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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병약한 도련님이 되었습니다 (25)화 (25/317)

그의 조심스러움은 충분히 이해될 만큼 확실히 저희 둘을 지켜보는 시선이 꽤 여럿이었다.

“서둘러 말씀해 주십시오. 보는 눈이 많으니.”

“카밀루스가 어떻게 지내는지 알아보고 싶어. 저녁에 내가 숲으로 갔던 날 기억하지? 그 이후로 안 보여서 걱정이 돼.”

어린애의 이점을 충분히 활용해 일부러 매달리는 듯한 어투로 말을 이어 갔다. 옷을 정리하는 에렌스트 경은 고개를 살며시 숙인 채였는데, 다행히 키가 한참 작은 이온에겐 그 단정한 얼굴에 비치는 표정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한마디로 말하면 누가 누굴 걱정하느냐는 의문이 담겨 있었다.

이온은 그렇지만 멈추지 않고 핵심적인 말을 꺼냈다.

“혹시 폐하께 많이 혼나서 ‘또’ 갇힌 건 아닌지…… 알지, 그 일?”

넌지시 묻는 말에 에렌스트 경의 얼굴이며 목소리가 단숨에 딱딱해졌다.

“소공작, 그 일은 황실에서 함구령을 내린 건이라.”

그제야 이온의 의문 하나가 풀렸다.

함구령……? 그렇구나. 그래서 다들 이렇게 조용한 거였어.

카밀루스에 대한 취급으로 미루어 보건대 함구령의 의미는 적어도 둘일 것이다.

이온 크레이거의 대죄, 그리고 황실의 치부.

그 추론을 떠올린 순간 시스템 메시지가 흘렀다.

[플레이어가 과거의 기억을 찾기 위한 조건 중 하나를 충족하였습니다. (1/3)]

[조건 1: 카밀루스 발데라스 클로델과 혈육을 제외한 제삼자로부터의 정보 습득]

[충족하기 전의 조건은 잠금 처리되어 있어 플레이어의 확인이 불가합니다.]

이건 세 단계였구나.

어쨌든 수확을 얻었다는 데에서 이 대화는 이미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

“미, 미안.”

이온은 전혀 몰랐다는 무구한 얼굴을 하고 초록빛 눈을 애처롭게 깜빡이며 얼른 태세를 전환했다. 그에 에렌스트 경이 동요했는지 동공이 흔들리는 게 보였다. 그는 고개를 한 번 저은 뒤 이온의 팔을 붙잡아 주며 집 앞으로 이끌었다.

“저에게 미안해하실 이유는 없습니다. 그만 들어가서 쉬시지요.”

“하지만.”

“……?”

대화를 이대로 끝내서는 안 되는 이온이 화제를 되돌리려 하자, 에렌스트 경이 고개를 기울였다.

“가능하면 카밀루스에게 전하고 싶은 말도 있고…….”

말끝을 흐려 이목을 끈 이온이 식당에 가기 전, 틈을 이용해 옷 소매 안쪽에 미리 꽂아 두었던 작은 쪽지를 꺼냈다. 손바닥 안에 그것을 넣은 뒤 손가락을 펴 살짝 보여 주자 에렌스트 경의 미간이 좁혀졌다.

여기서 에렌스트 경이 거절하면 이온은 앞날을 헤쳐 나가기 어려워질 수도 있다. 그러니 인생을 건 엄청난 도박을 하는 셈이었다.

수일이 지났지만 카밀루스의 독수리만 종종 보일 뿐, 정작 본인은 안 나타났다. 이렇게 가만히 있다가는 3회 만남 퀘스트 클리어는커녕 두 번째도 여의치 않아질 터였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는 건 개죽음을 자초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없었다.

에렌스트 경에게서 딱히 반응이 없자 이온은 실망한 표정을 꾸며 내며 눈꺼풀을 살며시 내려 바닥을 쳐다보았다. 긴 속눈썹이 내려앉아 그의 눈가에 그늘을 만들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어렵겠지……? 저택 밖으로 나갔다가, 쿨럭, 쓰러지기라도 하면 큰일이기도 하고…… 공작께서도 카밀루스를 만나는 걸 허락하지 않으실 테니까?”

말을 마치고 이온이 손수건을 꺼내 입을 가렸다. 숨이 벅차 가슴을 들썩이는 모습을 보는 에렌스트 경은 여전히 주저하는 듯했다.

그러나 이온이 기침을 하다가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자, 고뇌하던 에렌스트 경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기침을 계속하시는 걸 보니 손수건에 먼지가 많은 모양입니다. 새로운 걸 달라고 하녀에게 이야기해 두지요.”

그러고 손수건에 가려진 이온의 손에 그의 체온이 닿았다. 그곳에 들려 있던 쪽지가 슥 빠져나갔다.

그 감촉을 느끼며 이온이 눈웃음을 사르르 지었다.

“고마워, 에렌스트 경.”

[플레이어가 알렉사이 에렌스트의 회유에 성공하였습니다.]

* * *

3일 뒤 황태자궁 오찬에 초대받았어.

