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몰라. 기억이 없으니까.”
고개를 흔들며 이온이 가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그렇지만 정확한 건 이 손을 놓거나 네가 준 마나석을 쥐고 있지 않으면 갑자기 죽어 버릴 수도 있다는 거야.”
터무니없는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을 텐데, 카밀루스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거나 왜 그렇게 된 거냐고 추궁하지 않았다. 대신 이온의 허리를 낚아채듯 끌어안았다.
“앗!”
“이제 내릴 때야.”
그의 말이 흘러나옴과 동시에 욤뇽이가 지상을 향해 하강했다. 몸이 쑥 내려가는 느낌에 덜컥 겁이 나긴 했지만, 그 긴장을 알아차린 것인지 카밀루스가 팔에 힘을 넣었다.
욤뇽이는 마치 무언의 지시라도 받은 듯이 자연스럽게 작은 숲으로 진입하며 천천히 내려앉았다. 그리고 어느 정도 땅과 가까워지자 카밀루스가 이온을 안은 채로 등에서 뛰어내렸다. 이온이 그동안 무서워 잠시 눈을 질끈 감았다.
잠시 후 사각, 하고 가볍게 나뭇잎 밟는 소리가 나 이온은 살며시 눈을 떴다. 어느새 공주님 안기 자세로 카밀루스에게 안겨 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가 화들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키웠다. 발이 허공에 떠 있는 것이 민망해 얼굴이 저절로 발개졌다.
“내, 내려 줄래?”
“응, 조심.”
마치 손안의 다치기 쉬운 작은 강아지를 다루는 것처럼 카밀루스가 조심스럽게 이온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이온은 그제야 제 두 발로 땅을 디뎠지만, 손을 놓자 자연스럽게 마나 공급이 끊겨서인지 순간적인 어지러움에 잠시 비틀거렸다. 카밀루스가 그에 놀라 부축하려는 걸 손을 들어 거절한 이온이 천천히 몸을 추슬렀다.
예상대로 그의 눈앞에 약 올리듯이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상태 이상 ‘충만한 마나’가 해제되었습니다.]
[플레이어의 사망 확률 계산 중…….]
몸에 마나가 돌지 않으니 금세 기운이 빠지면서 탈력감이 찾아왔다. 이온은 예의 마나라는 것이, 이 세계에서 각각의 사람들에겐 어떤 의미인지 정확히는 몰라도 제게 있어서만큼은 생명의 마지막 동아줄임을 절실히 느꼈다.
‘공작 저로 돌아가면 일단 마나의 개념부터 알아봐야겠어.’
[현재 플레이어가 사망할 확률은 26%입니다.]
저 빌어먹을 사망 확률은 어느 것의 도움도 없을 때에는 20퍼센트 미만으로 절대 떨어지지 않았다.
사망 확률이 높아져서인지 다시 숨이 벅차 오기 시작한 이온은 자신의 크라바트 쪽으로 손을 가져가 가슴 위쪽을 살며시 눌렀다. 그런 그를 유심히 관찰하는 카밀루스를 마주 보며 이온이 물었다.
“우리, 여기서 헤어져도 다음에 다시 만날 수 있어?”
그리고 이 질문은 무언가의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눈앞에 글자들이 마구 흐르기 시작했다.
[플레이어가 ‘카밀루스 발데라스 클로델’에게 새로운 제안을 했습니다.]
[이에 따라 퀘스트가 발동합니다.]
플레이어의 자유로운 행동을 보장한다면서 생각보다 기능이 이것저것 많이 숨어 있었다.
카밀루스가 잠시 머뭇거리는 동안 이온은 빠르게 그 문자들을 훑었다.
[카밀루스 발데라스 클로델과의 재회(0/3)]
[카밀루스 발데라스 클로델과 앞으로 3회의 만남을 더 이어 가십시오.
단, 대상자와 1미터 이내의 거리에서 열 문장 이상의 대화를 나누어야 만남으로 간주됩니다.]
[본 퀘스트의 완료 여부는 플레이어의 생존에 영향을 미칩니다.]
멀리서 눈만 마주쳐도 만남으로 간주할까 봐 정의까지 내려 주는 친절이란.
게다가 그간은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라고 영향이 없을 가능성에도 어느 정도 무게를 두었었는데 이번엔 달랐다. 영향을 미친다고 확정하고 있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이 녀석이 핵심이구나.’
시스템이 거의 대놓고 ‘살려면 얘 잡아라—혹은 꼬셔라—.’라고 알려 주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상대는 굳이 적극적으로 꼬실 필요도 없이 홀라당 넘어왔다. 잠시 침묵하던 그가 고개를 살며시 끄덕끄덕했다.
“찾아, 갈게.”
중간에 목이 멘 듯 그가 말허리를 흐렸지만 결국 승낙의 말이었다.
“언제든, 얼마든지 말이야.”
이번엔 이온이 놀랄 차례였다. 덧붙인 말에 이온은 침을 목구멍으로 꿀꺽 넘겼다. 어디로 찾아오겠다는 구체적인 말은 없었지만 이온은 왜인지 안심이 되어 저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거리고 말았다.
“……응.”
그러고 충동적으로 손을 확 내밀었다. 새끼손가락을 세우고서.
“약속, 해 줄 거지?”
뱉어 놓고 이온도 스스로가 오글거려서 소름이 끼쳤다. 뒤늦게 찾아온 어색함 때문에 눈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딱딱하게 굳은 사이 카밀루스도 갑작스러운 약속 제안에 당황했는지 잠깐 멈춰 있었다.
카밀루스는 역시나 어색하게 제 새끼손가락도 내밀었다. 그리고 짧게 호응해 왔다.
