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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병약한 도련님이 되었습니다 (16)화 (16/317)

“……!”

예상치 못한 일에 놀란 이온이 숨을 멈추고 저도 모르게 뒷걸음을 쳤다. 입술이 떨어진 뒤의 그는 얼굴이 새빨개져 있었다.

당혹감에 카밀루스의 손을 뿌리치다시피 하며 얼굴을 가리자, 카밀루스도 한 걸음 물러났다. 그 역시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그동안 이온의 초록빛 눈이 동요를 감추지 못하고 떨렸다.

그 눈빛을 본 카밀루스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는 이온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얼굴을 가리며 큰 숨을 들이쉬었다.

침묵으로 인해 몰려온 숲의 적막함이 두 사람을 지그시 압박할 무렵, 카밀루스가 마침내 입을 열어 중얼거렸다.

“그, 놀라게 해서, 미안해.”

“…….”

이런 상황에서 괜찮다는 말이, 과연 어울릴까?

이온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가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왜 이상하게 가슴이 세차게,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쿵쿵 뛰어 버리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자신은 분명히 카밀루스와 알던, 그를 구원한 그 이온 크레이거가 아니다. 그런데 왜…… 이미 오래 알고 지낸 사람처럼 그에게서 어떤 거부감도 들지 않는 것인지.

이어지는 복잡한 생각들에 이온이 좀처럼 반응하지 못하고 있자, 카밀루스가 더욱 곤란해하는 얼굴로 다가와 손목을 잡았다.

“저기, 이온, 이건.”

그리고 무언가 변명을 입에 올리려고 했을 때였다. 주변이 소란스러워지는가 싶더니, 누군가 낙엽을 밟는 소리가 들렸다. 인기척이었다.

그에 카밀루스가 먼저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틀었다. 이온을 찾으러 온 누군가가 둘을 발견하고 소리쳤다.

“저기인 것 같습니다, 공작님!”

“당장 안내해라!”

“……!”

망했다.

화가 잔뜩 난 듯한 아버지의 목소리에 깜짝 놀란 이온이 무작정 카밀루스의 팔을 끌어당겼다.

그러나 이온은 나무 뒤에 숨고 나서야 주변이 너무 밝아 방금 전의 행동이 소용없었음을 깨달았다.

결국 그는 카밀루스의 등을 떠밀 수밖에 없었다.

“가, 뒤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하지만 그러면…….”

남은 이온이 혼자 곤란해할까 봐 그런 건지 카밀루스가 선뜻 움직이지 못하는 사이, 인기척이 더 가까워졌다. 이온은 한숨을 크게 내쉬고는 주저하는 카밀루스를 채근했다.

“어서 가!”

그래도 카밀루스는 선뜻 이온에게서 멀어지지 못했다.

이런 답답이 같으니.

이온은 그의 등을 더 세게 두드리며 달래는 듯한 어투로 말했다.

“다음에 또 오면 되잖아, 그렇지? 혹시 못 올 이유가 있어?”

이온의 말에 카밀루스는 고민하는 듯하다가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그 와중에도 이온의 곁에서 완전히 멀어지진 못했지만.

“그렇지만 이 저주…….”

“저주에 대한 얘기도 다음에 할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 일단 가. 이러다 나도 혼난다고. 안 그래도 너랑 엮였다고 자꾸 뭐라고 하는데.”

이온이 하는 말의 행간에서 무얼 느꼈는지는 모르겠지만, 카밀루스가 불쑥 질문을 던졌다.

“설마 공작이 때려?”

순간 이온의 머릿속에 따귀를 날렸던 제 아비의 매서운 손길이 떠올랐다. 생각만으로도 뺨이 다 화끈거리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이온은 서둘러 말을 돌렸다.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야.”

아버지와 공작가 기사들의 발소리가 더 지척에서 들려왔다. 이온은 몰래 주변을 살피면서 낮은 목소리를 내었다.

“난 아픈 척하면 되니까 빨리 가.”

“아픈 척이 아니잖아.”

자꾸만 트집을 잡는 카밀루스를 향해 이온이 눈을 치켜떴다.

“아, 알았어.”

그제야 카밀루스가 모습을 감췄다. 숲길을 밝히던 빛 구슬도 하나씩 사라져 어둠이 찾아들었다.

그래도 남은 빛이 잘게 부서져 가랑비처럼 내려왔다. 이온은 카밀루스가 남기고 간 그 빛 가루를 만지려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가 돌연 숨이 막혀 와 가슴을 움켜쥐었다.

“흡!”

경고하듯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플레이어의 주위를 떠도는 마나의 흐름이 불안정해집니다.]

가슴께를 마치 무언가가 옥죄는 듯했다. 심한 고통에 이온이 신음을 내뱉자, 그 소리를 들었는지 공작이 큰 소리로 외쳤다.

“이온, 소공작은 어디 있는 게야!”

어째 날이 갈수록 증세가 점점 심해지는 것 같았다. 이대로 계속 숨어 있다가는 정신을 잃겠다 싶어 이온은 가슴을 부여잡으며 밖으로 걸어 나갔다.

“여기, 여기예요.”

카밀루스의 말대로 결국 연기가 아니게 되었다. 이온이 비틀거리며 나가자 그를 발견한 누군가가 달려와 몸을 붙들었다.

“도련님, 도련님!”

