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뱉어진 질문을 끝으로 정적이 일었다. 가장 먼저 반응한 건 황제 옆의 기사였다. 그가 카밀루스의 무례에 참지 못하고 칼을 뽑으려 하는데, 황제가 손을 들어 막았다.
황제는 카밀루스의 질문이 영 어처구니가 없다는 반응이었다.
“카밀루스, 천재라는 네가 못 푸는 저주를 내가 어찌 걸었겠느냐? 모르는 일이다.”
카밀루스는 그 말의 진위를 가늠하는 것처럼 아비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황제가 가능성을 단호히 배격했으나 실제로는 그렇게 황당무계한 추측도 아니었다. 오브라이언의 현 황제는 부드러운 겉보기와는 달리 어렸을 때부터 벌어진 수많은 정쟁을 이겨 내고 황위를 차지했다. 황위에 올라선 다음부터는 시시때때로 두각을 드러내는 권력자들을 적극적인 견제를 통해 제가 원하는 대로 휘둘러 온 이였다.
그리고 크레이거 공작은 현재 제국 내에서 제일가는 권세가로 불리는 이다. 그런 그가 황제의 눈에 거슬리지 않을 리 없었다.
카밀루스는 그의 속내가 무엇일까 가늠해 보면서 천천히 말소리를 내었다.
“아니시라니 정말 다행입니다. 영식에게 저주를 건 자를 찾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죽이려고 했으니.”
어린아이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살벌한 예기가 담긴 말이었다. 황제는 아까부터 제 안을 자극하던 위화감의 실체를 더욱 선명하게 느꼈으나 무덤덤하게 반응했다.
“그러하냐.”
더는 할 이야기도, 들을 이야기도 남지 않은 카밀루스는 그만 그의 옆에 섰다. 황제가 뒷짐을 진 채로 바라보고 있으니, 카밀루스가 깎듯이 허리를 숙였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저의 용건은 끝났으니까요.”
황제는 제 어린 아들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다가 한 박자 늦게 허락을 내렸다.
“돌아가거라.”
그 즉시 카밀루스는 미련 두지 않고 몸을 돌렸다. 마법을 이용해 바로 황궁 밖으로 나가 볼까 싶었으나, 결계의 억지력으로 인해서 그의 마법은 발동되려다 말고 사라져 버렸다.
‘아직인가…….’
이전에 주문을 외워 마법진을 그렸을 때는 가능했었는데, 순수 마나 운용으로만 발동하는 것은 무리인 모양이었다.
제대로 힘이 올라오지 않는 것을 느끼며 카밀루스는 문득 위를 올려다보았다.
황궁 전체를 감싸고 있는 결계.
현존하는 가장 강한 마법사라 불리는 마탑주가 걸어 놓은 그 결계의 마법진을.
* * *
카밀루스가 물러나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황제는 이내 발을 돌려 태양궁으로 향했다. 걸어가는 그의 얼굴에는 깊은 근심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렇게 굳은 표정으로 카밀루스와 나누었던 대화를 곱씹은 그는 더욱 심각한 표정이 되어 갔다.
‘아무래도 심상치 않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카밀루스를 아주 고분고분한 아이라고 판단했었다. 그런데 조금 전의 대화로 인해 그 생각을 완전히 철회해야 할 성싶었다.
황제가 옆의 기사를 손짓해 곁으로 오게 했다. 성큼 다가온 상대가 명을 기다린다는 의미로 고개를 숙이자 그의 무거운 입이 천천히 열렸다.
“황태자를 다시 불러오거라.”
“예, 폐하.”
황제는 그런 뒤 잰걸음으로 태양궁 안으로 들어섰다.
황태자인 버니언이 오기 전에 잘 준비를 마치기 위해 그는 집무실 대신 침실로 들어갔다. 곧 누군가의 마법으로 만든 등불이 켜지고, 불탈 염려가 없는 빛이 방 안을 은은하게 밝혔다.
그 가운데에서 황제는 시종들의 시중을 받으며 옷을 벗고 가벼운 잠옷 차림으로 바꿔 입었다.
그러고 캐노피가 길게 늘어진 침대에 걸터앉아 버니언을 불러와 무슨 말을 어떻게 할지 속으로 가다듬고 있는데, 방문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허락의 말이 떨어지고 얼마 안 가 버니언이 황제의 침실에 들어섰다. 그는 금세 닫힌 문 앞에 멈춰 그곳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부르셨습니까.”
황제는 멀리 떨어져 있는 제 아들을 말없이 손짓해 가까이 불렀다. 상대가 평소 엄격한 아버지인 탓에 잔뜩 긴장한 버니언은 침을 꿀꺽 삼키며 그의 지척으로 다가갔다.
이번엔 두 무릎을 꿇었다. 그러고 무릎 위에 손을 올려 둔 순간, 무겁기만 한 줄 알았던 황제의 입이 열렸다.
“버니언.”
“말씀하십시오.”
