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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병약한 도련님이 되었습니다 (15)화 (15/317)

그의 입에서 승낙의 말이 흘러나오자 카밀루스의 귀 끝이 살며시 빨개졌다. 그가 마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내가 지켜 줄게.”

잠깐 집 뒤에 있는 숲 좀 구경하는 건데 지켜 줄 것까지야.

게다가 미미하게나마 뺨 한쪽에도 홍조가 올라오는 걸 보며 이온은 살며시 웃음이 나올 뻔했다.

그렇지만 정말로 ‘지켜 주기’ 위해서 무언가 할 요량이긴 한지 카밀루스가 문득 발코니 밖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러고는 오른손을 흔들더니 작은 빛 가루들을 만들어 바람에 실어 흩날려 보내는 것이었다.

저택 일원 곳곳으로 날아가 내려앉는 빛 가루들을 보면서 이온이 눈에 의문을 떠올리자 카밀루스가 그의 손을 끌어당기며 주의를 돌렸다.

“주변 사람들을 잠시 잠들게 하는 마법이야.”

실제로 정원을 지나가던 누군가가 하품을 하다가 나무 밑에서 잠드는 것이 보였다.

“위험한 건 아니지?”

“괜찮아. 일어나고 나면 기분도 상쾌해질 테니까. 자, 여기 위로 올라와.”

말하면서 카밀루스가 먼저 발코니의 난간 위로 훌쩍 올라갔다. 하지만 이온은 차마 따가지 못하고 주저했다. 발코니의 난간이 그렇게 높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가슴 높이 정도는 되는지라 올라가다 넘어가면 어쩌나 싶었던 것이다. 그 마음을 알아챈 카밀루스가 안심하라는 듯이 손을 더 단단히 잡으며 몸을 일으켰다.

“내가 있으니 괜찮아. 떨어져도 받아 줄 테니까. 응?”

“아, 알았어.”

용기를 얻은 이온이 심호흡을 하고 그를 따라 난간 위로 올라섰다. 그러자 이온의 발 앞이 파랗게 빛이 나기 시작하더니 곧 공기가 얼어붙은 것처럼 눈꽃이 피어났다.

“와…….”

신비로운 광경에 이온이 탄성을 내뱉자 카밀루스가 뒤에서 그의 허리와 손을 받쳐 주며 귓가에 속삭였다.

“걷는 것처럼 발을 뻗어 봐.”

그 말에 따르자 시스템창이 펼쳐졌다.

[카밀루스 발데라스 클로델의 ‘빙결의 길’ 위에 섰습니다.]

[추락할 확률 0%]

[단, 시전자가 마법을 해제할 시 즉시 추락합니다.]

겨우 눈꽃으로 이루어진 것인데, 생각보다 안전한 길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니 두렵지 않게 되었다. 한 걸음씩 발을 뻗으니 길이 서서히 늘어나기 시작했다.

빙결의 길이라는 이름답게 그 길은 꽤 차가운지 주변으로 하얀 연기가 흘렀다. 그러면서도 투명하고 저택에서 흘러나오는 빛과 자체적으로 흘러나오는 푸른빛이 만나 신비로운 색채를 띠었다.

방금 전까지 약간 졸음이 배어 있던 이온의 초록빛 눈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보고 있으니 저절로 기분이 좋아지고 웃음이 지어졌다.

왠지 가슴에 가득 차오르는 어떤 감개에 이온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예뻐.”

이온이 기뻐하는 것 같아 보이자 카밀루스 역시 활짝 미소 지으며 물었다.

“내가 마나를 더 넣어 주면 달릴 수도 있을까?”

“무리하는 거 아니…… 앗!”

이온이 뭐라고 반박하는 말을 채 다 끝내기도 전에 카밀루스가 이온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럼 이렇게 안아 줘도 돼? 내가 네 발이 되어 줘도?”

“이미 했잖아……?”

“응. 미안해.”

멋대로 굴어서 미안하다는 말과 달리 그는 생글거리며 빠르게 걸었다. 이온은 왜인지 안겨 있는 게 민망한 한편, 그가 너무 즐거워하는 게 눈에 보여서 무어라 꿍얼거리지도 못한 채 시선을 딴 데로 돌렸다.

자신의 방 발코니에서부터 걸어온 길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주변의 사람들이 잠들어 있다고는 해도, 저택에 있는 모든 이가 그러지는 않았을 테니 이온은 아무래도 불안해졌다.

“길을 너무 길게 이어 두는 거 아니야? 누가 멀리서 보기라도 하면 어떡해?”

“그래 봤자 크레이거 공작이 날 잡으러 오기밖에 더 할까?”

여유가 밴 카밀루스의 말에 이온이 푹 웃었다. 그의 말이 맞았다. 들킨다 해도 죽이러 오는 것도 아닐 테니.

이온은 이 상황이 어색하면서도, 그가 안아 주는 것이 왜인지 좋아서…….

그래서 살며시 고개를 기대었다. 그러자 잠시 걸음을 멈칫했던 카밀루스가 이온을 더 꽉 안았다.

이온의 귀에 닿은 가슴에서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렸다. 카밀루스의 얼굴은 언뜻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데, 심장은 세게 쿵쾅거리고 있었다.

