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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역꾸역 밀어 넣은 음식이 결국 탈을 낸 것이었다. 앉은자리에서 구토를 해 버리고선 버틀러의 부축을 받고 화장실을 다녀온 이온이 핼쑥해진 얼굴로 방에 되돌아왔다.
그러고 한참을 홀로 누워 있다가 허리가 아파 잠마저 들기 힘들어질 무렵, 비척비척 일어나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마치 어린아이가 걸음마를 떼듯이 비틀거리며 걷던 이온이 마침내 거울 앞에 섰을 때였다. 날이 선선하니 신선한 공기를 마시는 게 낫지 않겠느냐며 버틀러가 살며시 열어 둔 창문 사이로 흘러들어 온 바람이 이온의 실처럼 가는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밀빛에 가까운 금발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모습이 작은 거울에 비치자 아이는 입을 벌렸다.
‘와…….’
이온은 놀라움에 눈을 댕그랗게 떴다. 제 입으로 스스로를 칭찬하는 것이 민망하기는 했지만 어딘가 아파 보이는 것만 빼면 이온의 얼굴은 예쁘장하게 생긴 편이었다.
다만 아파 보인다는 게 정말 문제이긴 했다.
비루먹은 개처럼 삐쩍 마른 얼굴과 몸, 그리고 퀭한 눈. 어쩐지 몸에 힘이 하나도 없다 했더니 다 이유가 있었다.
‘원래부터 아팠던 걸까.’
이 몸의 주인은.
이온은 전생의 기억이 뚜렷하지는 않았지만, 이전의 자신이 이 ‘이온’이라는 소년과는 다른 영혼임을 느끼고 있었다.
‘혹시 그 방에서 죽은 건 아닐까.’
이 정도의 상태라면 자신이 눈을 뜬 그 어두운 방 안에서 이미 죽었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아 보였다. 그렇다면 ‘문’을 열고 들어온 자신이 비어 버린 육체에 자동으로 흘러들어 온 것일지도.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우울해진 이온이 입술을 살며시 삐죽이고 있는데.
[오픈 월드 게임 ‘영원의 제국’에 처음 오신 플레이어님을 위해 튜토리얼 시스템을 가동합니다.]
[본 튜토리얼 시스템 종료 시 플레이어는 페널티 상태 이상 ‘실어(失語)’를 해제하게 됩니다.]
[실행하시겠습니까?]
“……?”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메시지에 이온이 눈을 크게 몇 번 깜빡였다. 그러다가 제 아래쪽에서 무언가 빛이 나는 걸 발견하고 시선을 내렸다. 거울 밑 서랍 근처에 메시지가 떠 있었다.
[튜토리얼 진행을 원한다면 서랍을 열어 안에 든 아이템을 획득하세요.]
[아이템의 획득은 플레이어의 생존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메시지에 따라 이온이 서랍을 열었다. 그러자 낡은 책 하나가 나왔다. 손에 쥐어 펼쳐 보니 이곳의 언어인 듯한 문자들이 늘어서 있는 것이 보였다. 다행히 문자의 의미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처음 몇 문장을 읽었을 때에는 그저 평범한 소설인 듯 보였다.
아니면…….
오브라이언 제국 100년 편년사
표지를 한 번 살핀 이온은 그것이 곧 역사서임을 눈치챘다.
이온은 책장을 몇 장 넘기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눈을 들어 메시지창을 보았지만 책에 대한 설명이 따로 없는 것이, 아무래도 이후의 행동은 알아서 결정하라는 뜻인가 보다.
책으로 뭘 해야 하지? 단순히 책장을 넘기는 것만으로는 아무런 변화가 없으니 다른 일을 해야 할 듯했다.
이온은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마침내 방문을 발견했다. 일단 저 굳게 닫힌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보고 싶었다. 공작가의 저택이기에 방은 충분히 넓고 훌륭했지만, 어딘가 삭막해 보이는 이 공간이 이온은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온은 책을 작은 손에 쥔 채 살금살금 방문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저를 오라버니라고 불렀던, 이름이 에밀리였던 그 아이가 그랬던 것처럼 문에 꼭 붙어서 조심조심 문을 열었다.
