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기익, 기이이익.
힘겹게 창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얼굴로 햇볕이 비쳐 들었다. 이온은 제 눈꺼풀 위를 비추는 강렬한 빛에 미약한 신음을 흘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자 창문가에서 파닥거리는 욤뇽이가 보였다. 이로 창문 고리를 물고 끙끙거리는 중이었다.
한숨 자고 일어났음에도 개운해지지 않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이온은 이불 안쪽에서 몸을 살며시 돌렸다. 그는 욤뇽이를 향해 손을 내밀며 쉰 목소리를 냈다.
“욤뇽아? 이리 와…….”
“꾸!”
말소리를 들은 욤뇽이가 푸른 빛깔이 도는 비늘로 뒤덮인 작은 날개를 포르르 떨며 날아와 이온의 손 위에 다소곳이 앉았다. 그러고 옷소매를 살짝살짝 잡아당기는 것이었다.
이온은 멍한 눈으로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뒤늦게야 그 의미를 알아차렸다.
“일어나라고?”
“꾸.”
하아.
얕게 한숨마저 나왔지만 욤뇽이의 바람에 따라 비척비척 상체부터 일으켰다. 그러자 걸려 있는 상태 이상 목록이 쭉 나열된 뒤 사망 확률이 계산되어 나왔다.
[현재 플레이어가 사망할 확률은 20%입니다.]
불행히도 어제의 수치에서 그렇게 많이 떨어지지는 않았다. 이온은 목을 간질이는 기운에 가슴을 두어 번 들썩이다가 욤뇽이가 열어 둔 창문 쪽으로 걸어갔다.
채 다 다가가기도 전에 따사로운 햇살과 꽤 시원한 바람이 그의 몸을 감쌌다. 눈을 뜬 이후로 이 정도의 상쾌한 날씨는 처음이었다. 이례적으로 맑은 날이긴 한지 이온의 눈앞에 텍스트가 흘렀다.
[상쾌한 바람의 기운이 몸을 감쌉니다. 플레이어가 사망할 확률이 0.1% 감소합니다.]
정말 쥐꼬리 같은 감소네.
이온은 시스템에게 놀림받는 느낌에 괜스레 화까지 났지만 티 내는 대신 창문틀을 간신히 붙잡고 섰다. 그 잠깐 움직였다고 현기증이 일었으나 숨을 고르고 나서 내려다보니 공작 저의 정원이 한눈에 들어왔다.
선선한 날씨에, 푸르게 우거지기 시작한 나무들, 그리고 매일매일 다듬은 정갈한 잔디.
그 평화로운 광경 한가운데에는 분수가 있었는데, 마침 물이 흐르는 분수의 주변을 신나서 저택의 사용인들과 빙글빙글 돌고 있는 제 동생이 보였다. 아침부터 날이 좋아 들뜨기라도 했는지 저와 같은 밀빛 머리를 휘날리며 까르르 웃는 소리가 이온의 방까지 다 들릴 정도였다.
아이의 천진한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부럽기도 해 이온의 초록빛 눈이 그녀를 잠시 좇을 무렵이었다.
“앗, 오라버니!”
아이가 그제야 오빠의 존재를 발견하더니 치맛자락을 붙잡고 멈췄다. 이온은 그에 기운은 없지만 조용히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에밀리가 활짝 웃으면서 저택으로 뛰어들었다. 뒤에 사용인들이 놀라 쫓아 들어가는 모습이 보이는가 싶더니 곧 제 방 쪽으로 달려오는 작은 발소리가 들려왔다.
똑똑똑똑똑, 똑똑.
아이가 재촉하듯 마구 노크하는 소리가 나자 이온이 얼른 제 잠옷 안쪽에 욤뇽이를 밀어 넣고는 문을 열었다. 그러자마자 에밀리가 와락 안겨 오는 것이었다.
“오빠, 오빠. 이제 안 아파?”
저번에는 제가 정신이 없어 잘 몰랐지만 에밀리는 이온보다도 훨씬 작은 아이였다. 제 가슴까지밖에 올라오지 않는 머리통을 보며 놀란 이온이 얼떨결에 아이를 마주 안아 주며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했다.
“에, 에밀리?”
“어머니가 오라버니 아프다고 어젯밤에도 못 들어오게 했어. 이제 괜찮아? 응?”
에밀리가 까치발을 살짝 올리며 이온을 올려다보았다.
“아…….”
이온은 손수건을 다 적시도록 코피를 쏟았던 것을 기억하면서, 어떤 애정 행위를 바라는 듯한 에밀리에게 가볍게 뺨을 맞댔다.
“이제 안 아프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아니야, 거짓말이야.”
곧바로 부정해 오는 에밀리의 말에 이온은 난처해졌다. 눈을 굴려 에밀리 뒤쪽의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는 사용인들을 겸연쩍게 바라보던 이온이 한마디 덧붙였다.
“잠깐 몸이 안 좋아졌을 뿐이야.”
“그것도 아니야. 제인이 에밀리는 만나면 안 될 정도로 아프다고 했어.”
아직 이 세계에 완전히 익숙해진 건 아닌 터라 고용인들의 이름까지는 외우지 못했다. 그러나 아이의 말하는 투로 미루어 보건대, 아마 제인은 에밀리의 하녀쯤 되리라.
