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그의 입에서는 가식적인 말들이 줄줄 흘러나왔다.
“크레이거 공작가는 제국의 기둥과 같고, 그대는 다음 대에 공작가를 이어 갈 후계자이니 황가의 일원으로서 관심을 갖는 건 마땅한 의무이지.”
입에 기름칠이라도 했나.
버니언의 뻔뻔함을 눈앞에 둔 이온은 속으로 빈정거리면서도 마주 인사치레했다.
“염려해 주시는 마음 간직하여 꼭 회복해서 전하를 보필하겠습니다.”
하지만 분명 경계하는 기색을 알아차렸을 텐데 버니언의 말투가 한결 가벼워졌다.
“고마워. 그럼 다음에 다시 보자, 이온.”
당장에라도 이름 부르지 말라고 외치고 싶었으나 꾹 참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버니언은 마지막으로 크레이거 공작과 맞인사를 하고는 드디어 저택 밖으로 나섰다. 그의 발이 빠져나가자마자 이온이 한숨을 내쉬며 침상 위에 몸을 떨어뜨리려 하자 옆의 기사가 얼른 이온의 자세를 지탱해 주었다.
“괜찮으십니까, 소공작.”
“아…….”
이온은 그제야 상대의 얼굴을 제대로 살폈다.
[알렉사이 에렌스트
나이 : 19세
직업 : 크레이거 공작가의 가신 기사
특징 : 대형견같이 생겼다(추정).]
‘시스템창엔 객관적인 정보만 적히는 거 아니었나……?’
옆에 추정이라고 꼬리표를 달아 두긴 했지만 대형견같이 생겼다니. 그의 굵은 몸에 우직하게 생긴 인상을 보면 그런 표현이 안 어울리는 것은 아니지만, 빈칸을 두기 싫어 써 놓은 게 아닌가 싶을 만큼 완전히 주관적인 감상이었다.
좀 어처구니없긴 해도 이온은 그의 팔을 두드리며 호의에 짧게 감사를 표했다.
“덕분에.”
그러자 에렌스트 경이 작게 미소했다. 흰둥이처럼 살결도 흰 데다 눈매가 접히자 인상이 순해 보이는 것이, 밀크라고 이름 붙이면 딱 좋게 생기긴 했다.
한데 그때, 시야 한편에 걸리는 것이 있어 이온이 창문 쪽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마침 투명 커튼 사이로 날아가는 새의 그림자가 비쳤다.
“……!”
독수리?
순식간에 사라져 버려서 제대로 살피지는 못했지만 얼핏 봐도 크기가 동네에 날아다니는 새 수준은 아니었다.
‘지켜보고 있었구나.’
잊고 있으면 나타나는 카밀루스의 존재감에 이온은 아무도 모르게 웃었다.
* * *
크레이거 공작의 배웅을 받고 루미에르홀을 나선 황태자 버니언이 짧은 인사말을 끝으로 문이 열린 마차에 올라타려 몸을 돌렸다. 먼저 간 마법사가 이미 안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버니언은 표정을 슬쩍 굳혔다.
‘건방지게…….’
마탑 놈들은 저희들의 특별함을 잘 알고 있다는 듯이 늘 이렇게 예의를 몰랐다. 그렇지만 이번엔 제가 직접 데려온 것도 있으니 너그러이 넘어가기로 한 버니언이 옆에 착석했다.
마차가 출발하며 말발굽이 지면을 치기 시작하자 황태자가 자연스럽게 운을 뗐다.
“정말로 저 저주는 풀 수 없는 저주인가?”
한데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
케이프 속의 그림자에 기대 자고 있는 것인지.
버니언은 자신이 어디까지 봐줘야 하나 싶었으나 애써 한 번 더 인내했다.
“마르?”
그제야 케이프의 머리 부분이 들렸다. 아, 하고 작게 탄성을 터트린 그가 특유의 늘어지는 목소리로 답해 왔다.
“죄송합니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 질문이 무엇이었습니까?”
“소공작에게 걸린 저주가 풀 수 없는 저주냐고 물었다.”
“예, 제 눈엔 저주를 푸는 마법이 뭔지 보이지 않습니다. 게다가 그 효과만 봐도 금지된 마법이 틀림없지요. 저주의 효과를 잠시 약화할 수는 있겠지만…….”
“사생아 놈의 마나석은 저주를 약화하기 위한 물건이고?”
“그런 것으로 보입니다. 자작께서 신경을 많이 쓰고 계신 모양이군요.”
마지막에 덧붙여진 말을 듣고 버니언이 쿡, 웃음을 흘렸다.
마나석 하나를 만들기 위해 들어가는 노력과 흘려야 하는 피를 생각하면 그런 추측은 꽤 합당했다. 몸속의 마나는 시간이 지나면 회복이 된다고는 하지만 영적인 것을 뭉쳐 고체로 만들기까지, 그만큼의 마나를 응축하기 위해서는 결국 다량의 피를 뽑는다거나 하는 인위적인 방법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 물건을 아무에게나 줄 수 있을 리가.
저주를 없애는 것도 아니고, 단지 억누르기 위해서.
