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러운 폭력이었지만, 버니언의 이런 모습을 처음 보는 것도 아닌지라 그 주위에 있던 황태자궁의 시종이나 기사들은 움쩍도 안 했다.
카밀루스 역시 익숙하다는 듯이 이를 받아들였다. 그의 주먹질에 머리가 아파 몸을 비틀거리자, 그 틈을 타 버니언이 다시 발로 그의 몸을 차 넘어뜨렸다. 쓰러져 털썩, 하고 돌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지만 카밀루스는 이어지는 발길질 역시 아무런 저항이나, 그만하라는 말조차 없이 묵묵히 받아 냈다. 그러자 버니언의 폭력은 더 무차별적으로 이루어졌다.
“너는, 씨발, 천것 주제에, 괴물 주제에…… 기고만장해서는!”
말하는 동안 더 흥분한 버니언이 이번엔 배를 향해 발을 뻗었다. 배를 가격당한 순간에는 카밀루스도 숨을 크게 들이켰으나 역시 신음 한 마디 내지 않았다. 그에 더 화가 난 버니언이 이익, 하고 오기 어린 노성을 뱉으며 다음을 준비할 때였다.
“그만하거라.”
중후한 목소리가 두 사람 사이를 갈랐다. 그에 얼어붙은 듯 굳어 버린 버니언이 소리가 들린 곳을 돌아보았다.
그들 앞에 나타난 이는 수많은 호위와 시종들을 이끌고 나타난 중년의 사내였다.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버니언은 눈을 크게 뜨고 얼른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는 다름 아닌 오브라이언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신분인, 이 나라의 황제였다. 비록 저녁에 산책을 나온 참이라 그 옷차림은 가벼웠지만, 몸에 밴 기품이나 영명해 보이는 눈빛은 여전했다.
그런 황제를 앞에 두고 카밀루스가 입가에 희미한 웃음기를 띠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곁눈으로 확인한 버니언이 신음처럼 말소리를 흘렸다.
“너, 일부러…….”
하지만 문장이 채 완성되기 전에 카밀루스가 몸을 바로 하고 황제 앞에 먼저 예를 올렸다.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먼저 흘러나온 카밀루스의 공손한 인사말에 당황한 버니언이 뒤늦게야 긴장한 채 고개를 숙였다.
“제,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오래간만에 시간이 나 산책을 하고 있었는데 주변이 시끄럽구나.”
누가 봐도 확실히 버니언을 꾸짖는 말이었다. 그에 버니언이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떨궜으나 그의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어쩌면 두려움 때문일지도 모르고, 분노 때문일지도 몰랐다.
카밀루스는 그런 모습을 알아차리고는 얼른 제가 나섰다.
“죄송합니다, 폐하. 제가 태자 전하의 심기를 거슬렀습니다.”
아마 상대로서는 자신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짜증이 날 테니 영 틀린 말도 아니었다.
카밀루스가 먼저 잘못했다고 말하니 황제 또한 더는 문제 삼지 않고, 황태자를 돌아보며 화제를 넘겼다.
“황태자는 밤이 늦었으니 어서 돌아가서 쉬거라.”
“……알겠습니다.”
황제의 명령을 차마 거부할 수 없었던 버니언은 순순히 일어섰다. 대신 분함은 못 이기겠는지 카밀루스를 한번 노려보고는 길을 떠났다.
그 발소리가 멀어져 들리지 않게 될 때까지 기다린 카밀루스는, 황제가 고개를 까딱한 뒤에야 무릎 꿇고 있던 몸을 폈다.
황제는 뒷짐을 지더니 말없이 다시 궁정을 걷기 시작했다. 카밀루스는 만나면 쏟아 낼 용건이 있었으나, 법도에 따라 한 걸음 뒤에서 따라가며 황제가 먼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조금 쌀쌀한 바람이 그들 사이를 스칠 만큼 꽤 긴 시간이 흘렀다. 황제는 정원을 한 바퀴 돈 뒤에야 말문을 떼었다.
“무슨 일로 왔더냐.”
카밀루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얼마 전에 하문하신 것에 대한 답을 드리기 위해서 왔습니다.”
“네 결론은.”
카밀루스가 고개를 조금 숙이며 숙고한 끝에 내린 결론을 입에 올렸다.
“저는, 북부로 가고 싶지 않습니다. 황도에 남겠어요.”
얼마 전 황제는 카밀루스에게 북부행을 권했다. 더 이상 누구의 눈에도 띄지 말고, 조용히 살라며. 그렇게 하면 더는 불행은 없을 거라고.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리고 듣고 나서 수일간은 카밀루스도 자신이 북부로 떠나는 것이 맞는다고 생각했다. 그곳에서 죽은 사람처럼 조용히 살아가는 것만이 제가 평온함을 찾을 방법이라고 여겼다.
“카밀루스, 말했듯이 이곳에 있으면 넌 분란의 씨앗일 뿐이다.”
부황의 시각과 제 마음이 일치했기 때문이었다.
카밀루스는 황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일단은.
“제가 원하지 않아도 말입니다.”
“그래, 네가 원하지 않아도. 내 말뜻이 그것이다.”
그렇지만 카밀루스가 도달한 결론은 그와 다른 것이었다.
“하지만 그건 제가 나빠서가 아니지 않습니까.”
