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진짜 같이 안 갈 거야?”
“네.”
단호하게 대답한 용희는 읽던 책으로 얼굴을 가렸다. 차헌이 구해다 준 ‘가이드의 모든 것’이라는 책이었다. 연우는 미련을 담아 다시 한번 물었지만, 용희의 대답은 변함없었다.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던 차헌이 그만하면 됐다며 손을 내저었다. 아쉬운 얼굴로 물러난 연우는 거울에 몸을 비춰보았다.
복귀 기념으로 맞춘 정장은 품이 큰 훈련복과 달리 몸의 선이 그대로 드러났다. 차헌은 가는 허리와 엉덩이에서 허벅지로 이어지는 몸 선을 지켜보다 드래곤과 눈이 딱, 마주쳤다.
움찔, 하는 차헌에게 쉭! 소리를 내던 드래곤은 재밌어 죽겠다며 땅을 데굴데굴 굴러다니며 웃음을 터트렸다.
“적당히 해.”
드래곤에게 눈을 흘긴 연우는 머리를 정리하는 척 달아오른 귀를 숨겼다. 차헌이 정장을 차려입은 모습만 보면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아까 넥타이를 매어줄 때 자제하지 않았다면 지금까지도 방에서 차헌과 혀를 섞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당장 넥타이를 낚아채….
“형?”
어깨를 짚는 손에 튀어 오른 연우는 거실 반대편에서 나타났다. 당황한 차헌에게 웃어준 연우는 태연한 얼굴로 현관을 나섰다.
[연우 머릿속이 아주 음란해.]
조용히 해.
키들거리는 드래곤을 손목에 감은 연우는 뒤따라온 차헌의 손을 잡고 타워로 이동했다. 새로운 에스퍼들을 환영하는 겸, 새 출발을 기념하는 연회가 열린다고 했다. 차라리 임명식을 하지 그랬냐는 타박에 차헌은 말없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무튼 연회에 다른 길드장도 참여한다고 했으니 용희의 존재를 알리고, 차헌이 그녀의 보호자가 되었다고 공표하려 했다. 그런 기회를 날려버린 게 아쉬워 한숨을 흘리자 차헌이 몸을 붙이며 물었다.
“꼭 알려야 해요?”
“어디가 됐든 학교에 보내야 하니까. 그 전에 알려두는 게 마음이 편하지.”
“굳이… 가야 해요? 지금처럼 우리가 가르치면 안 되나? 처제도 학교 안 다녔잖아요.”
“다녔어. 도중에 그만둬서 그렇지. 너도 알잖아. 가이드는 남들보다 사회성이 중요해. 최대한 많은 등급을 만나봐야지.”
고개를 갸웃거리던 차헌은 사회성이 부족해 센터에서 쫓겨난 한 가이드를 떠올리고는 이내 수긍했다. 다음 주면 유예 기간이 끝나고 복귀하는 날이니 두 사람은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었다. 곧장 타워로 들어선 연우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왜 이렇게 조용하지?
직원의 안내에 레스토랑 한쪽에 자리를 잡은 뒤에도 연우는 계속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북적거려야 할 곳이 텅텅 비어있는데도 차헌은 덤덤한 표정이었다. 뭐지? 우리가 좀 일찍 왔나?
“아무도 안 오니까 그만 둘러봐요.”
“어?”
“형이랑 단둘이 나오고 싶어서 거짓말한 거예요.”
차헌은 머쓱한 얼굴로 목덜미를 문질렀다. 연우와 오붓하게 식사하고 싶은데, 말만 꺼내면 형이 굳으니까 이런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아니, 그거야 네가 조금만 분위기가 잡히면 청혼하니까….
분명 사귀는 것부터 시작하자고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한 차헌은 우리 언제 결혼하느냐며 연우를 쪼아대고 있었다. 듣다 듣다 지친 드래곤이 반지도 없으면서 무슨 프러포즈냐고 따지자 차헌은 기다렸다는 듯 반지 상자를 꺼내 들었다.
틈날 때마다 손가락에 끼우려는 걸 말린다고 고생했었지….
[그거 받았으면 각인하자고 달려들었을걸.]
분명.
고개를 끄덕인 연우는 아련한 얼굴로 차헌을 바라봤다. 말뿐이지만 형이 결혼하자고 할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겠다는 지금도 이틀에 한 번씩 쪼아대는데 반지를 받으면 음, 정신을 차렸을 땐 식장에 들어가고 있지 않을까.
