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차헌이 온다.]
얼마나 열중했는지 차헌이 경계 안으로 들어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깜짝 놀란 연우는 이불을 뒤엎으며 드래곤에게 눈짓했다.
[들켜도 재밌을 것 같은데.]
“뭐?”
아무것도 아니라며 혀를 날름거린 드래곤은 흔적을 끌어안고 레어로 향했다.
“왔어?”
현관으로 이동한 연우는 차분하게 차헌을 맞이했다. 평소라면 끌어안기며 일상을 보고했을 차헌이 착잡한 표정으로 아래를 보고 있었다. 수심이 가득한 얼굴에 당황한 연우가 차헌의 볼을 붙잡았다.
“무슨 일 있었어?”
“그, 우리 각인 인증서 있잖아요.”
“응.”
“우리 집으로 시킨 줄 알았는데 본가로 갔나 봐요.”
아. 어쩐지 내 것만 왔더라. 차헌은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안겨 왔다. 가족이 확인하기 전에 몰래 가져오려고 했는데 엄마가 보셨다고. 주말에 본가에 다녀와야 할 것 같다는 말이 끝남과 동시에 차헌의 핸드폰이 깜박거렸다.
눈썹을 찌푸린 채 핸드폰을 쳐다보던 차헌이 연우의 눈을 가렸다.
“어머님 전화 아니야?”
“형은 신경 안 써도 돼요.”
…왜? 서운한 마음에 입술을 깨물자 연우를 들쳐 안은 차헌이 소파로 척척 걸어갔다. 연우를 제 허벅지 위에 올린 차헌은 그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며 깊게 한숨 쉬었다.
“우리 집 가면 형 피 말라서 안 돼요.”
차헌의 집안 분위기에 대해서는 대충 전해 들어서 알고는 있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안전 구역을 벗어난 적 없는, 에스퍼와 가이드의 차이점도 모르는 완벽한 일반인이라고.
“말했나? 우리 아빠, 처제가 누군지도 모른다고.”
“뭐? 그럴 수 있어?”
어떻게 연화를 몰라? 연우의 반응에 한숨을 쉰 차헌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국가적 영웅이라 칭송받는 이상철 정도만 겨우 아신다고. 그쪽은 그쪽, 이쪽은 이쪽이라며 선을 그어놓고 사시던 양반이라 아들이 에스퍼로 각성했다는 말에 큰 충격을 받으셨단다.
“나보다 아빠가 먼저 실려 갔다니까요.”
다른 날도 아니고 국가 대표 선발 대회 날 각성했으니 충격이 더 크셨겠지. 차헌이 활쏘기에 재능을 보였을 때부터 그보다 아빠가 훈련에 더 진심이었다고 했다. 잠이 많은 차헌을 깨워 훈련장에 데려다주고, 어깨가 시큰거릴 때마다 온갖 한약재를 넣어 찜질에 마사지까지 해주시며 그가 금메달을 따올 날만 손꼽아 기다리셨다고. 지금에서야 잠잠해졌지만, 각성 초기에는 그냥 포기하고 일반인으로 살아가라고 다그칠 정도였다.
“마나 코어가 토끼 간도 아니고 어떻게 뗐다 붙었다 해요. 그냥 받아들이고 사는 게 제일 마음 편한데, 제가 늦게 각성한 편이라 아빠가 미련을 못 버렸거든요.”
차헌의 말처럼 이능력자로 각성한 건 어쩔 수 없는 운명이라 순응하고 사는 게 제일 편했다. 하지만 차헌이 그랬듯 대부분의 이능력자는 현실을 부정하는 편이었고, 그들의 보호자는 이능력자를 외면하거나 평생 안 보고 사는 쪽을 택했다.
일반인 가정에서는 연우 남매나 용희처럼 부모에게 버려지는 경우가 많았는데 차헌의 부모님은 외면을 택했다. 누나만이 차헌을 에스퍼로 인정했고, 부모님의 인식을 바꾸려 노력하는 중이었지만 역부족이라고 했다.
“에스퍼 얘기만 나오면 버럭버럭하시는데 형한테 그런 모습 보여주기 싫어요.”
그래서였군. 그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살살 쓸어주던 연우는 깜박거리는 차헌의 핸드폰을 확인했다.