아픈 몸으로 어딘가로 갈 것이라고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인지, 아니면 돌아다녀도 상관없다는 것인지 다행히 주변에 지키고 있는 이들은 없었다. 그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 찰나, 이온은 제 행동이 ‘옳은’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적어도.
[복도를 따라 대서재로 향하세요.]
이 세계의 신이 원하는 일임을.
이온은 멀리 떠 있는 작은 화살표가 어느 방향인가를 가리키는 것을 보며 밖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자박, 하고 가벼운 몸이 바닥을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가슴이 어쩐지 콩닥콩닥했지만 이온은 몸을 바짝 긴장시키며 화살표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약해 빠진 몸은 줄곧 비틀거렸다. 짧은 거리를 가는데도 아까 속을 게워 낸 탓인지 금세 입 안이 바짝 마르고 가벼운 현기증마저 일었다. 이온은 하지만 멈추지 않고 걸었다.
북쪽에 위치한 탓인지 방 쪽과 다르게 조금 어둑하고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복도를 따라갔다. 혹시나 도중에 또 제 아버지를 만날까 잔뜩 긴장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마주친 사람은 없었다.
문득 손끝에 벽의 차가운 기운이 닿았다. 이온은 왜인지 밀려오려는 멀미를 꾹 참으며 벽을 짚어 공작가의 대서재로 들어가, 화살표가 가리키는 곳에 섰다. 그러자 화살표가 잠시간 빛을 내면서 스르륵 사라졌다.
비록 낮이었고, 햇빛이 아예 들어오지 않는 것도 아니었지만 대서재 안은 워낙 어둑해 마치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은 허허벌판에 선 기분이 들었다. 공기마저 습기가 가득 찬 것처럼 느껴졌다.
긴장을 일으키는 분위기에, 이온이 침을 꿀꺽 삼키며 주변을 둘러보았을 때였다. 시스템의 지시가 이어졌다.
[이전에 책이 꽂혀 있던 곳을 찾아 제자리에 돌려놓으세요.]
‘이전에 꽂혀 있던 곳……?’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이온은 은은한 빛을 일으키는 푸른빛 창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제 손에 있던 책을 한 번 내려다본 그는 대서재 안을 가득 채운 책장들을 둘러보았다. 그러고는 약간의 고민 끝에 자신의 바로 앞에 있는 커다란 책장에 다가갔다. 책장도, 그에 꽂힌 장서도 너무 많아서 어디서부터 길을 찾아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제 키보다 두 배는 족히 높아 보이는 곳까지 빼곡하게 채워진 책들을 보자니 아득함마저 느껴졌다.
‘어떻게 해야 하지?’
이온은 책장 사이사이를 걸어가면서 책등을 살폈다. 전부 다 낯선 글자들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신기하게도 의미는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다. 아주아주 오래전부터 익혀 왔던 무언가처럼, 본능적으로.
마법학개론
속성 마법의 이해
심화 마법론
마법…….
‘여긴 그럼 판타지 세계인 걸까?’
게임 안이니까 당연한 건가?
무심코 그렇게 생각하다가 이온은 입술을 움찔했다. 기분 나쁜 서늘함을 느낀 것이었다. 그는 이 세계로 처음 왔을 때의 메시지를 떠올렸다.
[본 오픈 월드에 처음 온 유저에게는 아래와 같은 페널티가 주어집니다.]
[상태 이상: 실어(失語). 언어를 말하지 못함.]
[상태 이상: 기억 상실. 이전의 기억이 없음.]
“……아.”
이온은 그 말대로 어떠한 기억도 없었다. 머리가 백지 상태라 해도 좋을 만큼.
그런데 아무래도 ‘지식’이 사라진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말 그대로 ‘기억’만 상실된 건가. 그렇다면 상실된 기억이라는 건 전생의 기억인 걸까, 아니면 ‘이온’이라는 이 아이의 기억인 걸까.
이온은 당연하게도 후자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렇게 여겼던 것이 우습게도 전생의 기억 역시 백지였다.
‘나는 어떤 존재였지……?’