- 이온

저녁때 함께 식사하자는 황제의 부름에 잠깐 황궁에 들었다가 누군가와 부딪쳤는데, 그때 건네받은 쪽지였다. 카밀루스는 이온의 글씨가 적힌 종이의 표면을 어루만지다가 이내 표정이 심각해졌다.

며칠 전에 버니언이 이온을 찾아갔단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한동안 이온에게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으면서, 갑자기 마법사 하나와 크레이거 공작가에 들이닥쳐 들쑤셔 놨다는 이야기를 듣고 당장 달려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카밀루스의 파란 눈이 제 방문과 창문에 그려진 마법진을 노려보았다. 침대 모서리를 짚은 그의 손 위에 힘줄이 불거졌다.

〈저는, 북부로 가고 싶지 않습니다. 황도에 남겠어요.〉

그런 이야기를 하고 돌아오자마자 카밀루스는 저택에 구금됐다. 황제의 명을 받은 기사들이 몰려와 자작 저를 감쌌고, 대문과 현관문에 잠금 마법을 걸었다. 그가 방 안으로 들어가고 난 뒤에는 방에 있는 모든 문이 열리지 않게 되었다.

다행히 굶겨 죽일 생각은 없었는지 황궁 하녀들 몇이 함께 파견되어 그에게 끼니를 날라 주었으나, 그것은 그만큼 쉽게 꺼내 줄 생각은 아니란 뜻으로 읽혔다.

‘못 나가는 건 아니지만.’

황궁에 다녀오느라 마법을 풀 때 어떤 상쇄 마법을 쓰면 되는지는 이미 파악했다. 아니, 사실 저딴 마법은 제 실력이면 얼마든지 파훼할 수 있다. 다만 그렇게 난리를 쳤다간 다음엔 경계가 더해질 터다. 어쩌면 마탑의 손을 빌릴지도 모르고, 그렇게 되면 카밀루스로서도 골치가 아파질 것이었다. 그러니 꼭 필요할 때를 위해서는 참아야 했다.

카밀루스가 침대에서 일어나 창문 쪽으로 다가갔다. 그의 눈이 창틀이라는 제한된 시야 내에서 바쁘게 움직였다. 저택 주변을 감시하는 기사들의 수는 대략 서른 명 정도로 파악이 됐다. 기사복을 보면 전부 마법대대 소속이었다.

무의식중에 힘이 들어간 카밀루스의 손에서 쪽지가 구겨졌다.

“버니언.”

그가 이온에게 초대장을 보낸 게 아마 자신 때문이리라는 사실이 쉬이 예측됐다. 다만 그가 왜 이 시점에 움직이는 걸까. 이전에는 이런 적이 없는데.

설마, 순순히 북부에 간다고 하지 않아서? 그래서.

‘황제가 일부러 싸움을 붙이려고 부추긴 건가.’

그의 성격을 생각해 보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얘기다. 그는 후계인 버니언이 더 강한 군주가 되기를, 반대로 카밀루스는 더 고분고분한 개가 되기를 원했었으니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카밀루스의 입가가 비뚤게 올라갔다. 그의 손이 창문에 그려진 마법진을 매만지자 붉은빛을 띠던 것에 살며시 푸른빛이 감돌았다.

아무래도 3일 뒤가 자신이 이온을 찾으러 가야 할 때인 듯싶었다. 그가 자신을 필요로 하고 있으니 안 갈 이유는 전혀 없었다.

* * *

다각, 다각…….

말발굽이 바닥을 치는 소리가 서서히 지겹다고 느껴질 무렵이었다. 황성의 통과 절차를 위해 마차의 문을 열고 신분 증명을 했다. 그 뒤 황궁 일원을 가로질러 깊게 들어가자 황태자궁이 나왔다.

“소공작, 도착했습니다.”

이온은 문이 열리기 전에 욤뇽이를 마차의 의자 밑에 내려놓고 속삭였다.

“여기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야 해. 알았지?”

“꾸…….”

욤뇽이가 크기를 줄이면서 자기도 데려가 달라고 주장하는 듯했지만 이온은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고 몸을 바로 했다.

마차의 문이 다시 열리자 황태자궁에서 마중 나온 시종이 보였다.

“오셨습니까, 소공작.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온은 짧게 미소하고는 공작가에서 데려온 기사, 에렌스트 경의 부축을 받아 바닥에 내려섰다.

대동한 기사를 궁 안에 들일 수 없다는 말에 에렌스트 경은 밖에 세워 두고 시종의 안내를 따라 화려한 샹들리에가 배치된 황태자궁의 홀로 들어섰다.

오찬 준비를 했다기에 분주할 줄 알았던 황태자궁의 분위기는 생각보다 그리 소란스럽지는 않았다. 그에 의아스러워하며 궁 내부에 깔린 붉은 융단을 따라 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굽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버니언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여기야, 이온.”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홀과 복도를 분리해 둔 계단 위에 버니언이 서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뒤에 열린 문을 통해 어렴풋이 바깥의 풍경이 비치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정원에서 막 들어온 참인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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