<…찾아보니까 그거 결혼이나 마찬가지던데, 말도 없이 통보하니까 당연히 화를 내지 이 머저리야.>
<소개 안 해줄 거야?>
<전화는 해라. 아빠 온종일 네 연락만 기다린다.>
연우의 시선을 확인한 차헌이 핸드폰을 엎었다. 차헌은 재차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고 연우 역시 그러려고 했다.
“…아버님 쓰러지셨다며.”
하염없이 차헌을 기다리다 쓰러지셨다는 어머님의 연락이 왔다. 곧바로 전화한 누나가 꾀병이라고 알려주긴 했지만, 마음이 쓰이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결국 차헌은 본가로 내려가기로 했다. 연우도 함께였다.
“괜찮겠어요?”
“생각해봤는데, 연화가 갑자기 각인했다고 통보하고 상대가 누군지 안 알려주면 나 같아도 속이 터지겠더라고.”
납득한 차헌의 손을 잡고 공간을 접자 높다란 아파트가 보였다. 현관 앞에 선 차헌은 한참 동안 연우의 손을 조물거린 뒤에야 띵동, 벨을 눌렀다.
“차헌이 왔냐!”
“봤죠. 꾀병이라니까.”
연우를 뒤로 숨긴 차헌은 버선발로 뛰어나온 아빠, 강도진에게 인사를 건넸다. 채신머리없게 무슨 짓이냐며 타박하던 엄마, 황유선은 어색하게 웃으며 연우를 맞이했다.
“들어와요. 차헌이 선배 맞죠? 얘기 많이 들었어요.”
“아, 그때 그 선배? 밖에 서 있지 말고 들어오세요. 하하하.”
뒤에 선 누나, 강지현과도 눈인사를 나눈 연우는 조심스럽게 집 안에 들어섰다. 들어서자마자 거실 한쪽에 진열된 트로피가 들어왔다. 차헌은 보지 말라며 연우의 눈을 가렸고, 누나도 호들갑을 떨며 식탁으로 안내했다.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일단 차리긴 했는데, 맛있게 먹어요.”
갑자기 시작된 식사에 잘 먹겠다고 인사를 한 연우가 숟가락을 드는 순간 질문이 쏟아졌다. 차헌이 너는 선배 소개도 안 해주냐, 로 시작된 호구 조사에 눈썹을 늘어트린 연우는 사근사근한 태도로 대답을 이어갔다.
“우리가 이능력자를 볼 일이 많이 없어서 그런데, 선배는 우리 차헌이랑 다른 능력입니까?”
[에스퍼 얘기만 나와도 질색한다며?]
그러니까. 연우는 밥을 먹다 말고 차헌을 올려보았다. 연우가 하는 말이 어려운지 중간중간 인상을 쓰시긴 했지만, 태도가 무척 우호적이었다. 그렇게 걱정할 필요는 없었던 것 같은데.
“그런데, 그… 선배는 우리 애가 누구랑 각인했는지 알고 있어요? 그쪽 세계에서는 각인하고 난 뒤 부모님께 서로 인사드리고 그런 게 예의가 아닌가 봐?”
“무슨 소리래. 오늘 각인 상대랑 같이 간다고 말했잖아요. 방금까지 실컷 인사해놓고 뭘 물어요.”
차헌의 말에 부모님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흥미진진한 얼굴로 사태를 관망하던 누나도 쿨럭, 거리며 기침을 토해냈다.
“어…. 남자랑?”
어색한 침묵이 이어지고, 연우는 당황한 얼굴로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남자랑 하는 게 왜…? 가족을 둘러보던 차헌은 이럴 줄 알았다며 한숨을 쉬며 일어났다.
“형도 일어나요.”
“뭘 일어나!”
벌떡 일어난 강도진은 핏발선 눈으로 연우를 노려보았다. 차헌이 눈과 귀를 가려주었지만, 악의로 넘실거리는 표정은 빠짐없이 뇌리에 박혔다.
[왜 연우한테 난리야?]
드래곤의 삐딱한 음성과 함께 차헌의 날이 선 목소리가 들렸다. 이래서 오기 싫었다는 차헌의 말에 강도진과 황유선 부부가 합심해서 소리쳤다.
“뭘 잘했다고 큰소리야! 네가 정신만 똑바로 차렸어도 에스퍼인지 뭔지 그게 안 됐을 게 아냐!”
