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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병약한 도련님이 되었습니다 (20)화 (20/317)

* * *

본관으로 버틀러에게 업혀 들어온 이온의 발작에 가문의 주치의도 급히 달려와 증상을 살피다가 고개를 내젓자 이번엔 공작 저에서 일하는 마법사들이 전부 소환되었다. 잘못된 마나 운용에 의한 부작용은 다른 이들에게도 종종 일어나는 일이지만, 대단한 마법을 행한 것도 아닌데 이온처럼 심한 발작을 일으키는 경우는 흔치 않아 다들 당황한 채였다.

근본적인 해결은 되지 않았지만 다량의 마나를 주입해 다소간 안정시킨 뒤에야, 내내 지켜보던 크레이거 공작은 힘없이 의자에 주저앉았다. 이온의 어머니인 공작 부인은 한동안 자리를 지켰으나 아들의 고통을 더 보지 못해 이미 방 밖으로 나간 뒤였다.

갑자기 생긴 이온의 원인을 알 수 없는 병 때문에 벌써 몇 번이나 가슴이 내려앉았는지 몰랐다.

멀리서 공작 부인과 딸인 에밀리가 우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크레이거 공작은 차마 저까지 울지는 못해 마른세수를 했다. 그는 창백한 얼굴의 어린 아들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방 안에 남은 사용인들을 전부 물렸다.

“모두 나가 부인을 살펴라…….”

“예, 각하.”

마지막 남은 사람까지 모두 나가고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공작은 난리가 난 집안의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잠든 이온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 숨소리를 확인했다.

그러다 이온이 무언가를 꼭 쥐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는 자세히 보았다. 카밀루스 클로델, 그 황제의 사생아가 주고 갔다는 마나석이 박힌 목걸이였다.

보자마자 짜증이 솟아올라 빼앗아 던져 버리고 싶었지만, 이 덕분에 이온의 상태가 조금 나았던 것이라고 한 마법사들의 이야기가 떠올라 간신히 충동을 억누를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 일이 있었던 날 이후로 아프기 시작했다.’

명확한 인과관계를 따질 수는 없었지만 시간적으로는 그랬다. 그 생각을 하니 다시 카밀루스에 대한 혐오감이 솟아올랐다가, 다시 자책감에 머리를 쥐어뜯었다. 자신이 벌을 세우겠다고 며칠이고 방에 가둔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뿐인가. 정신 좀 차리게 하겠다고 뺨을 때리기까지 했었다.

그 뒤 전담 버틀러에게 이온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보고를 받기는 했지만, 그때만 해도 제 아들이 이렇게 심각한 상황인 줄은 몰랐기에 한 귀로 흘렸다.

그저.

〈제멜, 내 친구여.〉

현 황제가 공작가에 사람을 보내 자신을 황궁으로 불러들였을 때, 크레이거 공작은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고 굴욕감을 느꼈다.

〈그대의 아들이 크나큰 죄를 범했다는 건 상황만 봐도 알겠지? ……내 오랜 친구의 정을 생각해서 이리 부른 거네.〉

〈폐하의 하해와 같은 은혜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한데…… 대체 이게 어찌 된 경위인지…….〉

〈곤란하게도 카밀루스, 그 아이가 금제를 깨고 나왔네. 자네 아들의 도움을 받아서 말이야.〉

〈…….〉

듣자마자 등 뒤에서 땀이 흐르는 느낌이었다. 황제는 서늘한 파란 눈으로 공작을 내려다보며 특유의 느릿한 말투로 압박을 해 왔다.

그의 말인즉 이온이 오랫동안 금지(禁地)로 지정한 곳을 수시로 드나들었고, 심지어는 그 안에 있던 황제의 사생아를 꺼내 왔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면서 황제는 축 늘어진 제 아들을 건네었다. 제멜은 이온의 작은 몸을 안으면서도 그저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정신을 잃은 것이겠지만 느긋하게 눈을 감고 있는 이온을 보면서 분노가 일었다.

그래서 저택으로 돌아오자마자 간신히 정신을 차린 아이를 즉시 체벌방에 처박았다. 이온이 세상 그 무엇보다 중요한 크레이거 공작가의 명예를 실추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미쳤었다. 잘못된 생각이었다.

세상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공작가의 명예 따위가 아니라 제 아들의 목숨이었다.

〈소공작은 단순히 병에 걸린 게 아니라 저주에 빠진 것 같습니다.〉

이전에 한 의원이 전한 말을 상기한 공작은 다시금 올라오는 분노에 어금니를 꽉 물었다.

만약 이온에게 저주를 건 놈이 따로 있다면, 그놈을 기필코 잡아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마음을 맛보게 한 뒤 목을 쳐 버릴 것이었다.

……설령 그게 황가의 사람이라 하여도.

크레이거 공작은 이온의 손 위에 제 손을 올려 꼭 잡았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 말도 안 되게 창백한 이온의 얼굴에서 땀을 훔쳐 주었다.

그렇게 엉킨 머리도 정리하고, 예쁜 이마를 드러내 준 공작은 잠시 후 그 위에 조용히 입을 맞추었다.

