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이거 공작도 의문스러운 것은 마찬가지였던지 표정을 잠시 굳혔다가 이온에게 당부했다.
“일단 마중을 나가야 할 것 같으니 쉬고 있거라, 이온.”
이온은 고개를 끄덕인 뒤 천천히 몸을 눕혀 이불 속에 파묻혔다. 그러자 문이 닫히고 늙은 버틀러의 다정한 다독임이 이어졌다.
톡, 톡, 톡…….
지금껏 실컷 잤는데도 아직도 충분하지 않았던가. 그 일정하고도 조용조용한 소리 덕분에 금세 몽롱해졌다.
하여 막 정신이 흐트러지려던 그때, 낯선 목소리가 방 가까이서 울려 퍼졌다.
“함부로 발을 들인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공작.”
제법 어린 느낌의 목소리였다. 말하는 중에도 걷고 있는지 점점 목소리가 가까워지고, 발소리도 커졌다.
“그간 격조하였습니다, 전하. 한데 여기까진 어쩐 일로……?”
“소공작이 많이 아프다는 이야기를 들은 지 꽤 되었는데 여태껏 병문안도 오지 않았다는 게 떠올라서요.”
타이밍도 그렇고, 소식을 들었을 때의 공작의 표정만 봐도 썩 달갑지 않은 병문안일 터였다. 한데 그 불청객은 당당하게 걸어와 마침내 이온이 누워 있는 방의 문까지 두드렸다.
똑똑, 가볍게 두 번. 예의는 이 정도면 됐다는 양 황태자는 벌컥 문을 열었다. 그러자 크레이거 공작이 은근히 역정을 냈다.
“전하, 지금은 제 아들이 쉬고 있습니다.”
말투에서부터 황당해하고 있다는 것이 충분히 느껴졌다. 하지만 멋대로 침입한 상대는 방문을 활짝 연 채, 반쯤 상체를 일으킨 이온을 보고는 고개를 기울였다.
“제대로 눈을 뜨고 있는데요?”
[버니언 퍼렌도 클로델
나이 : 15세
직업 : 황태자
특이 사항 : 카밀루스 발데라스 클로델 자작의 이복동생이다.]
카밀루스가 형이구나. 그것도 연년생.
그렇지만 이복동생이라 그런지 닮은 구석이 얼마 없었다. 그나마 파란 눈동자가 조금 비슷했으나, 색의 농도가 달랐다.
딱 봐도 성격은 더 다른 듯했고.
이온이 초록빛 눈으로 빤히 바라보고 있자 황태자 버니언이 픽 웃으며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오랜만이야, 이온. 폐하의 탄신일 연회 이후로 처음인 것 같네.”
상대가 반말로 말을 걸어올 때 이쪽은 어째야 할지 곤란할 때가 많은데, 왠지 버니언의 경우는 제 감이 틀리지 않을 것 같았다. 이온은 그의 내민 손을 못 본 척 허리를 숙이며 존댓말을 꺼냈다.
“몸이 아파 자주 찾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그러고 버니언의 눈치를 살폈다.
얘한테 반말했으면 이온 크레이거한테 아주 실망할 것 같은데.
속으로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잔잔히 미소 지었다. 버니언은 그에 잠시 묘한 표정을 내비치더니 헛기침을 해 자연스럽게 손을 거두어 갔다.
“흠, 이전보다 약해진 것 같기는 하네……. 많이 심각하다는 얘기가 사실인가 봐?”
위로를 하는 건지 시비를 걸려는 건지 알 수 없는 그의 중얼거림을 듣고 있자니 조금 불쾌했다. 하여 아버지를 향해 어떻게 하냐는 의미의 눈빛을 보내자 크레이거 공작이 끼어들었다.
“제 아들을 염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다만 이곳은 복잡하니 저의 집무실로 가서 대화를 나누시지요.”
그러고 이만 방을 나가자는 의미로 바깥쪽으로 손짓을 하는데, 버니언은 꼼짝도 안 했다. 대신 남의 집에 와서 하기엔 방종하다 할 만한 언사를 이어 갔다.
“오늘 내가 온 용건은 공작과의 대화를 위함이 아닙니다.”
대놓고 무시하는 말에 공작의 표정이 잠시굳었으나, 고위 귀족으로서 오랜 풍파를 지나온 만큼 그는 흥분하지 않고 우아한 말투로 물었다.
“하면 무슨 일로 걸음하셨습니까. 보시다시피 제 아들이 아파 전하와 말동무조차 해 드리기가 어려운 상황입니다.”
그러자 버니언은 하하, 크게 웃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말동무 같은 건 필요 없다는 의미였다.
버니언의 파란 눈이 다시 이온에게로 향했다. 그는 기분 나쁜 질척함이 묻은 눈초리로 이온의 얼굴부터 몸까지 훑어 내리며 제 용건을 알려 왔다.
“여러 의원을 불러다 놔도 치료가 안 된다는 소문이 있길래, 혹시나 싶어 제가 아는 마법사를 데려왔습니다.”
“마법사, 말입니까?”
공작의 시선이 문밖으로 향했다. 그러자 복도에 대기하고 있던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단순 병이 아니라 저주일 수도 있으니까요.”
버니언의 설명을 들으면서 이온은 아직 문틀 바깥에 서 있는 상대를 확인했다. 긴 회색빛 케이프를 두르고 얼굴을 가릴 수 있도록 깊게 눌러쓴 탓에 그인지, 그녀인지 성별조차 구분할 수 없는 이였다.