이온이 그에 저도 모르게 자꾸만 힐끗힐끗하자 카밀루스가 그때마다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부끄러워하는지 검은 머리칼 사이로 살며시 보이는 귀끝이 붉어지는 게 꽤 귀여웠다. 그 와중에 이온에게 집중하는 파란색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그 눈이, 이온은 바다처럼 예쁘다는 생각을 하며 물었다.

“왜 계속 웃어?”

“……으응? 웃지 말까?”

반사적으로 대꾸해 놓고 자기가 말실수를 했다는 것을 아는지 카밀루스는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 눈을 꽉 감으며 고개를 숙였다.

“미안, 너랑 같이 있으니까 그냥 너무 좋아서…….”

화르륵 불타올라 버린 얼굴을 가리지도 못한 채 카밀루스가 말끝을 흐리자, 이온이 녀석의 목을 안으며 속삭였다.

“진짜 나 엄청 좋아하는구나?”

질문에 카밀루스가 당연한 것 아니냐고 말하는 듯한 눈빛으로 이온은 바라보았다.

“응, 소중하니까.”

카밀루스의 목소리가 살짝 떨리고 있었다. 이온은 금세라도 또 울 것 같은 그의 눈을 보면서 더는 자극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꼬맹이 주제에 왜 이렇게 애절한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이온 크레이거는 그에게 아주 좋은 아이였던 모양이었다.

흘러들어 온 몸의 주인이 그리 성격 나쁜 애는 아니라 다행이었다.

어느새 길이 숲까지 이어지고, 안쪽으로 들어가게 되자 카밀루스가 이온을 안은 채로 길 위에서 뛰어내렸다. 그와 동시에 숲 안이 조금씩 환해지기 시작했다. 카밀루스가 마법으로 빛 구슬을 띄운 것이었다.

그들이 걸어가는 길을 따라 색색의 구슬들이 빛을 발하기 시작하자 그야말로 별세계에 온 듯 환상적인 광경이 펼쳐졌다. 붉은색, 노란색, 초록색 등 제각각의 색이 합쳐져 숲에 신비함을 더해 주니 눈 둘 곳이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에 이온이 카밀루스의 품에서 벗어나 천천히 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왜인지 두 팔 가득 별이 쏟아지는 것 같은 느낌에 이온의 발은 저절로 깊은 숲 안쪽까지 향했다.

그리고 그의 발길을 따라서 카밀루스가 뒤쫓아가며 계속해서 앞길을 밝혀 주었다. 이온만을 위한 그의 마술 쇼에 이온이 입을 벌리고 구경하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카밀루스는 이온이 기뻐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듯 내내 한 걸음 뒤에서 바라보고만 있었다.

“왜, 나한테 이런 걸 해 주는 거야?”

아무리 마나가 넘쳐나도 마법을 이렇게 펑펑 쓰는 건 낭비인 데다가 번거로운 일일 터였다. 그럼에도 카밀루스는 그의 옆에 붙어 손을 잡아 주며 상냥한 대답을 내놓았다.

“너도 나한테 이런 걸 해 줬었으니까.”

“내가? 설마 나도 마법을 쓸 줄 알았다는 소리야?”

마나 소실 상태에 빠졌으니 이전에는 마나가 있었다는 소리일 터였다. 그래도 책에서 보면 마나의 양과 실제로 마법을 쓰는 건 다른 문제라고 했었는데…….

카밀루스는 호기심에 묻는 이온을 빤히 바라보다가 대답을 내놓았다.

“이온, 넌 탑 안에 갇혀 있는 나한테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가르쳐 줬었어. 그래서 난, 나는…….”

어째선지 뒷말을 쉬이 잇지 못하는 것에, 이온이 고개를 기울였다.

“카밀루스?”

결국 잠시 말허리를 끊었던 카밀루스가 숨을 크게 들이켜고는 마음을 가라앉히더니 이야기를 이어 갔다. 그의 시선이 숲 밖에서 빛을 내리고 있는 달을 향했다.

“그래서 나는 매일매일 바깥을 꿈꿀 수 있게 되었어. 그 전까지는 나한텐 그 탑 안의 어둠이, 잠깐씩 새어들어 오는 작은 빛이 세상의 전부였는데.”

“…….”

이온은 왠지 그의 말에 대답을 덧붙이기가 쉽지 않아 입을 지그시 다물고만 있었다.

그렇지만 속에서는 여러 질문거리가 튀어나오려고 했다.

대체 널 가둔 사람은 누구야?

왜 갇혀 있었던 거야?

힘이 있으면서 왜 바깥으로 나오지 않았어?

질문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상처가 될까 묻지 못하는 것들이었다. 게다가 갇혀 있었던 와중에 보았던 아름다운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지금은 더더욱.

“넌 나한테 그런 기적을 보여 줬었지. 그러니까 이온.”

카밀루스는 시선을 내려 다시 이온과 눈길을 맞추었다.

“너 또한 나의 기적이야.”

“카밀루스…….”

이온이 굳어 있는 사이, 카밀루스가 그의 두 손목을 잡고 끌어당겼다. 그리고 이온의 시야에 숲을 밝힌 빛 아래로 보이는 단정한 그의 얼굴이 가득 찼다. 얼굴이 가까워진 것이었다.

이내 이온의 입술 위로 말랑한 것이 살짝 닿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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