정신이 없어서 누군지 구분할 수조차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드물게 동요하는 듯한 크레이거 공작의 긴장한 목소리가 또렷이 귓가를 질러왔다.

“이온!”

누군가의 품에 힘없이 쓰러진 이온을 그는 진심으로 걱정하는 표정으로 내려다보며 얼굴을 매만졌다. 제 열 오른 볼에 닿은 커다란 손이 떨리는 것을 느끼며 이온은 그간 나쁘게만 봤던 공작에 대한 평가를 조금 수정했다. 아들에게 정이 있긴 있는 사람이구나, 하고.

“바람도 찬데 대체 왜 이런 데 나와 있는 거냐!”

겉으론 혼내는 목소리였지만, 내용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이온은 앓는 소리를 내며 입을 열었다.

“죄, 죄송해요.”

그런 이온의 모습을 멀리 나무 위에서 커다란 독수리가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언제 따라왔는지, 욤뇽이도 근처의 나무 뒤에 몰래 숨어 눈물을 글썽이는 중이었다.

크레이거 공작은 안색이 점점 안 좋아지는 이온을 보다가 제가 직접 안아 들었다. 그러면서도 잔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설마 그 사생아 놈이 온 게야? 주변 꼴을 보니 그런 게 틀림없구나.”

“아버지…….”

쯧, 하고 작게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찾았으니 돌아가지.”

이온은 눈을 감았다. 공작이 걸음을 옮기면서 몸이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발작처럼 찾아온 가슴의 통증이 이번에는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그런 아들을 초조하게 내려다보던 크레이거 공작이 주변의 누군가에게 벌컥 화를 냈다.

“도대체 소공작의 이 병을 고칠 수 있는 의원은 아무도 없는 것이냐!”

그러자 뒤를 졸졸 쫓아오던 이가 잔뜩 경직된 목소리로 보고해 왔다.

“도련님의 병은 병증도 병증이지만 마법에 의한 것이기도 해서…… 치료가 어렵다고 합니다, 각하.”

“그럼 점점 증세가 심해지는데 이대로 보고만 있으라고? 찾아라. 어디를 뒤져서라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찾으란 말이다!”

공작의 질책에 이번엔 다른 사람이 대답했다. 목소리는 극히 공손했고, 또한 조심스러웠다.

“하면 각하, 역시 마탑주를…… 부르시는 게.”

마탑주……?

그 단어가 나온 순간 씩씩대던 크레이거 공작이 숨소리를 죽였다. 이후 숲을 빠져나가는 여러 개의 발소리만 한동안 울렸다. 아무래도 공작이 고심을 거듭하는 듯했다.

그리고 한참 만에야 나온 공작의 답은 기각이었다.

“그자는 신뢰할 수 없다.”

성큼성큼 걸어가는 공작의 걸음걸이에 신경질이 잔뜩 묻어났다.

곧 공작가 저택의 거대한 문이 여닫혔다.

* * *

황제가 내린 황궁 통행 패를 내밀어 보이자 천천히 궁문이 열렸다. 깊은 어둠을 달이 호령하는 늦은 저녁, 카밀루스는 묵직한 문 사이를 통과해 황궁을 가로질러 걸었다.

방금 전 이온과 함께 있을 때의 다정하고 따뜻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얼굴은 한없이 무표정하기만 했다. 언뜻 보면 얼어붙은 듯 차가워 보이기도 하였고.

그런 그가 거침없는 발걸음을 황제가 기거하고 있을 태양궁을 향해 옮기는데, 누군가 길 가운데에서 그의 앞길을 막았다. 검은 그림자가 제 발 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얼굴을 확인하지 않아도 누군지 충분히 짐작할 만했다. 하여 말없이 옆을 지나가려고 하는데, 그런 카밀루스의 앞을 다시 막으며 상대가 욕설을 내뱉었다.

“또 본다? 사생아 새끼.”

“…….”

카밀루스가 상대방을 똑바로 확인했다. 예상대로 그의 앞에 선 자는 오브라이언 제국의 황태자인 버니언이었다.

카밀루스가 인사도, 대꾸도 하지 않고 조용히 바라보고만 있자 버니언이 픽 웃더니 그의 옆으로 와 빈정거렸다.

“아니다, 자작이라고 불러 줄까? 어쨌든, 궁문 밖에 네 거처가 있는데 왜 자꾸 황궁 안에 나타나는 거야?”

대답할 수밖에 없는 질문이 던져지자 그제야 카밀루스가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폐하를 뵈러 왔습니다.”

“왜, 이 야밤에라도 네가 만나 뵙고 싶다 하면 만나 주신대?”

“예, 아마도요.”

당당하게 내뱉어진 카밀루스의 대답에 버니언이 눈썹을 꿈틀했다. 카밀루스는 제가 한 마디 한 마디 더할 때마다 그의 얼굴에 더 고약한 심보가 올라올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말을 멈추지 않았다.

“대신 폐하께서 필요로 하실 땐 저 역시 언제든 오기로 약조했습니다. 그 증거가 이 통행 패…….”

카밀루스가 품에서 궁문을 통과할 때 보였던 패를 꺼내 눈앞에 보이자 기어이 버니언이 폭발했다.

“이 재수 없는 새끼가!”

퍼억, 하고 주먹으로 얼굴을 치는 둔탁한 소리가 궁정에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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