 연우 때문에 한연화와 마주 앉게 된 차헌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연우를 위해서라지만 그의 기억을 멋대로 앗아가고 둘의 사이를 갈라놓은 한연화가 반갑지 않았다.

한연화도 마찬가지인 듯 은근히 거리를 두고 있었다. 제 오빠를 죽게 만든 사람이 달갑지 않다는 거겠지.

차헌이 씻고 오겠다며 들어가자, 드래곤도 씻고 오겠다며 레어로 이동했다. 코앞에서 마수가 기어 다니는데도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다가온 용희는 연화의 옆자리에 앉았다. 언니에게 제가 필요하다는 용희의 주장대로, 가이딩을 받는 연화의 얼굴에는 옅은 홍조가 올라와 있었다.

“오빠는 이제 복귀하는 거지?”

“응. 거기까지는 보여?”

“대충은.”

책을 찢은 여파로 연화는 강제력이라는 이능을 잃었지만, 여전히 미래를 볼 수 있었다.

“그것들이 화를 풀면 또 달라지겠지.”

음. 세계를 그것들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연화뿐이겠지. 소파에 몸을 묻고 있던 연화는 밥을 먹겠다며 일어났고, 재빨리 앞서간 용희가 메뉴판을 펼쳤다. 곧 식탁 위로 연화가 좋아하는 음식이 차례대로 올라왔다. 귀찮은 기색으로 용희를 보고 있던 연화가 수저를 챙겨주며 손짓했다.

“너도 먹어.”

그 말에 볼을 붉힌 용희가 밥도 없이 김만 퍼먹었다. 식탁으로 자리를 옮겨 용희에게 반찬을 챙겨주던 연우는 꾸벅거리다 잠이 든 연화를 부축해 방으로 이동했다.

“그래도 너랑 있을 때는 정신을 차리는 시간이 길어지는 것 같지.”

“네. 그분들도 곧 화를 푸실 거예요. 언니를 많이 사랑하거든요. 키우는 강아지가 책을 한 권 찢어버렸다고 화를 낼 순 있지만, 버리지는 않잖아요?”

방금, 뭐라고? 연화를 강아지에 비유한 용희의 말에 분노가 자글자글 끓어올랐다. 혹시라도 연화가 들을까 다급히 귀를 막아준 연우는 침대에 그녀를 눕혀두고 방문을 닫았다. 자신과 달리 연화의 방에 출입이 금지된 용희는 문에 바짝 기대 가이딩을 펼쳤다. 그런 용희를 노려보던 연우는 울려 퍼지는 이명에 눈을 깜박거렸다.

휘청거리는 몸에 힘을 준 연우는 용희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다시는 연화를 그런 식으로 비유하지 말라고 경고해야 했다.

근데, 용희가 뭐라고 했었지?

어…? 내가 뭘 하려고 했더라?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던 연우의 눈에 차헌의 머리카락이 보였다.

아, 맞다. 차헌이 달래 줘야 하는데.

문을 열고 들어가자 차헌이 뚱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화났어?”

“제가 형한테 어떻게 화를 내요. 형. 진짜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제가 부용희보다 아래는 아니죠?”

“무슨 소리야. 나는 너랑 연화랑 헬리 살피는 것만으로도 힘들어.”

그 말에 차헌이 팔을 벌렸다. 그의 품으로 파고든 연우는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왜 그런 생각을 해.”

“형이 오자마자 한연화한테 달려가니까 그렇죠.”

“미안….”

“사흘 만에 깬 거니까 봐주는 거예요.”

다시 한번 미안하다며 부드럽게 입을 맞추던 연우는 그제야 차헌이 쓰고 있는 고깔모자를 발견했다.

“뭐야?”

“형 합격 축하 파티해야죠.”

탁자에는 케이크와 샴페인도 준비되어 있었다.

“같이 하려고 했는데. 드래곤은 씻으러 갔죠? 처제는 잠든 것 같고, 꼬맹이는 그 옆에서 안 떨어질 거 아니에요. 우리 둘만이라도 파티해요.”

차헌은 촛불 대신 얼음꽃으로 장식한 케이크를 연우의 손에 올려주었다. 소원을 빌라는 말에 멍하니 얼음꽃을 내려보던 연우의 눈에 눈물이 고여 들었다. 차헌이 보지 못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던 연우는 앞으로 잘 부탁한다는 말에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를 위한 케이크를 받아본 건 처음이었다. 부모님은 연화의 생일은 성대하게 챙겨주었지만 연우의 생일은 한참 뒤에야 ‘아, 맞다. 연우 생일이었지.’ 하고 흘려보내기 일쑤였다. 사관학교에 입학해서는 적응하기 힘들어 잊고 지냈고, 센터에 입사해서는 살기 바빠 챙길 시간도 없었다.

그런데 고작 재심사에 통과했다고 케이크라니. 기분이 이상했다. 터지기 직전의 풍선 같은 마음을 붙들고 있던 연우는 천천히 케이크를 내려놓았다.

“왜요? 생크림 말고 초코로 사 올 걸 그랬나.”

“차헌아.”

“네?”

“다 먹고 키스할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차헌은 케이크를 한입에 욱여넣고 달려들었고, 그를 향해 팔을 벌린 연우는 환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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