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마주 악력이 더해지는 것을 느낀 그때였다. 작게 짹, 짹, 하고 새소리가 들려왔다. 그에 주변의 소리가 바뀐 것을 알아차린 이온이 눈을 살며시 떴다.
그러면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카밀루스의 얼굴일 줄 알았지만, 잘못된 생각이었다. 제 눈앞에는 다시 커다래진 욤뇽이가 흔들리고 있었다.
“꾸우욱, 꾸욱!”
카밀루스의 손에 꼬리를 잡힌 바람에 거꾸로 매달려 흔들리는 욤뇽이를 보면서 이온이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욤뇽아!”
“…….”
어느 틈에 품에서 꺼내 간 것인지, 아니면 그냥 욤뇽이가 알아서 튀어 나간 것인지 모르겠다. 다만 카밀루스는 썩 심드렁한 표정을 지은 채 이온의 손을 붙잡지 않은 다른 한 손으로 고약하게 욤뇽이를 붙잡고 있었다. 그에 욤뇽이는 꼬리 쪽으로 몸을 웅크리고 펼치기를 반복하며 카밀루스의 손에서 벗어나려 애를 쓰는 중이었다.
“꾸우웅, 끄웅.”
하지만 카밀루스는 녀석을 제압하는 건 너무 손쉬운 일이라는 양 미동도 없었다. 그 모습을 보다 못한 이온이 카밀루스에게 청했다.
“놔, 놔줘, 그 아이.”
그제야 카밀루스가 눈썹을 살짝 위로 치켜올리더니 마지못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럴까?”
짧게 대꾸한 그가 손을 펼쳤고, 욤뇽이는 미처 날개를 펼치지 못한 채 바닥에 털푸덕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꾸이이…….”
이어 바닥에 엎어져 내는 녀석의 괴상한 신음을 들으면서 이온은 간신히 웃음을 참았다.
‘드래곤의 위엄이 말도 아니잖아.’
애초에 그런 게 존재했는지조차 알 수 없지만.
그렇게 생각하다가 이온이 문득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제야 주위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이 온 곳은 어느 저택의 거실이었다. 꽤 생활감이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누구의 집인지 짐작은 갔다.
이온은 일단 제 새어 나간 웃음소리를 듣고서 침울해하는 욤뇽이를 들어 올려 품에 안았다. 그런 뒤 난리를 피우며 피신을 해 온 것치고 제법 평범한 저택 안을 둘러보았다.
촛불을 켜지 않았지만 창문을 통해 들어온 햇살 덕분에 사위가 구분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이온은 조금 어둑한 분위기가 어쩐지 아늑한 것도 같다고 생각하며 몸을 일으켰다.
“여기가, 자작님의 집입니까?”
이온이 혹시나 비틀거릴까 염려스러웠던지 카밀루스가 그의 팔을 조심스럽게 받쳐 주며 대답했다.
“……그래, 이온.”
아차, 반말을 해야 했지?
굳이굳이 이름으로 부르는 그 덕분에, 이온은 중요 사실을 다시금 상기해 냈다. 그러곤 조심스레 카밀루스의 눈치를 살폈다. 분명 이상함을 알아챘을 텐데, 카밀루스는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몸이 왜 이런 거야? 무슨 일이 있었어?”
왜인지 속상함이 가득 밴 목소리에 이온이 눈을 크게 깜빡였다. 기억이 없어서 무어라 말해야 할지 생각하느라 머릿속에 잠시 과부하가 온 탓이다.
“어, 그게.”
“혹시.”
머뭇거리는 사이 카밀루스가 눈빛을 가라앉히며 중얼거리듯 물었다.
“내가 누군지도 기억을 못 하고 있는 거야?”
그와 동시에 경고의 의미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이온의 눈앞에 글자가 점멸했다.
[상태 이상 : 기억 상실]
눈치도 빠르지. 아니, 내가 멍청한 건가?
‘그렇지만 이 경우는 정말 어쩔 수 없지 않았나…….’
기억을 하나도 안 남기고 지운 놈이 나쁜 거잖아.
이온이 어떻게 대꾸해야 할지 몰라 잠시 헤매는데, 줄곧 잡고 있던 손에 힘이 더 들어왔다.
이온은 제 손이 잡혔다는 사실도 잠시 잊고 있던 터라 놀라 카밀루스와 눈을 마주쳤다.
어쩐 일인지 카밀루스는 이온의 기억이 사라졌다는 것에 더는 천착하지 않았다. 대신 미소를 지으며 물어 왔다.
“잠시만, 실례해도 될까?”
“실례라니?”
“그 드래곤은 내 팔에 올려 두고 나한테 기대 봐.”
‘드래곤이라는 걸 알고 있어.’
자연스럽게 그의 입에서 나온 그 단어에 이온은 움찔했다.
겉으로만 보면 드래곤이라는 걸 눈치채기 힘들 텐데 어떻게 알았지? 혹시 손을 잡으면 기억을 읽을 수라도 있는 걸까. 마법으로 그런 것도 가능한가?
머릿속에 동시다발적으로 많은 의문이 떠오른 사이, 방금까지 괴롭힘을 당했던 욤뇽이는 의외로 아장아장 걸어 카밀루스의 팔을 타고 올라가 어깨에 자리를 잡았다.
단숨에 자신을 떠나가 카밀루스의 어깨에서 작은 날개를 파닥거리고 있는 욤뇽이의 행동에 이온이 은근히 서운해하고 있는데, 카밀루스가 등을 제 가슴으로 받쳐 주며 이온의 두 손을 잡아 왔다.