현재 시점으로 미성년자인 차헌의 마나 코어가 미숙하다는 이유로 각인을 미루고 있었지만, 연우의 마나 코어도 만만찮게 미숙한 상태였다. 한 심장에 두 개의 마나 코어가 붙어있는 데다가 하나는 마수화 진행 중이었다. 이 상태에서 각인을 진행했다간 차헌에게 어떤 피해를 줄지 모른다.
적어도 드래곤이 제대로 성장한 다음에.
차헌의 시선을 외면한 연우는 애피타이저로 나온 수프를 떠먹다가 입을 가렸다.
“별로예요?”
“그 정도는 아니고.”
최대한 음식을 즐겨보려 했으나 입에 맞지 않았다. 평생 던전 부산물만 먹고 살 수 없는 노릇이라 최선을 다해 씹어봤지만, 목으로 넘기기가 힘들었다. 연우의 힘겨운 사투를 지켜보던 차헌이 의자를 끌어 연우의 옆으로 다가왔다.
차헌은 연우가 먹은 음식을 살펴보다 테이블 위에 놓인 은색 종을 흔들었다. 호박이 들어간 음식은 죄다 빼달라고 부탁한 차헌은 치즈가 잔뜩 올라간 샐러드를 포크로 찍었다.
“이거는요?”
샐러드는 괜찮았다. 한결 나아진 표정으로 입을 움직이는 연우를 지켜보던 차헌은 코스 요리가 나올 때마다 한 입씩 먹여주었다. 그때마다 아기 새처럼 입을 벌려 받아먹던 연우는 생선구이를 마지막으로 입을 막았다.
“더 못 먹겠어.”
“디저트만 먹어요. 딸기랑 체리 시켰는데 뭐가 좋아요?”
그 순간 디저트가 나타나야 할 자리에 카드키가 쑥 올라왔다. 순간 연우의 눈치를 본 차헌은 함께 놓인 편지를 확인했다. 설마 형이 준비한 건….
[좋은 시간 되기를.]
협회장의 인장을 본 차헌이 분노를 담아 외쳤다.
“이 영감탱이가 미쳤나!”
차헌의 사자후가 우렁우렁 울려 퍼지는 것과 동시에 직원들이 몸을 숨겼다. 남의 사생활에 한 번만 더 간섭해보라고 외친 차헌은 편지를 칼로 내려찍었다. 얼어붙은 편지는 가루가 되어 날렸고 차헌은 바들바들 떨리는 주먹을 식탁에 콩, 내려쳤다.
“이래서 내가 협회가 싫어요. 알 권리 운운하면서 미행이나 붙이는 더러운 것들.”
욕을 씹어뱉던 차헌은 종을 들어 빠르게 흔들었다. 방금까지 맑고 청아한 소리를 내던 종은 따따따따 흔들리며 직원을 호출했다. 달려온 직원은 차헌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연우의 눈치만 봤다.
“이거.”
날뛰는 기운을 억누른 차헌은 카드키를 들어 올렸다.
“협회장한테 청구되는 거 맞죠.”
“네? 네, 맞습니다.”
직원의 대답을 들은 차헌은 연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형, 우리 협회장 재산 거덜 내러 가요.”
오늘 일을 후회하게 해주겠다며 이를 간 차헌은 연우가 말릴 틈도 없이 방으로 향했다. 문을 잡아 뜯듯이 열어젖힌 그는 신발도 벗지 않고 메뉴판을 펼쳤다.
“차헌아, 잠시만 그거 가격이.”
놀란 연우가 뜯어말렸지만, 차헌은 태연한 얼굴로 와인을 주문한 뒤 눈썹을 까딱거렸다.
“이 정도는 해줘야 다음부터 안 건드릴걸요.”
맞는 말이긴 한데 너무 비싸지 않나…? 곧바로 나타난 와인병을 보던 연우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자신의 연봉보다 비싼 와인을 경계하는 연우의 허리를 끌어안던 차헌이 픽 웃었다.
“형. 저거 로미어의 진주보다는 싸요.”
“아, 그래?”
드래곤 레어, 연우의 두 번째 집에 산더미 같이 쌓여있는 진주를 떠올린 연우는 어깨에서 긴장을 풀었다. 차분해진 연우가 소파에 앉자 폴짝 뛰어내린 드래곤이 느긋하게 호텔을 구경했다.
