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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플레이어가 사망할 확률은 34%입니다.]
매일매일이 불안과 평화가 상존하는 하루였다. 이온은 시시때때로 새롭게 계산되는 스스로의 사망 확률을 보면서, 저런 것을 계속 보다 보면 과연 죽음에도 무뎌질까 궁금해졌다.
사망 확률이 어떻든, 아직 숨이 붙은 한은 그가 살지 말지 결정하는 주사위는 매번 그가 사는 쪽으로 굴러가고 있는 셈이니.
이온은 몸을 일으키다가 아직 이불 속에 곤히 잠들어 있는 욤뇽이를 살며시 들여다보았다. 작게 들썩이는 등 비늘을 눈에 담으면서 조용히 미소 지은 그는 일어나 조심조심 창가에 다가갔다.
아침의 풍경이 보고 싶어 커튼을 밀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금세 밖에서 전담 버틀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련님, 일어나셨습니까?”
대기하고 있었나 보다.
목소리를 내려니 목구멍이 간지러워 몇 번 기침을 한 이온이 대답했다.
“들어와도 돼.”
그의 손엔 몇 개의 봉투가 들린 채였다. 이온이 눈짓으로 무엇이냐고 묻자 곧 답이 돌아왔다.
“초대장들입니다. 읽어 줄 아이를 들일까요?”
“아, 응.”
이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버틀러가 아이를 불러오는 동안 책상 위에 흩어 놓은 초대장들을 바라보았다.
아직 약관이 지난 것도 아니니 전부 크레이거 공작가의 위세 덕분이겠지만, 병상에 있는 와중에도 이온에게 연회나 방문을 청하는 초대장이 꾸준히 왔다.
가끔은 초대장과 함께 꽤 장문의 편지도 왔는데, 당연하지만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사람들이 보내는 것이다 보니 맥락을 몰라 답장을 헤맬 때도 있었다.
한데 보내는 이의 이름을 눈으로 훑던 와중 거슬리는 글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버니언 F. 클로델
‘황태자가?’
반사적으로 미간을 구겨 버리고 만 이온이 황가의 문장이 찍혀 있는 실로 봉인한 편지를 들어 올렸다. 잠시 후 들어온 아이에게 예의 편지를 건네어 읽게 하는 이온의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여러 수사를 늘어놓았지만 핵심은 이것이었다.
“……3일 뒤, 영식께서 본 태자의 오찬 자리를 빛내 주시면 더없는 영광이겠습니다. 오브라이언 제국 황태자, 버니언 퍼렌도 클로델.”
내용을 모두 들은 이온이 자신의 버틀러를 돌아보았다.
“거절하면 안 되겠지?”
“와병 중이라 어쩔 수 없다고 하면 되긴 하겠습니다만…….”
말끝을 흐리는 것을 보니 말하는 그 자신도 거절을 권유하는 쪽은 영 켕기는 모양이었다.
“가겠다고 답변을 보내.”
“예, 도련님.”
그러고 이온은 간단히 아침 식사를 하시라는 버틀러의 권유에 따라 방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미리 식당에 나와 있던 에밀리의 재잘거림을 들으며 간간이 웃은 그는 속으로는 버니언의 편지를 곱씹었다.
‘그렇게 싫어하는 티를 냈었는데 굳이 왜 들이대지?’
어쨌든 이건 좀 위험 신호였다.
이 세계에서 모든 만남은 사망 확률과 직결이 된다. 그리고 버니언이 이런 이상한 움직임을 보이는데 가만히 있으면 그것은 ‘비행동’으로 간주될 터이다.
저를 지배하고 있는 시스템은 아프다고 해서 봐주지 않는다, 절대로.
간단히 스튜와 빵으로 배를 채운 뒤 이온은 따라오겠다고 하는 에밀리를 겨우 달래 놓고 혼자서 복도를 걸었다.
걸음을 천천히 옮기며 난간을 지나가는 이온의 눈에 공작가에서 일하는 많은 이들의 면면이 들어왔다.
분주히 움직이는 사용인들과 시종, 그리고 기사들까지.
크레이거 공작가는 가신 가문만 이미 다섯 손가락을 넘겼다. 그 가문의 딸이나 아들들도 시녀나 시종으로서 들어와 있었다. 당연하지만 대부분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람들이었다.
‘……내 편을 만들어야 해.’
시종들의 아들딸들 중엔 이온의 또래도 있었으므로 원한다면 충분히 친하게 지낼 수 있을 테지만 그들이 주역이 되기까지는 수년이 걸릴 터였다. 지금 당장 곁에 두어야 하는 인사들은 아니라는 뜻이다.
반면 오랜 시간 혼자서 운신하기 어려운 만큼 자신의 의지대로 손발을 움직여 줄 사람은 당장 필요하다.
무엇보다 제 목숨을 카밀루스의 호의에만 맡겨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현실적으로 그가 온종일 지켜 주는 것이 아니니까. 그 녀석 역시 아직 열여섯 꼬맹이이기도 하고.
이온은 일부러 대놓고 저택의 홀을 지나 정문을 통해 정원으로 나섰다. 크레이거 공작이 출타 중인 지금, 자리를 비운 이들도 있었지만 아버지가 특히 신뢰하는 기사 몇이 보였다.