“약속.”
곧 작은 손가락 두 개가 굽어지면서 서로 얽혔다. 이온은 왜인지 얼떨떨한 기분이 되어 버렸다.
‘왜…….’
왜 얘랑은 이렇게 간질간질해지지?
제가 먼저 손가락을 내밀었지만 그런 생각이 저절로 들었을 때, 카밀루스의 다른 손에서 작은 빛이 일었다.
빛이 잦아든 순간 카밀루스의 손에는 이온이 아버지에게서 받았던 마나석과 같은 색의 보석이 달린 목걸이가 들려 있었다. 그가 걸었던 손가락을 아쉽게 물리면서도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약속의 증표로 이걸 줄게. 마나석을 계속 쥐어야 하는 건 불편하니까, 목걸이로 걸고 있는 쪽이 더 나을 거야.”
그러고는 직접 제 손으로 이온의 목에 마나석이 박힌 목걸이를 걸어 주었다. 카밀루스의 손이, 체온이 목을 스치자 이온은 긴장했으나 그가 떨어져 나가고 목에 걸린 마나석을 보고는 이내 입꼬리를 조용히 올렸다.
카밀루스가 준 마나석 목걸이는 보석상이 만들어 파는 것과 비견될 만큼 심플하면서도 아름다웠다. 가운데 박힌, 파란빛을 띠는 마나석은 꼭 카밀루스의 짙은 바닷빛 눈동자처럼 푸르렀다.
이온은 괜히 손가락으로 마나석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고마워, 카밀루스.”
“……그리고 이 녀석도 품에서 떼어 놓지 마.”
대꾸하면서 카밀루스가 어느새 작아진 욤뇽이를 이온의 품에 넘겨주었다. 이온은 최소 사이즈로 확 축소되어서 제 팔을 아장아장 기어오르는 욤뇽이와 카밀루스를 번갈아 보면서 떠오른 질문을 던졌다.
“혹시 원래 주인이 너야?”
“반항적인 녀석이긴 하지만.”
카밀루스는 부정하지 않았다. 어쩐지, 카밀루스와 욤뇽이가 서로 익숙해 보인다 했다.
어떤 연유로 이 녀석도 자신에게 넘어왔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원주인보다 이온의 품이 더 좋은 모양이었다. 벌써부터 크라바트 밑으로 쏙 들어가 상의 안쪽으로 파고든 욤뇽이가 끙끙대기 시작했다.
“끄웅, 꾸.”
그에 옷 틈새로 쏙 내민 채 갸웃거리는 작은 머리통을 보며 이온은 검지로 머리 가운데를 살짝살짝 쓰다듬었고, 욤뇽이는 자신이 드래곤이 아닌 아기 고양이라도 되는 양 기분 좋은 듯 입을 벌려 하품을 했다.
‘졸린 모양이야.’
어차피 시간도 길게 끌지 못하는 처지이니 카밀루스와의 이 밀회도 여기까지다. 착지했을 때는 경황이 없어 눈치 못 챘지만 이곳은 공작 저의 후원과 이어지는 작은 숲이었다. 쫓던 이들 중 누군가 그들을 봤다면 조만간 찾으러 나타날 터였다.
이온은 천천히 발을 뒤로 물리며 손을 흔들었다.
“다음에 봐. 데려다줘서 고마워.”
헤어질 때는 너무 오래 끌면 오히려 더 아쉬운 법이라, 작별 인사를 마친 이온은 바로 뒤돌려 했다. 하지만 그 전에 카밀루스가 아쉬움이 가득 담긴 표정과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이온.”
작은 숲에 마침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러자 카밀루스의 얼굴을 살며시 가리고 있던 머리카락이 흩어지면서 그의 하얀 얼굴이 더 많이 드러났다.
자신을 응시하는 침착해 보이는 눈과 무의식중이겠지만 조금 찌푸린 미간은 안 그래도 어딘지 슬퍼 보이는 그의 표정을 더 선명히 보여 주었다.
이온은 그것에 다시금 가슴이 저릿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응?”
“내가 더, 고마워.”
무어가 고맙냐고, 그런 질문은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다. 어차피 적어도 세 번의 만남이 그들에게 남아 있었으니까. 대화를 이어 가야 하는 조건이기에 그런 간단한 물음쯤 못 할 리가 없었다.
이온은 마주 손을 흔들어 주는 그에게 한 번 웃음을 지은 뒤 공작 저의 출입문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나아갔다.
숲에서부터 동쪽에 난 쪽문까지, 채 10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였지만 나약해 빠진 몸은 그 조금 움직였다고 또 헥헥거렸고.
[현재 플레이어가 사망할 확률은 27%입니다.]
충만한 마나 상태가 발동되었음에도, 아직 마나의 기운이 온몸에 완전히 돌지 않은 것인지 사망 확률이 높아졌다.
사용인이 그의 하얘진 안색에 놀라 얼른 문을 열어 주고, 달려 나온 버틀러에게 부축받아 저택에 들었을 때 이온은 다시금 분노한 아버지와 맞닥뜨렸지만 사생아 놈과 또 놀아났느냐는 잔소리를 들을 시간은 없었다.
그 앞에서 코피를 쏟았기 때문이었다. 충만한 마나 상태라도 이미 물리적으로 발현된 증상은 어쩔 수 없는지 한동안 피가 멎지 않아 머리가 다 어질어질할 정도였다.
공작이 놀라 밤중에 급하게 의원을 부르고, 처치를 받은 뒤 잠이 들었을 때쯤엔 머리맡에서 조그마한 욤뇽이가 눈물을 한 바가지 쏟아 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