“안타깝게 되었습니다, 공작가의 영식인데.”
버니언이 고개를 저었다.
“아픈 게 나아. 저 자식은 어차피 카밀루스의 절친이라, 내 편은 안 될 거거든.”
그렇지만 역시 아군이 되면 좋긴 할 텐데.
버니언은 방금까지 보았던 이온의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땅바닥을 딛고 일어나서도 다리를 떨 만큼 약해진 체력과 작은 바람에도 흔들릴 것 같은 야윈 몸체. 그렇지만 크림처럼 부드러워 보이는 밀빛 머리와 긴 속눈썹으로 그림자가 진 초록빛 눈은 신비로운 분위기까지 흘려서 꽤 눈요깃거리가 되었다.
실제로도 그를 살펴볼 때 생각하지 않았던가.
“예쁘장하게 생기긴 했는데 말이야.”
복숭앗빛으로 상기된 양 볼마저, 꽤 아름답다고.
남자에게도 미인이라 지칭하는 게 가능하다면 아마 그건 이온 크레이거에게 해당하는 말일 터였다.
과연 자신의 손에 넣을 수 있는 꽃일까.
제 손으로 가지를 꺾을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텐데.
슬그머니 고개를 든 욕망이 버니언의 눈에 비쳤을 무렵이었다.
“근데 저 몸, 기이합니다. 몸과 영혼의 얼굴이 다릅니다.”
의아스러운 말에 버니언이 상념에서 깨어났다. ‘영혼의 얼굴’이라는 표현이 몹시 기이하게 느껴졌다. 그뿐인가. 모르는 단어가 하나도 없는 짧은 말인데도 문장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무슨 뜻이지?”
질문을 던졌으나 다시 상대는 침묵에 빠졌다.
“…….”
“마르.”
재차 불러도 역시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덜그덕거리는, 지면을 지나가는 마차의 소리만이 둘 사이에 울려 퍼졌다.
아마 명상에라도 빠진 모양이지.
버니언의 입술 사이에서 실소가 삐져나왔다.
“나 참, 마탑 녀석들은…….”
죄다 이런 이상한 놈들밖에는 본 적이 없다.
버니언은 그에게서 대답을 듣길 포기하고 마차의 벽에 기대었다. 여유가 생기자 다시 루미에르홀에서 보았던 이온의 모습이 머릿속에 어른거렸다.
이전에 건강했을 때는 그저 머리 좀 똑똑하고 자존심 센 귀족가 녀석이라고만 생각했다. 실제로도 둘은 그리 친하게 지내지 않았다. 오히려 연회가 열려 둘이 가끔 만나도 말 몇 마디 안 나눠 봤을 정도로 소원한 사이였다.
눈치가 있으니 버니언도 알고 있었다. 이온 크레이거는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아니, 싫어했다.
부드러운 눈매 속에서도 약간의 혐오를 담은 초록빛 눈, 다른 이에겐 활짝 웃다가도 자신을 보면 사그라드는 입매, 늘 자신 쪽으로는 틀어지지 않는 몸까지. 그는 말을 제외한 모든 것으로 황태자 버니언을 싫어한다는 신호를 보냈다.
그래도 관계를 개선해 볼 생각은 안 했다. 어차피 나중엔 군신 관계가 될 터이고, 황제가 된 자신의 앞에서 무릎을 꿇는 게 녀석의 숙명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새끼가 목매는 이유를 알 것 같기도.’
남의 부축 없이는 일어나지도 못하는 나약한 모습에 눈길이 갔다. 기억에서보다 훨씬 마르고 힘이 없는 고분고분한 꼴을 보니 제 안의 무언가가 자극을 받는 느낌이었다. 본래 예쁘고 작고 연약한 것엔 시선이 가는 법이니.
게다가 크레이거 가문의 권세 정도면, 자신도 탐나는 건 사실이었다.
크레이거 가문은 현재 제국 동부에 위치한, 제국에서 두 번째로 큰 다이아몬드 광산에 대한 사업권을 가졌다. 그리고 그 세습 영지는 바다에 접해 있어, 오래간 해상 무역의 노하우를 쌓아 온 가문이었다. 하니 돈이야 넘쳐흐를 것은 당연했다.
게다가 크레이거 공작가는 그 뿌리로 거슬러 올라가면 제국의 건국과 궤를 같이하는 공신 가문으로, 윗세대들은 황실과도 여러 차례 연을 맺었었다. 아마 실제로도 클로델 왕조의 핏줄이 끊기면 그다음 황위 계승 순위에는 크레이거 가문의 이름이 오를 것이었다.
현 황실에는 고마우면서도 동시에 위협이 되는 존재라는 의미다.
그렇지만 그 날카로운 가시에 찔리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은 만지고 싶어지는 법이지.’
게다가 카밀루스가 지키지 못해 안달 내는 것이니 자신이 가져야 마땅했다.
버니언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이온.”
이름을 입 안에서 굴려 보았다. 이전엔 생각만 해도 거부감이 들었던 그 이름이, 오늘은 혀에 제대로 감겼다.
“이온…….”
동글동글하고 제법 귀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