밖으로 나가자 공작의 명이라도 있었는지 자연스럽게 그 일부가 뒤로 따라붙었다. 이온은 힐끔힐끔 그들의 눈치를 살폈다.
자세히 보다 보니 그중엔 낯이 익은 이도 하나 섞여 있음을 알게 되었다.
‘밀크?’
버니언이 왔을 때 자신을 침상에서 일으켜 주었던 그 기사였다. 시스템이 대형견 같다고 평가했던 그 에렌스트 경 말이다.
그런 생각을 떠올리자 오늘 내내 가만히 있던 시스템이 일을 시작했다.
[본 오픈 월드를 이용하는 유저에게는 아래와 같은 기본 사항이 주어지니 유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상태 이상: 적의. 불특정 다수에 의해 사망할 확률이 있음.]
[상태 이상: 호의. 불특정 다수의 도움을 받을 확률이 있음.]
마치 ‘쟤는 어느 쪽이게?’ 하고 놀리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어차피 사람 속을 훤히 들여다볼 수는 없는 법이고, 어느 정도 도박은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 선택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몰라 긴장되긴 했지만 이온은 옷 안쪽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그러고 연기를 시작했다. 입을 막고 숨이 찬 것처럼. 어렵지는 않았다. 이 몸속으로 들어온 뒤 매일 하던 일이니까 말이다.
“하아…….”
배 속까지 깊게 숨을 들이켜며 옆에 있는 나무를 손으로 짚은 이온은 그 그늘 아래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러자 몇 발자국 떨어져 따라오던 에렌스트 경이 움찔했으나 다가오진 않았다.
그래도 일단 반응을 확인했으니 다음 계획으로 넘어가면 된다. 이온은 희미하게 웃고는, 다음엔 나무에 아예 기대어 콜록콜록 기침을 쏟기 시작했다.
그러자 곧바로 누군가 그의 어깨를 ‘탁!’ 잡았다. 생각보다 거센 힘에 놀란 이온이 상대를 확인했다. 자신과 비교해 훨씬 더 높은 곳에 얼굴이 있어서 눈을 보려니 고개가 저절로 들렸다.
검은 눈동자와 눈길이 맞은 순간이었다. 당혹감과 안타까움이 뒤섞인 눈으로 밀크, 아니 에렌스트 경이 그를 바라보며 권유했다.
“괜찮으십니까, 소공작. 소공작께서 견디시기엔 바람이 차니 어서 들어가시지요.”
제 발연기에 반응해 주다니 이렇게 고마울 데가.
“에렌스트 경?”
이온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그의 이름을 부르자 에렌스트 경의 입술이 매끄러운 호선을 그렸다.
“제 이름을 기억하고 계신다니 영광입니다, 소공작.”
그야 시스템이 알려 준 지 얼마 안 됐거든.
하지만 이온의 입에는 속생각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올라왔다.
“당연히 기억하지. 에렌스트 경은 능력이 출중해서 아버지께서도 평소에도 많이 신임하신다고 들었으니까. 저번엔 도와주어서 정말 고마웠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칭찬이 부끄러운 건지 에렌스트 경이 그 우유처럼 하얀 얼굴을 조금 붉혔다.
[플레이어가 알렉사이 에렌스트의 회유를 시작합니다.]
[본 진행은 플레이어의 생존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이온은 입술 사이로 비집고 나오려는 웃음기를 도로 안쪽으로 밀어 넣으며 말소리에 기침 소리를 섞었다.
“괜찮아. 그보다…… 흠.”
연기라도 기침을 하도 많이 하니 목소리가 갈라지려고 한다. 실제로 컨디션이 좋은 편이 아니라 이온은 스스로도 이것이 점점 연기인지 아닌지 구분이 안 되어 가기 시작했다. 빌어먹게 약한 몸 같으니.
에렌스트 경은 그를 방으로 되돌려 보내려는 듯 나무 대신 제 팔에 기대게 한 뒤, 손짓으로 공손히 루미에르홀의 입구를 가리켰다. 그에 이온이 몸을 틀어 돌아서는 동안 저음의 음성이 조곤조곤 귓가를 건드렸다.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궁금한 게 있는데 아버지가 아시면 크게 혼날 일이라서.”
일부러 주저하는 기색을 내비치며 주변의 눈치를 보는 척하자 에렌스트 경의 얼굴에 난처해하는 빛이 떠올랐다. 이온은 한 발 한 발 평소보다 더 천천히 뻗으며 답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그러다 영 반응이 없기에 재촉하는 의미로 또 기침하다가 큰 숨을 들이켜니 에렌스트 경이 안 되겠다 싶었는지 기사복의 겉옷을 벗어 걸쳐 주었다. 이온은 그의 따뜻한 체온이 저를 감싸 주는 것을 느끼며 옷깃을 끌어당겼다.
“이렇게까진 안 해도 되는데.”
에렌스트 경이 이온의 앞으로 몸을 옮겨 어깨를 맞춰 주는 척, 작게 용건을 물어 왔다.
“궁금한 게 어떤 일이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