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병약한 도련님이 되었습니다 (22)화 (22/317)

* * *

홀 가운데 간이침대가 놓이고, 이온은 마치 피실험자라도 된 양 침대를 둘러싼 많은 사람들 사이에 눕게 되었다. 대부분 크레이거 공작이 불러서 온 가문의 기사와 마법사들이었다.

그들이 주시하는 가운데 마탑에서 왔다는, 회색 케이프를 뒤집어쓴 마법사가 이온의 눈높이에 맞춰 몸을 낮추며 청했다.

“손목을 보여 주시겠습니까?”

중성적인 목소리는 묘하게 긴장감을 일으키는 구석이 있었다. 이온이 잔뜩 굳은 표정을 한 채 손목을 내밀었다.

마법사가 조심조심 이온의 새하얗고 가는 팔을 잡고 살피자 공작이 못내 궁금하긴 했는지 옆에서 말을 걸었다.

“……내 아들이 이리된 게 저주 때문이라고 하던데, 정말인가?”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마법사는 고개를 연신 갸웃거리다가 이내 주억였다.

“그것도 아주 상급의 저주군요. 본래 소공작의 몸에 돌고 있어야 할 마나의 흐름이 모두 막혔습니다.”

“그럼.”

“마나는 물과 같은 것이지요. 흐르고 순환되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니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아도 되는 이인 만큼 마법사의 말은 적나라하기 그지없었다. 이온은 이미 상황을 알고 있던 터라 그냥저냥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공작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수심을 드리웠다.

한술 더 떠 마탑에서 왔다는 예의 마법사는 드러냈던 이온의 팔을 다시 소매로 가려 준 뒤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러고는 공작을 향해 짧게 허리를 숙였다.

“죄송하지만 현재로선 풀 방도가 없는 저주입니다.”

역시.

예상했던 결론이라 이온은 그리 실망하지 않았다. 단호한 결론에 더 당황한 것은 오히려 그를 데려와 체면을 구긴 황태자였다.

“아니, 이봐. 그렇게 말해 버리면 내가 뭐가 되는…….”

하지만 그가 말을 미처 맺기 전에 크레이거 공작이 질문을 던졌다.

“그럼 내 아들은 앞으로 평생을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건가?”

“…….”

정확히 말하면 □□가 죽을 때까지, 평생.

생각하면서도 막막하기는 했다. 대관절 □□에 대한 단서조차도 없는 상황이니까.

질문받은 마법사는 이것까지는 차마 그렇다고 대답하기 어려웠는지 침묵으로 긍정했다. 그러고는 이온을 내려다보았다.

그림자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으나 그의 얼굴 일부를 확인한 이온은 순간적으로 흠칫해 버렸다. 마기에 잠식되어 얼굴이 검댕이 묻은 듯 얼룩덜룩한 것은 둘째 치고.

‘오드 아이?’

눈이 마주친 상대는 두 눈동자의 색깔이 달랐다. 한쪽은 선명한 파란색, 다른 한쪽은 짙은 검은색이었다.

일부나마 얼굴을 인식하고 나자 이전과 다른 시스템창이 올라왔다.

[????

나이: ??세

직업: 마법사(추정)

특징: 오른쪽 눈은 파랗고 왼쪽 눈은 검다. 얼굴이 마기에 잠식되어 늘 망토를 쓰고 다닌다고 한다.]

앞으로 정보를 쌓아 가는 건가?

무심코 그렇게 생각하던 이온은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설마.’

지금껏 ‘불러온’ 정보는 이온 크레이거의 지워진 기억을 기반으로 했던 것일까?

되짚어 보면 이 몸에 흘러들어 온 이후 만난 이들은 전부 이전부터 알고 있었을 법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이 마법사는 버니언이 갑자기 데려왔다.

‘몰랐을 수도 있어.’

충분히. 듣자 하니 마탑 소속의 마법사들을 움직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닌 모양이니까.

비록 추측에 불과하나 시스템에 대한 비밀 하나를 파헤친 느낌이었다. 물론 이걸로 뭘 더 이어 나갈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고민이 깊어져 가려는 찰나, 이온을 내려다보던 시선을 거둔 마법사가 공작과 마주 섰다.

“시전자보다 더 강한 마법사가 오면 다른 방법을 떠올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저는 아닌 것 같군요. 송구합니다.”

사과의 말을 읊으며 마법사는 허리를 한 번 꾸벅했다. 이미 많은 의원과 마법사들에게서 비슷한 이야기를 수없이 들은 크레이거 공작은 화가 났다기보다는, 이번에도 그렇구나 하고 허무해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두 번의 사과는 없었다. 마법사는 마지막으로 이온을 다시 돌아보며 그의 목에 걸린 마나석 목걸이를 손으로 받쳐 올렸다.

카밀루스의 마나가 담긴 그 목걸이를 이리저리 돌려 보며 손으로 굴리던 그는 이내 짧게 충고 한마디를 했다.

“이 마나석은 몸에서 떼지 않는 것이 좋으시겠습니다, 소공작.”

그 나직한 목소리를 끝으로 그의 발은 미련 없이 건물 밖으로 떠나갔다.

자박자박.