무언가에 쫓기던 기억이 있었다. 그러다 어떤 ‘문’을 열고 들어왔었다. 가만 생각해 보니 문의 형태가 어땠는지조차 머릿속에서 지워져 있었다. 그렇지만 추측하건대 그 문이란 세계의 경계였음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자신은…… 이쪽 세계와는 다른 곳에서 흘러들어 온 듯했다.
‘나이도 이 몸보다는 더 많았던 거겠지.’
이온은 책을 꼭 쥐고 있는 제 작은 손을 보면서 입술을 씹었다.
그렇지 않다면 애초에 스스로가 ‘작다’고 인식할 리 없었다. 게다가 전체적인 인지 능력이 어린아이 같지 않다는 건 짧게 생각해도 바로 알아차릴 수 있는 부분이었다.
‘페널티……라.’
이온이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제 손의 제국 편년사가 위치할 만한 곳을 찾아 나갔다.
다행히 페널티는 특정한 조건을 만족하면 사라진다고 했으니, 그 조건만 찾으면 될 터였다. 문제는 힌트가 하나도 없다는 것뿐.
책장 사이사이를 지나가는 이온의 초록빛 눈이 제목들을 유심히 살폈다. 이곳 공작가가 어느 정도로 명망 있는 가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대서재는 그 이름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 이온이 꽤 오랜 시간 헤매야 할 정도로 넓었다.
아무래도 분야별로 책이 꽂혀 있는 것 같아 역사서 쪽을 찾아가야겠다며 방향을 정했을 땐 이미 약해 빠진 몸이 힘겨움을 호소하고 있었다. 이온은 책에서 풍겨 나오는 특유의 종이 냄새에도 속이 울렁거림을 느끼며 얼굴을 구겼다.
조금만 쉴까…….
그렇게 생각하고 창문이 있는 쪽으로 걸어갈 무렵이었다.
아작, 아작, 아작.
“……?”
아작, 아작, 아작, 아작…….
이온은 제 발소리가 아닌 다른 소리가 들려오는 것에 걸음을 멈췄다.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금세 목뒤가 서늘해지면서 자연스럽게 저를 내려다보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갇혀 있는 동안 반성은 좀 했더냐.〉
그 서릿발 같은 모습으로 추측건대, 이곳에 어슬렁거리고 있다는 걸 알면 곧장 끌고 가 다시 가둬 놓고도 남을 위인이었다.
긴장감 탓에 이온이 저도 모르게 책을 꽉 쥐었다. 그동안에도 의문의 소리는 계속 울려 퍼졌다.
아작, 아작, 톡, 톡.
이번엔 무언가 부러뜨리는 듯한 소리도 연신 울려 퍼졌다.
서재에서 왜 이런 소리가 나는 거지? 책을 부러뜨릴 수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이온이 책장 밖으로 조심스럽게 고개부터 빼꼼 내밀었다.
소리는 서재의 구석, 창가에 위치한 책상 위에서 났다. 희미하게 빛이 흘러드는 그곳에 알 수 없는 형상이 보이자 이온은 두 눈을 연신 깜빡였다.
내가 잘못 보고 있나?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예의 아작, 하는 소리가 또 났다. 이온은 그 순간 작은 이빨 사이에서 부서지는 쿠키를 보다가, 그것을 먹는 하얀 생명체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
길이는 이온의 아래쪽 팔뚝보다 조금 짧은 정도에, 딱 봐도 통통하고 말랑하다 싶게 생긴 녀석이었다. 등은 반짝거리는 비늘 조각으로 뒤덮여 있었는데, 햇빛이 비추는 곳은 특히나 푸르스름한 빛을 띠었다.
그 알 수 없는 생명체는 책상 위에 몸을 늘어뜨린 채 작은 손으로 연신 쿠키를 집어 먹는 중이었다. 그러다, 마침내 이온의 눈길을 느꼈는지 녀석이 시선을 올려 이온을 바라봤다.
깜빡, 깜빡.
얼굴에 비해 커다란 눈이 연신 눈꺼풀을 깜빡거렸다. 그러더니 그 녀석이 고개를 갸웃하며 한마디 흘려보냈다.
“꾸……?”
사람의 것이 아닌 언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