[연우야!]
쉬지 않고 룸서비스를 시키는 차헌을 뒤로한 연우는 한쪽에 딸린 온천을 보고 눈을 반짝거리는 드래곤의 옆에 쪼그려 앉았다.
[휴라나무 온천 - 사용료는 따로 추가됩니다.]
“돈 내야 한다는데?”
[그럼 못하는 거야?]
“아니.”
아쉬워하는 드래곤의 머리 위로 얼음 덩굴이 뻗어 나왔다. 시원하게 물줄기를 틀어준 차헌은 드래곤에게 눈짓했다. 연우는 온천에 뛰어들어 뽈뽈 헤엄치는 드래곤과 가득 쌓이는 물건을 지켜보다 결국 차헌을 붙잡았다.
“차헌아. 이만하면 된 것 같아. 정신 차리셨을 거야.”
“그 인간이? 설마요.”
연우의 손에 과일 꼬치를 쥐여 준 차헌은 쉬고 있으라며 침대를 가리켰다. 설탕으로 코팅된 과일을 와작, 베어 먹던 연우는 다가온 드래곤에게 블루베리를 물려주었다.
한참 동안 룸서비스를 시키던 차헌은 방 한쪽을 가득 채운 물건을 보고 나서야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저거 다 어떻게 들고 가려고.”
“여기서 일하는 직원들한테 주고 가려고요.”
그런 거면 괜찮지. 고개를 끄덕이는 연우에게 초콜릿을 먹여준 차헌은 호텔을 둘러보다 커튼을 젖혔다. 연우는 혀끝으로 초콜릿을 녹이며 자연스럽게 방 안을 돌아다니는 차헌을 지켜봤다. 드래곤은 흥미진진한 얼굴로 점점 서늘해지는 연우의 얼굴을 힐끔거렸다.
“몇 번 와봤나 봐?”
“네? 네.”
해맑은 대답에 연우가 말없이 웃었다. 평소와 다른 얼굴에 차헌은 저도 모르게 드래곤의 눈치를 봤다. 가늘게 히죽거리는 눈에 조금 전 상황을 복기해보던 차헌은 호다닥 뛰어 연우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그, 어, 왜, 예전에요. 말했었나? 형한테? 협회장이 죽었을 때 소란이 좀 있었다고 했잖아요. 그때 센터 지부가 좀 심하게 박살 났었거든요. 기숙사도 무너지고. 다음 협회장이 미안하다고, 수리하는 동안 호텔에 묵으라고 내줬거든요. 그때 잠시 살아서 익숙한 거예요.”
그 말에 솟아오르던 연우의 눈꼬리가 얌전히 쳐졌다. 말없이 연우를 지켜보던 차헌은 손을 들어 입을 틀어막았다.
“와, 방금 형 질투한 거예요? 내가 여기 다른 사람이랑 왔을까 봐?”
안겨드는 힘을 이겨내지 못한 연우가 침대에 벌렁 눕자, 그 위에 자리를 잡은 차헌이 얼굴 여기저기에 입술을 내려찍었다.
“말했잖아요. 저는 그때도 지금도 형밖에 없어요.”
마지막으로 넷째 손가락에 입을 맞춘 차헌이 무릎을 꿇었다. 딱 봐도 청혼할 기세라 연우는 다급하게 차헌의 입에 과일을 밀어 넣었다. 차헌이 입안 가득 들어온 딸기를 힘겹게 씹는 동안, 옆에서 블루베리를 짭짭거리던 드래곤이 찌뿌둥하다며 침대 위를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나 기지개 좀 켜고 올게. 바로 집으로 들어갈 거지?]
드래곤이 사라지자 차헌은 과일을 먹는 연우를 내려봤다. 연우가 먹여주는 과일을 기계적으로 씹는 차헌의 머릿속에는 연우, 호텔, 침대, 연우, 호텔, 침대만 반복되고 있었다.
협회장 엿 먹이겠다고 쳐들어오긴 했지만, 타워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방이었다. 분위기도 제법 그럴듯했고, 와인도 있었다.
저번처럼 은근슬쩍 밀어붙이면 벗길 수 있을 것 같은데. 싫다고 하면 앞에서 자위만 해도 되냐고 물어볼까? 안 건드릴 테니까 와이셔츠만 입어달라고 하고… 끝없는 망상에 마른침을 삼키는 순간, 연우와 눈이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