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내 마나 수치는 분명히 ‘0’ 아니었나? 이온은 이전에 스테이터스를 확인했을 때, 그 수치들을 보면서 진짜 능력치가 이렇게 거지 같을 수도 있구나 싶었을 정도로 경악했던 기억이 났다.
상태창 출력.
남몰래 입 안에서 그 단어를 굴리자 원하던 창이 나타났다.
[플레이어의 상태 목록을 로드합니다.]
[능력치
ATK(공격력): 0
MP(마나): 0
STR(근력): 1]
[…….]
‘마나가 대체 왜 0이 된 거지?’
이온은 손에 책을 쥔 채 천천히 에밀리를 찾아 나서며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자 역시나 주인의 마음을 알아챈 시스템 메시지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능력치 자세히 보기 모드로 전환합니다.]
[능력치
ATK(공격력): 0(-56)
MP(마나): 0(+15)(-99)
STR(근력): 1(-69)
CON(건강): 1(-32)
WIS(지혜): 64
SPI(정신력): 79
LUK(행운): 56]
숨어 있던 수치들이 그나마 위안이 되어 주긴 했지만, 대체 최댓값이 얼마길래 숫자가 저 모양들인지 모르겠다. 게다가 옆에 마이너스값은 또 뭔가 싶었다.
‘저주 때문인가?’
그 가능성을 떠올리자마자 상태 이상 목록 역시 펼쳐졌다.
[…….]
[상태 이상: 저주. □□가 당신에게 저주를 걸었습니다. ※□□의 사망 시 해제됩니다.]
[상태 이상: 능력 상실…….]
[상태 이상: 병약함…….]
여기까지는 전부 아는 내용이었다. 그다음엔 처음 보는 내용이 펼쳐졌다.
[상태 이상(Hidden): 마나 소실. □□의 저주로 인해 플레이어의 공격력 및 마나가 무조건 0이 됩니다.]
저주 때문에 마나가 봉인되었던 거구나?
때마침 들려오는 소리는 이온이 골골대는 이유에 대해서 정확하게 짚고 있었다.
“……이러한 설명을 보다 보면 마나는 언뜻 필요 없는 것이라고 생각될지 모르나, 이는 몸을 구성하는 필수 에너지와 같은 것이다. 물을 마시지 못하면 사람이 사망에 이르듯이 마나 또한 없거나 운용하지 못할 경우 온몸의 기운이 빠져 운신할 수 없게 될 가능성이 높으며, 심할 경우 사망에 이른다.”
완전히 걸어 다니는 시한폭탄이라는 소리와 다를 바 없었다. 몰랐던 사실은 아니지만 이렇게 사방에서 ‘넌 곧 죽을 거야.’라고 외치고 있으니 기분이 기묘했다. 하필 기억도 없이 흘러들어 온 몸이 이런 처지라니. 마치 형벌이라도 받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대체 전생에 무슨 짓을 했길래.
조금 걸었다고 또 숨이 찬 이온은 한번 큰 숨을 들이켜고는 서재 한편에 있던 책상에 잠시 몸을 기대었다. 그러자마자 때에 맞춰 에밀리가 소리치며 달려왔다.
“오빠, 오빠!”
숨을 고르고 있던 이온이 애써 허리를 바로 세우며 제게 뛰어드는 에밀리를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다정한 주의를 주었다.
“진정, 서재에서는 이렇게 뛰면 먼지가 날려.”
말을 하고 진짜로 목이 간질거려 기침을 토하자 에밀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걱정되는지 이온에게 매달리면서도 씩씩하게 대답해 온다.
“응, 안 뛸 거야! 에밀리는 정숙한 소녀니까!”
“그래, 예쁘다. 책은 다 골랐어?”
에밀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얇은 그림 동화책들을 내밀었다.
“오두막집에 사는 두더지 이야기랬어. 이거는 고슴도치 이야기야.”
“그럼 여기 앉아서 하나 먼저 읽을까?”
사실 아직은 제 방까지 돌아갈 기운이 돌지 않아 한 제안이었지만, 사정을 모르는 에밀리는 자신을 위하는 줄 알고 “진짜?” 하며 얼른 옆의 의자를 나란히 빼서 앉았다.
이온은 소녀의 의자 옆에 제 의자를 붙여 최대한 몸을 가까이했다. 그러자 에밀리는 신나서 책을 읽는 목적을 금세 잊기라도 했는지 떠들기 시작했다.
“있잖아, 있잖아. 오라버니는 귀신 본 적 있어?”
“귀신……?”
“응, 응! 에밀리는 아직 본 적 없는데 여기 서재에 있는 게 분명해. 진짜야.”
뜬금없는 귀신 이야기에 이온은 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옆의 사용인들이 혹시나 에밀리를 이상하게 쳐다보지는 않을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아직 그런 사람은 없긴 했다. 에밀리가 이런 이야기를 다른 이들에게도 했던 걸까?
이온은 일단 에밀리에게 장단을 맞춰 줄 요량으로 물어보았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러자 에밀리가 이온의 귀에 바짝 입을 붙이더니 책상 위를 손끝으로 가리키며 비밀 이야기를 하듯 작게 속살거렸다. 그렇게 이어진 말은 이온을 뜨끔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에밀리가 여기에 쿠키를 남긴 적이 있었는데, 다음 날 와서 보니까 쿠키가 다 사라진 거 있지? 제인이 치우는 거 깜빡했다고 했는데!”