애한테 쓸데없는 말을 다 한다는 생각을 하며 이온이 제 작은 동생을 방으로 들였다.
“이젠 정말 괜찮아. 이렇게 에밀리를 만나고 있잖아.”
에밀리가 방 안을 두리번거리며 이온을 쫓아 종종걸음으로 침대맡까지 걸어왔다. 이온이 먼저 침대에 들어가 앉는 걸 본 에밀리는 익숙한 듯 끙끙대며 기어올라 와 옆에 나란히 앉았다. 이온이 이게 맞나, 반신반의하면서 팔을 옆으로 뻗자 에밀리가 얼른 팔 안쪽에 몸을 기대며 반짝이는 눈으로 이온을 올려다보았다. 그러고 손을 오므리더니 귓가에 속삭였다.
“책 읽어 줄 거야?”
질문하는 모양새가 아주 익숙해 보이는 것을 보니, 이 몸의 주인이었던 이온 크레이거는 평소에 동생과 나란히 앉아 책을 읽어 주는 건실한 오빠였던가 보다.
“…….”
이온은 어쩐지 눈앞의 에밀리가 안쓰러워져 소녀를 품에 더 깊게 안아 주며 말했다.
“지금 방에 책이 없는데 어쩌지?”
그러자 당찬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그럼 같이 서재에 가서 가져와!”
순간 응, 싫은데 하는 말을 토할 뻔한 입을 간신히 단속했다.
* * *
수명이 깎일까 싶어 절대로 움직이고 싶지 않았지만 옷깃을 잡아당기며 채근해 대는 에밀리의 성화에 이온은 결국 긴 복도를 걸어 서재에 들어섰다.
[……사망할 확률은 19.9%입니다.]
다행히 걸어오는 동안 사망 확률이 높아지지는 않았다.
도서관같이 생긴 거대한 서재의 문을 하녀들이 밀어 열었다. 에밀리가 먼저 신나서 자신의 전담 하녀와 함께 안으로 뛰어들었고, 이온도 천천히 발을 들였다.
이곳은 욤뇽이를 만났던 그 어두운 서재였다. 익숙한 곳에 와서 그런지 한동안 품에 잠잠히 있던 욤뇽이가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져, 이온이 녀석의 등으로 추정되는 곳을 옷 위로 쓸며 진정시켰다. 다행히 욤뇽이는 다시 숨을 죽였다.
하녀들은 불을 밝힌 촛대를 들고 따라오며 그들이 책을 고르는 것을 도와주었다. 여느 귀족가의 영애와 마찬가지로 글을 배우지 않은 에밀리의 곁을 따라다니며 책의 제목을 읽어 주는 하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한편, 이온은 누군가의 부축을 받으며 서가를 돌아다녔다.
사실은 금방이라도 그만두고 싶었지만 이온도 이곳에서 나름대로 찾을 것이 있었다.
‘마나…….’
이 세계의 마법을 운용하는 핵심처럼 보이는 마나. 그것에 대한 기본 설명부터 짚어 봐야 했다.
자신에게 □□이 걸었다는 저주는 마나의 영향을 받는 것 같았으니까. 지금도 사망 확률이 획기적으로 낮아지지는 않았지만 카밀루스가 준 목걸이를 걸고 있어서인지 적어도 돌아다닐 정도의 기력은 되찾았다.
‘뭔가 있어.’
그런데 개념조차 모르는 상태라면 앞으로 큰 걸림돌이 될 게 틀림없었다.
눈으로 제목들을 훑던 이온이 문득 제 머리보다 높은 곳에 있는 책 하나를 발견하고 멈춰 섰다. 그러자 따라다니던 어린 하인이 얼른 근처에서 사다리를 가져와 책을 꺼내 주었다.
기초 마나 운용법
그것을 손에 넣자마자 옆에서 다른 하인 하나가 나서서 물어 왔다.
“책을 읽어 드릴까요, 도련님?”
고위 귀족가의 아이들일수록 보통 책을 읽지 않고 듣는다. 책을 읽어 주는 전담 하인이 있기 때문에 굳이 글을 배울 필요도 없었다. 물론 지금 자신은 글을 읽을 줄 알고, 에밀리가 졸랐던 것으로 보아 ‘이온 크레이거’는 문맹이 아닌 모양이지만.
그래도 이온은 예의 하인에게 책을 건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역할을 굳이 뺏을 필요는 없었기에.
“맨 앞에서부터.”
“예, 도련님.”
책 읽는 하인은 목소리를 듣고 뽑는 것인지 발성이 나쁘지 않았다. 제법 듣기 좋은 음성을 배경으로 하여 이온은 천천히 다음 책을 찾았다. 양심상 에밀리에게 읽어 줄 만한 것으로.
‘기초 마나 운용법’이라는 책은 누구 하나 때려 죽일 수 있을 만큼의 두께로도 예상했지만 서두가 아주아주 길었다. 특히나 마나 기초 운용법에 대한 깨달음을 얻은 순간이 언제인지 늘어놓는 지점에서는 너어무나 지루했기 때문에 이온은 ASMR처럼 잘 흘려들을 수 있었다.
그래도 동화책 하나를 성공적으로 꺼낸 순간, 그는 긴 구간을 지나 드디어 제가 원하던 구절을 들을 수 있었다.
“……이러한 마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보유하고 있는 법이며…….”
그 시점에, 이온은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마나가, 누구에게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