케이프 안의 몸이 그리 무거운 것은 아닌 듯,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숙연해진 분위기의 루미에르홀에 울려 퍼졌다. 버니언은 마법사를 따라가지도 못하고, 그저 크레이거 공작과 그의 뒷모습을 보며 황망해했다.

“아니, 마탑 녀석들이 아무리 제멋대로라지만 지금 뭐 하는 거야?”

일부러 들으란 듯이 불평한 버니언은 근심 어린 척하는 표정으로 크레이거 공작에게 사과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사과하지 않는 것도 아닌 어설픈 말을 건넸다.

“곤란하게 되었습니다, 크레이거 공작.”

곁에 있던 기사의 도움으로 몸을 일으키던 이온은 가식적인 태도에 그만 실소를 흘려 버렸다. 그 순간, 잠시 버니언과 눈이 마주쳤다.

이온은 그가 분명 저를 노려보겠거니 했지만 아니었다. 버니언의 눈꼬리가 사악 휘더니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다.

‘웃어?’

카밀루스가 웃어 줄 때는 마음이 따뜻해졌고 심지어는 설레기도 했었는데 저 자식의 웃음은 그냥 소름만 끼쳤다.

이온은 제 눈꺼풀이 저절로 파르르 떨리는 것을 느끼고는 기사의 어깨에 올린 팔에 힘을 넣었다. 그러자 변화를 눈치챈 젊은 기사가 얼른 물었다.

“소공작, 어디가 불편하십니까?”

그 물음에 나머지 사람들의 시선이 이온에게로 쏠렸다.

“아니, 기운이 없을 뿐이다.”

이온은 고개를 흔들고는 기사의 단단한 몸을 지지대 삼아 침대 아래로 내려왔다.

최근 몸을 안 쓴 탓에 서 있는 동작조차 그리 수월하지는 않았으나 황태자인 버니언의 앞에서 최선을 다해 예의를 차렸다. 이온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허리를 굽혔다.

“황태자 전하의 보살핌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마음 써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뭐, 그 정도야.”

버니언이 시선을 내린 이온의 얼굴을 살피려는 듯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답했다. 그 시선에 상당히 불쾌한 구석이 있었지만 닿는 곳을 긁어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라 이온은 그저 허리를 더 깊게 숙일 뿐이었다.

한데 돌연 성큼 다가와 이온의 앞에 선 버니언이 시야 밖에 있던 손을 이온의 턱 밑으로 뻗었다. 흠칫한 이온이 뒤로 물러나려 한 순간이었다.

찰랑…….

이온의 옷 안에 잘 갈무리되었던 목걸이가 옷 밖으로 빠져나가 버니언의 손 위에 얹어졌다. 미간을 크게 구길 뻔한 이온은 간신히 현상 유지를 하며 입 안을 깨물었다.

손톱만큼의 크기도 안 되는 마나석이 박힌 목걸이를 버니언이 이리저리 뒤집어 보더니 이온이 아닌 크레이거 공작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이 목걸이가 카밀루스 자작이 만들었다는 마나석인 모양이죠?”

‘아무리 그래도 형인데 작위로 불러?’

정 없는 호칭을 듣고 나니, 그가 여기까지 온 목적이 결코 자신의 병을 치료해 주기 위함은 아니라는 사실이 여실히 느껴졌다. 아니, 설령 그게 진심이었다고 해도 아마 부차적인 것이었으리라.

“전하의 말씀이 맞는 것이냐, 이온?”

아버지가 질문을 전달하자 이온은 순순히 긍정했다. 어차피 조금만 알아보면 답이 나오는 걸 굳이 숨길 필요도 없었다.

“네, 그렇습니다.”

버니언이 마나석을 한 번 꽉 움켜쥐었다가 놓더니 이내 입술을 달싹였다. 이온만 들릴 만큼 작은 목소리가 그 틈으로 새어 나왔다.

“그 녀석도 참, 이런 걸 만들다니…….”

뒷말은 워낙 발음이 뭉개져 제대로 들리지는 않았으나 대충 예상하기로는.

괴물이라니까.

……였다.

그러고는 마나석 목걸이를 드디어 놔주었고, 이온도 겨우 허리를 펼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돌아갈 생각이 좀 들었는지 뒤돌아서는 그의 뒤통수를 보면서 이온은 침을 뱉어 주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으나 꾹 참고 인사치레를 입에 올렸다.

“추후 몸이 회복되면 전하를 찾아뵙고 걸음해 주신 데 감사 인사를 올리겠습니다.”

그러자 버니언이 멈칫하고는 이온을 돌아보았다. 아까부터 눈이 마주칠 때마다 그의 파란 눈동자가 이온을 관찰하듯 훑었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검은 동공이 바쁘게 움직여 이온의 선이 가는 몸 곳곳을 살폈다.

눈길에 손이 달린 것도 아닌데 이온은 왠지 모두가 보는 앞에서 제 옷깃이 파헤쳐지는 듯한 기묘한 감각을 느꼈다. 느른하게 시선이 흘러내렸다. 그것을 따라 온몸에 가려움증이 올라오려 했으나 다행히 견디는 시간이 그리 길지는 않았다.

얼마 안 가 버니언이 이온의 얼굴 쪽으로 눈을 들었고, 그때엔 이온도 버니언도 서로에게 무구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 있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