“네가 미리 말을 해줬으면 우리도 마음의 준비를 했겠지!”
“내가 이쪽 얘기만 꺼내도 듣기 싫다면서 말 돌린 건 엄마랑 아빠잖아요.”
“시끄러워! 그게 뭐가 덥다고 이상한 생각을 해서는! 나 때는 말이야! 그런 날씨에 드럼통을 들고 바닷가를 달렸다고! 그런데 아빠가 각성했어? 어!?”
“조용히 하고 앉아요. 형한테 창피하니까.”
“아빠가 창피해? 어?! 나는 에스퍼 아들이,”
“더 창피하다고요? 국가 대표 아빠로 살려고 했는데 실패해서 아쉽다고요? 귀에 못이 박힐 지경이니까 그만해요.”
차헌의 만류에 허리에 손을 올리고 씩씩거리던 강도진은 시선을 돌려 연우를 바라보았다.
[뭘 봐!]
캭캭거리는 드래곤의 목소리 뒤로 비난이 쏟아졌다. 차헌은 연우를 끌고 나가려고 했지만, 연우는 담담한 표정으로 강도진의 말을 듣고 있었다. 자신이야 부모님에게 버려졌지만, 차헌은 아니었다. 감정을 쏟아내고 나면 민망해지실 테니 그때 차분하게 대화를 나누는 게 나았다. 차헌의 손을 꼭 붙잡은 연우는 날뛰는 팔찌를 감싸 쥐었다.
“차헌이 네가 에스퍼니까 짝은 그 뭐, 다른 거여야지. 같은 에스퍼에 같은 남자?”
[뭐?! 나는 차헌이가 마음에 드는 줄 알아?!]
제발 진정해. 강도진의 비난보다 팔찌가 파들파들 떨리는 게 더 무서웠다. 드래곤만 따로 떼서 레어에 던져버릴까, 고민하던 연우는 눈앞에서 살랑거리는 얼음 결정에 차헌을 끌어안았다.
“차헌아. 그만해”
“마, 맞아. 아빠도 그만해요. 그 한연우… 씨? 미안해요. 괜히 오라고 해서 못난 모습만 보였네요.”
“뭘 잘했다고 어른 앞에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얼음 결정을 낚아챈 연우는 차헌의 손을 붙잡았다. 대화고 뭐고 잘못하다간 집이 얼어붙을 수도 있었다. 차헌이 사고를 치기 전에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뒤에서 사태를 지켜보던 황유선이 현관문을 가로막았다.
“너 이렇게 가면 또 언제 오려고!”
“강차헌! 나가기만 해! 내가 너희 사이 찬성할 것 같아?!”
[나도 반대야!]
사방에서 쏟아지는 고함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연우는 맞잡은 손으로 계속해서 마나를 흘려주며 차헌을 진정시켰다. 눈가가 붉어진 차헌은 연우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형, 이런 소리 듣게 해서 진짜 미안해요.”
“내가 오자고 한 거잖아. 괜찮아.”
“안 떨어져!?”
강도진의 외침에 몸을 일으키던 차헌은 경련하고 있는 팔찌를 건드렸다.
[캭! 건들지 마!]
“야. 집에 좀 가자.”
[뭐?]
슬그머니 몸을 변형시킨 드래곤은 차헌과 한참 동안 시선을 나누다 폴짝 뛰어내렸다. 공간을 열어 레어로 넘어간 드래곤을 붙잡으려는데 성큼 다가온 강도진이 연우의 앞을 막았다.
“한연우 씨. 어른이 말하잖아요, 지금. 에스퍼가 일반인 말 무시하고 그러면 됩니까?”
“아뇨, 잠시만….”
공간이 일그러지는 감각에 연우는 번뜩 고개를 들어 허공을 올려보았다. 긴장감이 도는 연우의 얼굴에 마른침을 삼킨 차헌의 가족도 주변을 둘러보았다.
“움직이지 마세요.”
경고와 동시에 단검이 날아가고, 끽, 하는 소리와 함께 새가 툭 떨어졌다.
“뭐야, 당신 창문 열어놨어요?”
“아니… 새가 집에 왜….”
한 마리가 아니었다. 휘- 울음소리를 내며 허공을 배회하는 휘파람새를 보던 연우는 손을 뻗어 원흉을 붙잡았다.
“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