“아…….”
마치 뒤에서 껴안는 듯한 자세였다.
카밀루스의 작은 숨소리와 함께 나직한 음성이 귓가에 닿았다.
“정말 금방이니까, 힘을 빼고 나한테 몸을 맡겨. 할 수 있지?”
마치 아이를 달래는 듯한 다정한 음성이었다. 이온은 저보다 조금 키가 큰 그를 올려다보았다.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파란 눈동자가 제법 침착한 빛을 띠고 있었다. 이온은 그를 보았을 때 떴던 창의 내용을 떠올렸다.
카밀루스 발데라스 클로델, 16세.
‘보통의 16세가 이런 분위기를 낼 수 있는 거야?’
그런 의문과 동시에 ‘너, 열여섯 맞아?’ 하고 묻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았다. 애초에 기억에도 없는 인물의 나이를 알고 있다는 것이 말이 안 되는 데다, 질문 자체도 수상해 보일 게 틀림없으니까.
호기심을 겨우 억누른 이온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 있어.”
“좋아.”
대답이 돌아오자마자 이 저택에 왔을 때처럼 이온의 시야가 눈부신 빛으로 물들었다. 그 강렬함에 질끈 눈을 감은 순간, 머리를 스치는 바람결을 느꼈다.
눈을 다시 뜨자 어느새 바깥이었다. 이온은 이게 어떻게 된 건가 싶어 전방을 살피려다 제 발 바로 앞이 낭떠러지인 걸 확인하고는 흠칫 뒤로 물러났다.
그러다가 카밀루스의 품에 더 깊게 안겨 버려 이내 멈칫했지만.
“아……!”
제 뒤의 몸과 겹쳐지자 순간적으로 밀려오는 따뜻한 체온에 이온이 움찔하면서 어깨를 움츠렸다.
그런데 카밀루스는 오히려 이온의 허리를 팔로 둘러 그를 더 깊은 품으로 끌어들였다. 이온이 제 어깨로 올라오는 그의 손에 당황해 숨을 삼켰다.
“카, 카밀루스?”
앞뒤로 나란히 서 있자니 자세가 심히 민망했다. 그대로 몸이 굳어 버린 이온이 얼굴을 붉히며 말을 더듬자 머리 위에서 살짝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아, 건물 옥상으로 온 것뿐이니까.”
“옥상이라고?”
이온은 그제야 고개를 들더니 눈을 돌려 사위를 살폈다. 카밀루스의 말대로 그들이 있는 곳은 저택의 꼭대기였다. 이온은 겨를이 없어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난간을 보고서야 조금 안심했다.
그렇게 가슴을 진정시키자 그제야 풍광이 눈에 들어왔다.
자작 저의 주변은 수도가 맞긴 한 건지 모를 정도로 주변이 온통 녹음이었다. 숲 같은 곳에 둘러싸여 있어, 그 너머에 도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면 아마 시골구석에 내려온 줄 알았을 터였다.
짹짹, 예쁜 새 소리가 나는 것에 이온이 시선을 돌리자 마침 작은 새들의 무리가 날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공작 저도 경관을 잘 꾸며 두긴 했지만, 이곳의 분위기는 또 달랐다. 마치 동화 속의 풍경처럼 평화로운 느낌이었다.
이온은 나뭇잎 하나가 흔들리는 소리에도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구경하다가, 문득 시선이 느껴져 카밀루스의 얼굴을 힐끗했다.
그러고 소년이 흐뭇해하는 표정으로 웃는 것을 발견하고, 이온은 어색한 마음이 들어 살짝 얼굴을 붉혔다.
“여긴 갑자기 왜 온 거야?”
순간 혹시 경관을 보여 주고 싶어서 왔는가 싶었지만, 그 생각은 곧장 폐기되었다. 뒤에 선 카밀루스의 손이 얼굴 옆에서 나와 어딘가를 가리켰기 때문이다.
“저기 저 탑이 보여, 이온?”
손끝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선을 향하니 그의 말대로 아주 높이 솟아오른 탑이 하나 눈에 들어왔다.
이 세계로 흘러들어 와 어딘가의 풍경을 내려다본 적이 없어 확신할 수 없지만, 도심에서도 중심부에 위치한 것으로 보아 황성 내에 있는 모양이었다.
사실 단지 추측으로만 그곳의 위치를 가늠한 것은 아니었다. 멀리서도 주변에 친 결계의 마법진이 꽤 선명히 보였다. 황궁으로 향할 때, 마차에서 내려 발견했던 그 결계와 같은 모양이었다.
눈앞에 두었을 때 하늘을 찌를 듯이 높게 느껴졌던 탑은, 멀리서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건물들과 비율 자체가 다른 것처럼 거대했다.
대체 몇 층일까? 저곳의 꼭대기까지 올라가려면 시간도 시간이지만 엄청난 기력이 필요할 게 틀림없었다.
그래도 다 오르면 이곳에 서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넓은 세상을 내려다볼 수 있을 터였다. 저주에 걸린 지금의 이온으로서는 저곳에 올라간다는 건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말이다.
생각하다가 이온이 왜인지 숨이 답답해져 손으로 가슴 위쪽을 지그시 누르며 대답했다.
“보여.”
안 보이는 게 더 이상한 상황 아니야? 그런 말을 덧붙이고 싶었지만, 말을 이어 붙여 오는 카밀루스의 목소리에 그는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나는 저기 갇혀 있었어.”
덤덤한 음성이었지만 듣자마자 이온은 몸이 바짝 굳는 걸 느꼈다. 당혹한 기색이 어린 녹안이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