“뭐?”
듣자마자 찔리는 게 있는지 가슴 근처에서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간지러운 촉감 탓에 이온이 그곳을 꾹 누르자 “꾸.” 하고 외마디가 들려왔다. 서재가 조용한 탓에 그 소리가 생각보다 크게 나 당황한 순간 에밀리가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소리쳤다.
“방금 이상한 소리가 났어!”
간이 다 떨리고 눈이 커지려 했지만 이온은 굳어 가는 제 얼굴을 간신히 현상 유지하며 얼른 저도 덩달아 흥분한 척 변명했다.
“창문 근처에 날아온 새인가 봐!”
“꾸 하고 우는 새도 있어?”
에밀리는 말 그대로 질문을 한 것이었다. 그러나 상대하는 이온은 속으로 움찔하고 말았다. 곧 딸꾹질을 할 것처럼 가슴께가 불편해졌다.
“……비둘기?”
“에밀리가 한번 볼래!”
“에밀리, 서재에서 그렇게 뛰면……! 콜록.”
이온은 뛰지 말라고 말하려다가 순간적으로 목에 먼지가 확 들어오는 느낌에 기침을 내뱉었다.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창문가를 향해 도도도 달려가는 에밀리의 뒤를 눈으로 좇으며 속으로 외쳤다.
제발, 지나가던 새 한 마리만 걸려라!
그리고 창문이 열렸을 때.
‘푸드덕!’ 하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검은 그림자 하나가 창문 위로 날아올랐다. 그와 동시에 그 새의 황금빛 눈동자와 이온의 눈이 짧게 마주쳤다.
분명 한낱 동물일 텐데.
깨끗한 눈동자 속의 선명한 검은 동공이 마치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아서, 이온은 긴장으로 온몸이 굳어 버렸다.
‘뭐지, 저건……?’
한순간 잠시 나갔던 넋이 돌아온 것은 에밀리가 뒤로 털썩 엉덩방아를 찧으면서 내지른 소리 때문이었다.
“꺄아아!”
“아가씨!”
그 순간 다들 깜짝 놀라 에밀리에게 몰려들었다.
“에밀리!”
이온 역시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나 달려가려다가 현기증에 비틀거렸다. 곧장 옆에 서 있던 누군가가 붙잡아 주지 않았다면 그도 틀림없이 넘어졌을 것이었다.
“괜찮으십니까, 도련님?”
“아…….”
미처 제 상태를 생각 못 하고 몸부터 나가 버렸다. 이온은 저도 놀라 숨을 크게 들이켰다가 다시 창문 쪽을 보았다.
“방금, 날아간 게 뭐였어? 엄청 컸는데…….”
다행히 에밀리는 잘 속아 넘어간 모양이지만, 생각해 보면 지나가다가 저택에 날아든 새라기엔 너무 커다란 녀석이었다.
눈이 노란색이었으니까…… 매?
그의 질문에 가까이에 있어서 그나마 제대로 봤던 모양인지 창문 쪽에 서 있었던 이가 대신 답했다.
“독수리였습니다, 도련님.”
그러자 동그랗게 눈을 뜨고 방금 새가 날아오른 창문을 바라보던 에밀리가 불쑥 물었다.
“독수리가 꾸우 하고 울어?”
그 한마디에 대서재 안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하녀들이 순수한 어린 공녀가 귀여운지 웃으면서 부축해 아이를 일으켰다. 버틀러들도 그렇지 않다고 하면서 도로 창문을 닫고 이온의 옆으로 안내했다.
그러고 나자 다시 에밀리의 ‘대서재에 있는 귀신’에 대한 에피소드가 이어졌다. 쿠키가 한 번만이 아니라 여러 번 사라졌다는 내용이었다.
말을 듣고 있자니 머릿속에 저절로 쿠키 부스러기를 입가에 묻히고 있던 하얀 드래곤이 떠올랐다.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단 말이지.’
이온은 제 품 안에서 그 말들을 알아듣고 찔리는지 꿈틀거리는 예의 ‘귀신’의 존재를 느끼며 에밀리에게 맞장구를 쳐 주었다. 귀신이 진짜로 있는 것 같다고, 다음에 꼭 찾아내자고.
* * *
단 1시간도 안 되는 동안 잠시 대서재에 다녀왔을 뿐인데 기진맥진해진 이온은 결국 에밀리에게 책은 다음에 읽어 주겠다고, 소녀를 실망시킬 수밖에 없었다.
오라버니를 그만 괴롭히시라고 말하는 하녀들의 손에 이끌려 풀이 푹 죽어서는 방 밖으로 나가는 에밀리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그렇게 좋지는 못했다. 진짜 동생도 아닌데, 왜 이렇게 눈에 밟히는지 모르겠다.
‘남의 몸에 들어온 대가 같은 건가.’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의 마음에 동요하는 것도.
자신이 아픈 것도.
“그럼 도련님, 쉬십시오.”
“……응.”
저녁밥 시중을 들어 주고는 방에 불을 켜 준 버틀러가 마침내 작별을 알렸다. 이온은 자신의 이마에서 떨어지는 버틀러의 주름진 손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문을 닫고 나서야 이온은 침대에 몸을 푹 기대며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그런데 그때 어디선가 톡톡 하고 둔탁한 무언가가 발코니 쪽으로 이어지는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얼마 안 가 이온의 옷 안에 숨어 있던 욤뇽이가 쏙 머리를 내밀었다.
“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