크레이거 공작은 아직은 제 아들의 체온이 뜨겁게 느껴지는 것에 감사함을 새기며 떨리는 숨을 삼켰다.

“이 아비가 반드시 낫게 해 주마, 이온…….”

* * *

죽음이 목 끝까지 차올랐었다. 하지만 죽지는 않았다.

이온은 잠에서 깨었는데도 좀처럼 돌아오지 않는 시야 때문에 열심히 눈을 깜빡였다. 그렇게 몇 번이나 했을까. 머릿속에 끼어 있었던 안개가 걷히며 정신이 선명해지고, 눈도 회복되었다.

그런 뒤엔 목이 말라 누군가를 부르고 싶은데 말소리는 완성되지 못하고 깊은 숨소리만 흘러나갔다.

“하아…… 하…….”

한데 그 미약한 소리를 들었는지 누군가 곁으로 다가오는 발소리가 울렸다. 잠시 후 시야에 들어온 건 자신의 전담 버틀러였다.

“정신이 드십니까, 도련님?”

이온은 힘을 짜내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러고는 소리가 나오지 않아 입 모양으로만 물, 하고 말했다. 다행히 상대는 곧장 알아들었다.

“물 금방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이온은 조용히 입꼬리만 올려 미소 지었다. 버틀러는 잰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문이 닫히는 것을 보고 잠시 혼자가 된 틈을 타 이온은 몸을 움직이려 시도해 보았다. 그렇지만 잔뜩 얻어맞은 것처럼 전신이 아픈 데다 힘을 넣어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죽다 살아났으니 이 정도도 다행인 건가.’

크게 때운 덕분에 교훈 하나는 확실히 얻었다. 몸과 관련된 것으로는 결코 실험하면 안 된다는 교훈.

앞으로 또 한 번 같은 짓을 했다가는 진짜로 지옥 구경을 하게 될 터였다.

똑똑.

버틀러가 돌아왔는지 노크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렸다. 한데 물병을 가지고 들어오는 그의 뒤로 다른 인물도 보였다. 크레이거 공작이었다.

그를 보고 이온은 반사적으로 창문을 확인했다. 방 안이 밝은 만큼 당연히 햇빛이 쨍쨍했다. 그렇다는 건 낮이라는 뜻인데, 의외의 일이었다. 공작이 낮 시간에 집에 붙어 있는 일은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한데 크레이거 공작은 익숙한 듯이 이온의 침대 근처에 있는 의자에 앉은 뒤, 버틀러에게 물잔을 건네받더니 숟가락으로 물을 떴다. 이온이 일련의 행동을 어리둥절히 볼 뿐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자 공작이 먼저 말을 건넸다.

“물을 마시고 싶다 했다면서.”

이온은 그제야 입을 살짝 벌렸고, 미지근한 물이 혀를 적시고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그렇게 몇 번 반복한 뒤에야 이온은 겨우 갈라진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그러고는 어색해서 슬금슬금 눈치를 보는데, 공작이 물잔을 내려놓고 조용히 한 팔로 이온을 안았다.

“넌 이 크레이거 공작가의 후계자다. 한데 이리 아파서 쓰겠느냐.”

“죄, 죄송해요……?”

이 말을 할 차례가 맞는 건가 싶어 이온이 끝에 물음표를 달자 공작은 작게 실소했다. 그 웃음이 어쩐지 몹시 지쳐 보이는 구석도 있어서, 이온은 그가 자신을 걱정했음을 알게 되었다.

무거운 입이 열렸을 때는 그가 그저 솔직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사실 또한 확실히 느꼈다.

“네놈 때문에 집안이 하루도 평온할 날이 없어.”

“…….”

이온은 하마터면 웃음을 내비칠 뻔했지만, 애써 참아 냈다. 그러고 다시 죄송하다는 말을 입에 올리려 하는데 밖에서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려 댔다.

꽤나 다급하게 들리는 노크 소리에, 옆에 있던 버틀러가 문을 열고 밖의 사람을 혼냈다.

“도련님이 깨어나서 각하와 환담 중인데 어찌 이리 경박한 것이야!”

“죄송합니다, 그런데 밖에 손님이 오셔서…….”

들려오는 소리에 크레이거 공작이 피곤하다는 얼굴을 하고는 천천히 일어나 뒤돌아섰다.

“갑자기 초대하지도 않은 손님이 왔단 말이냐?”

“예, 각하. 황태자 전하께서 저택의 정문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황태자?

이온이 눈썹을 한 번 까딱였다.

명색이 황태자와 이온 크레이거는 같은 또래인 데다가 각각 황가와 공작가의 아들인데, 두 사람이 그리 친하지는 않았었는지 아프다는 소식을 들었을 만한데도 지금껏 황태자가 이 저택을 찾아온 적은 없었다. 크레이거 공작 역시 황궁에 찾아갔을 때 딱히 황태자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고. 그 때문에 여태껏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간간이 소문은 들었었다. 상당한 망나니라고.

한데 초대장도 보내지 않았거늘 난데없이 연관도 없는 공작가로 찾아오다니, 이 망나니 황태자님의 행동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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