한마디에 담긴 강한 부정에 황제는 움쩍도 하지 않을 것 같았던 미간을 좁혔다. 카밀루스는 제 말이 그의 심기를 흐트러뜨렸음을 알았으나 결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이제는, 그와 같은 뜻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야만 했다.
“왜 항상 갇히는 건 제가 되어야 합니까. 잘못된 건, 잘못하는 건 제가 아니라 저를 이용하려는 자들인데. 그것도 제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요.”
“아이야, 네가 지닌 힘은 너무나 강대하다. 나중에는 너조차도 휘둘리게 될 거야. 그걸 원하는 것이냐?”
카밀루스가 한 걸음 앞서서 걷는 제 아비의 등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 그 말은 아마 그 자신에게도 해당하는 것일 터였다. 그동안 카밀루스를 가장 경계하고, 억압해 온 자는 다름 아닌 제 아비였으니까.
그런 것을 생각하면 원망이 올라올 법도 했지만 카밀루스는 지금까지 그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은 없었다.
그러니 이것은 최초의 반항이나 마찬가지였다.
“……저는, 제가 바라는 건 권력이 아닙니다. 이런 강대한 힘도 저는 원해서 얻은 게 아니에요.”
한데 그 순간, 황제가 걸음을 멈추고 궁정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큰소리를 내었다.
“바로 그게 위험한 것이다!”
기세에 놀란 카밀루스가 흠칫했다. 그의 아비는 제 쪽으로 휙 돌아서서 손끝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계속해서 소리쳤다.
“너는 그 힘의 의미를 몰라. 본래 어린아이에게 쥐어진 칼이 더 무서운 것이다! 어디로 휘둘러질지 모르는 것이니까!”
카밀루스는 이를 악물었다. 단 한 번도 기회가 제대로 오지 않아 제 아비에게 해 보지 않았던 말들이었지만 오늘은 전부 다 할 예정이었다.
“그래서 폐하께선 저를 가둬 두신 겁니까? 당신께서도 절 이용하게 될까 봐요?”
“카밀루스.”
“하지만 그게 저의 삶을 빼앗을 정당한 이유는 아니었을 겁니다.”
황제의 얼굴이 불쾌함으로 일그러져 갔다. 감히 모두가 보는 앞에서 제게 말대꾸를 하는 카밀루스의 행동이 무례하기 그지없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는 애써 흥분을 가라앉히며 다시 평상의 목소리로 돌아와 카밀루스를 불렀다. 그 나름의 친근한 호칭으로.
“아이야.”
카밀루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게, 그렇게 부르지 마십시오.”
그러나 황제는 아직은 저보다 키가 작은 카밀루스를 내려다보며 두 손으로 아이의 얼굴을 감쌌다. 그렇게 시선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하고, 마치 암시를 걸듯이 제 생각을 주입했다.
“하지만 너는 그렇게 태어났다.”
지금껏 수십 번, 아니 수백 번을 들어 왔지만 오늘따라 그의 가슴을 더 아프게 찌르는 한마디였다.
카밀루스는 제 얼굴이 섞여 있는 아비를 올려다보았다. 자신과 똑같은 파란 눈동자가, 그 눈빛에 담긴 혐오와 경멸의 빛이 자신을 거세게 압박하고 있었지만 카밀루스는 이번엔 굴복하지 않았다. 그는 재차 의문을 던졌다.
“그게, 저의 죄입니까?”
“네 삶이 지닌 너의 업보이지.”
다시 돌아온 단호한 대답.
카밀루스는 그의 안에 내려진 확고부동한 신념을 깰 수 없었다. 그에 입을 일자로 다물고 있자, 그것을 제 뜻에 따르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황제가 얼굴에서 두 손을 뗐다.
도로 아들에게 등을 보인 그가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가며 명을 내렸다.
“그러니 북부로 가거라.”
“가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황제가 코웃음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고개를 살짝 돌려 카밀루스를 힐끗했다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양 말했다.
“이온 크레이거, 그 아이 때문이겠지. 많이 아프다고는 들었다만.”
답이야 정해져 있는 것이지만 카밀루스는 잠시 머뭇거렸다. 이온의 이름이 화제에 오르는 것이 내키지는 않았던 것이었다.
그러나 북부행이 싫은 이유는 역시 황제가 지적한 바가 맞았으므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황제의 앞이라고 해서 애써 그 마음을 부정하고 싶지도 않았다.
“……네.”
그리 대답하자 황제의 입가에 비웃음 같은 것이 걸렸다. 카밀루스는 그 기색을 알아차렸으나 충분히 예상했던 범위라 섣불리 발끈하지는 않았다.
대신 제멋대로 불편한 주제를 이만 끝냈다. 북부행을 거부하겠다는 제 마지막 뜻을 밝히는 것이었다.
그렇게 돌린 화제는 황제로서는 좀 더 불편한 이야기였다.
“그러고 보니 이온에게, 아니 크레이거 공작가의 영식에게 저주가 걸렸습니다. 그런데 도무지 풀리지 않아요. 혹시 폐하께서 아시는 바가 있으십니까?”
거의 추궁하는 말투에 가까웠다. 황제는 안 그래도 크레이거 공작가의 후계가 어찌 될지 불투명하다는 이야기에 잔뜩 신경이 곤두서 있던 터라 카밀루스의 이 말이 몹시도 거슬렸다.
“아니면.”
그런데 카밀루스는 예의 ‘추궁’을 멈추지 않았다.
“폐하께서 거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