황제의 개인적인 공간이라 할 수 있는 침실인 데다, 사적으로는 아비와 아들인데도 황제의 목소리는 그다지 부드럽지 않았다. 그 탓에 혼나리라는 걸 직감한 버니언에게 역시나 서릿발 같은 말이 질려 왔다.
“내 수년 전 너를 기꺼이 황태자로 책봉은 했으나 못난 너를 어떻게 해야 할지 정말 막막하구나.”
첫마디부터 못났다는 꾸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카밀루스를 무자비하게 패다가 그에게 들킨 것이 채 1시간도 되지 않았다.
버니언이 차마 말대꾸하지 못해 입을 일자로 굳게 닫은 채 고개를 숙이자 황제는 더욱 강한 질책을 담아 말했다.
“대체 언제까지 그리 미성숙한 짓을 할 것이냐?”
“바, 방금 전 일을 말씀하시는 거면 그건…….”
중간에 황제가 버니언의 한쪽 어깨를 붙잡았다. 버니언은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두려움에 몸을 떨다가 말소리를 삭였다. 그러자 웬일로 부드럽게 풀린 음성이 들려왔다.
“태자, 폭력은 아무것도 해결해 주지 않는다.”
“……예.”
일단 더 매섭게 꾸짖지 않은 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이라, 버니언은 내심 의외라고 생각하며 답했다. 그에 황제가 어깨에 올려 둔 손에 힘을 넣으며 버니언을 더 가까이로 이끌어, 버니언은 주춤주춤 무릎걸음으로 아버지에게 바짝 붙었다.
“잘 듣거라, 버니언. 군왕이 되기 위해 필요한 건 차가운 머리와 딱딱한 심장, 그리고.”
주목하라는 듯이 잠깐 휴지를 둔 황제가 버니언이 시선을 올리자 말을 이었다.
“권모술수이니라.”
황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건지 아직 맥락을 잡지 못한 버니언은 멍하니 눈만 몇 번 깜빡였다. 제 아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것을 보고 살며시 눈가를 일그러뜨린 황제는, 그러나 핀잔을 두지 않았다. 대신 어깨를 놓고 걸터앉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곧 그의 발이 천천히 무릎 꿇은 버니언의 주위를 맴돌았다. 버니언은 묘한 긴장감을 느끼며 어깨를 잔뜩 굳혔다.
“네가 계속 이대로 한심하게 산다면 짐이 너에게 이 제국을 넘겨줄 수 있겠느냐? 짐은 어리석음을 혐오하느니라.”
언사가 거칠긴 했어도, 버니언 역시 눈치챘다. 길을 알려 주는 것을 보니 황제는 버니언을 내칠 생각이 없었다. 하여 내심 안심한 그가 질문을 던졌다.
“그럼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네 힘으로 네 형인 카밀루스를 북부 아이오딘으로 가게 해 보거라.”
북부 아이오딘으로 추방.
황제의 복심을 알게 된 버니언이 입꼬리를 선명히 올리며 씩 웃었다. 지루하기까지 했던 긴 서두가 전혀 아깝지 않은 결론이었다. 눈엣가시 같은 카밀루스를 치워 달라니, 이보다 기쁜 일이 있을까.
부황은 그간 그를 혼낼 때마다 그 아이만큼이라도 고분고분해지라느니, 그 아이만큼 생각을 하고 살라느니 하면서 매번 카밀루스가 심중에 있는 것처럼 언행을 해 왔다. 녀석만 예외로 해 특별 대우 하듯이 행동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결국 녀석은 사생아다. 심지어 어미가 누군지도 모르는.
부황이 녀석의 출신을 숨기는 데다, 황궁 안에 머물지도 못하게 하는 것을 보면 황위 따위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할 천한 하층민의 아들일 게 틀림없었다. 아들에게 매정한 황제라고 소문이 퍼져 체면을 구길 수 없으니 데리고 있는 것뿐이겠지.
버니언은 황제의 발을 곁눈질로 따라다니며 물었다. 어투엔 벌써부터 즐거움이 배어 있었다.
“그러니까 머리를, 써서요?”
“왜, 못 하겠느냐?”
“아닙니다, 할 수 있습니다.”
이번엔 황제도 흡족함을 담아 웃었다.
“어떻게 하는지 지켜볼 것이다. 기대해도 되겠지?”
“물론입니다.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일은 저도 원하는 일이니까요.”
아버지에게 인정도 받지 못하는 주제에 늘 여유로워 보이는 그 재수 없는 면상을 보면 저절로 주먹부터 나가긴 했지만, 황제가 이 정도까지 말하니 어떻게든 참아야만 했다.
대신 북부로 추방할 수 있다니 얼마나 좋은 일인가.
‘얌전히 탑에 갇혀 있을 일이지…….’
그러게 왜 봉인을 풀고 그곳에서 기어 나와서는.
삼면이 빙벽으로 둘러싸여 1년 내내 땅이 얼어붙어 있는 탓에 농사조차 짓지 못하는 북부, 온갖 위협적인 몬스터들이 넘쳐나 인간이 살기 가장 적합하지 못하다는 그 불모지로 가는 것보다야 훨씬 나았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