제아무리 제국의 황태자가 데려왔다지만 몹시도 꺼림칙한 상대.
그런 감이 온 것은 비단 이온만이 아닐 터였다. 크레이거 공작은 방 안으로 들어와 황태자의 옆에 서면서 예의 손님 앞을 자연스레 막았다.
“전하, 송구하나 정체도 모르는 자에게 제 아들을 보일 수는 없습니다.”
잘한다, 내 아버지.
이온은 제가 할 말을 알아서 대신해 주는 공작에게 속으로 응원을 보냈다. 하지만 버니언은 계속 억지를 부렸다.
“저자의 신원은 제가 보증합니다. 그래도 안 됩니까?”
묻는 말에 공작은 너그러운 척 입가에 미소를 띠며 황태자가 데려온 손님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럼 망토부터 벗으라 하시지요, 전하.”
제 동행자가 삿대질을 당하니 열받았는지 버니언의 눈이 슥 치켜 올라갔다. 하지만 공작 입장에서는 안 그래도 멋대로 침입해 온 무례를 봐주고 있으니 우스워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물러날 수 없었다.
황태자 버니언과 크레이거 공작이 서로를 마주 보며 압박했다. 둘 사이에 침묵이 내려앉았고, 이온의 방 안엔 짙은 긴장감이 흘렀다.
“저…….”
양보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는 두 사람을 보면서 이온이 중재에 나서려 했을 때였다. 이 대립의 원인이 된 마법사가 그 자리에서 몸을 낮추었다.
“죄송합니다, 공작 각하.”
나직이 울린 목소리에 크레이거 공작이 그제야 버니언에게서 시선을 떼었다. 한쪽 무릎을 꿇고 상체를 공손히 굽힌 마법사의, 분을 바른 듯 새하얀 손이 바닥을 짚었다.
“제가 어렸을 때 마기에 잠식된 적이 있어 얼굴이 흉합니다. 그러니 이 망토를 거두어 내지 못함을 부디 용서하시기를.”
버니언이 얼른 한마디 보탰다.
“그래, 내가 실제로 봤는데 얼굴이 정말 기절할 만큼 기괴합니다.”
“…….”
그래도 크레이거 공작이 움쩍도 안 하자 버니언의 입에서 한숨이 토해졌다. 이어서 그는 마치 내가 이렇게 비굴해져야겠냐는 듯한 투로 말을 해 나갔다.
“많은 의원들이 왔다 갔는데 차도가 전혀 없었다는 소문이 계속 들려오기에, 내가 걱정이 돼 실력 있는 마법사를 직접 찾아 데려온 것뿐이에요. 이자와 동행하기 위해 직접 마탑주한테 찾아가 부탁까지 했습니다.”
“설마, 마탑 소속 마법사입니까?”
겨우 공작의 반응을 이끌어 낸 버니언이 이때다 싶었는지 서둘러 말을 이어 붙였다.
“마탑 마법사들의 실력이야 말해 봐야 입만 아플 테고, 그들이 얼마나 특별한지는 굳이 늘어놓을 필요도 없겠지요?”
“…….”
공작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이온 쪽을 잠시 돌아보았다.
크레이거 공작은 마탑주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긴 했지만 그는 워낙 말이 안 통하고 속을 알 수 없는 인간인 데다, 마탑은 선황제 때 모종의 사건으로 클로델 왕조에 충성을 맹세한 터였다. 하여 실질적으로 그들을 부릴 수 있는 건 클로델의 성을 지닌 황족뿐. 권세 높은 공작가라 하여도 그들을 함부로 오라 가라 할 수는 없었다.
공작은 황태자가 내민 조건 없는 호의가 전혀 내키지 않았지만 결국 이온을 위해 한발 물러났다.
“좋습니다. 대신 저택의 홀에서 저희 가문 기사들의 입회하에 살피는 것으로 하여도 되겠지요?”
“뭐, 그거까진 어쩔 수 없겠군요.”
크레이거 공작이 침대에 앉아 지켜보고 있던 이온에게로 다가왔다. 이온은 자신을 안아 올리려는 공작의 행동을 알아채고 두 팔을 뻗어 그의 목에 둘렀다.
단단한 팔로 아들을 받친 공작이 작게 속삭여 왔다.
“그리 무서워할 것 없다, 이온. 괜찮겠느냐?”
다정함이 가득 담긴 말에 이온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괜찮아요, 전.”
어차피 그간 공작가 소속의 주치의나 마법사도, 수소문해 찾아온 이들도 마땅한 답을 찾지 못했다. 마탑 소속이라고 별다른 수가 있을까 싶긴 하지만…….
‘그야 □□를 죽여야 저주가 풀린다고 했으니까.’
아마 다른 방법은 없을 것이다.
그래도 이 행위가 아무 의미 없는 것만은 아니다. 어떤 저주인지만 알아내도 □□를 찾는 데는 훨씬 도움이 될 테니.
이온은 크레이거 공작에게 안긴 채 방을 나섰다. 그러고 의문의 마법사 옆을 지날 때 메시지가 하나 떴다.
[상대방의 정보를 불러올 수 없습니다.]
‘얼굴이 가려져서인가?’
여태껏 특정인으로 식별되기 전까지 정보창이 뜬 적이 없기는 했다. 하지만 이런 식의 메시지는 처음이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몰랐다.
하여 혹시나 싶어 방 밖을 나서고, 저택의 홀로 내려가는 동안 마법사를 노골적으로 뚫어져라 쳐다보았으나 별다른 추가 메시지는 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