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황태자답게 자신만만함이 가득한 미소를 띤 그가 이온 쪽으로 또각또각 걸어왔다. 겉보기에는 예의도 모르는 망나니처럼 생겨서는 정복을 차려입으니 그 나름대로 오늘은 저번보다는 좀 멀쩡해 보였다.
그렇지만 이온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온…….’
전부터 자꾸만 성이 아닌 이름을 부르는 데 왠지 모를 불편함이 있었다. 그가 친근한 척하는 게 속을 좀 거북하게 했다.
하여 이온은 그가 완전히 다가오기 전에 허리를 깊이 숙였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오찬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일부러 선을 그으니 버니언이 고개를 기울였다.
“뭐 그렇게 인사가 딱딱해? 우리, 친구 아닌가?”
아닌데요.
대답은 속마음으로 대신한 이온이 고개를 들어 조용히 웃기만 했다. 그러자 버니언이 어쩔 수 없다는 양 고개를 흔들며 좀 더 다가섰다.
몸이 가까워지자 거부감에 저절로 뒷걸음질 칠 뻔한 것을 이온이 간신히 참고 있는데, 한술 더 떠 어깨 위로 버니언의 손이 올라왔다. 정말 친한 친구를 맞이한 듯이 말이다.
저보다 조금 키가 큰 버니언이 어깨동무를 해 오자 체구가 작은 이온은 거의 반쯤 안긴 상태가 되어 버렸다.
갑자기 훅 끼쳐 오는 그의 체향이 꺼림칙해 숨을 꽉 참고 있는데, 버니언은 그런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자신이 나타났던 문 쪽으로 손짓을 했다.
“자, 이쪽으로 가자. 네가 몸이 안 좋다고 해서 따뜻한 음식 위주로 준비해 놓으라고 했어. 입맛에 맞았으면 좋겠군.”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다른 영식들은 아직입니까?”
그래도 체면이 있는데 싫다면서 황태자궁 시종들이 다 있는 앞에서 그의 손을 쳐 낼 수도 없는 노릇이라, 이온은 시선만 다른 곳으로 둔 채 그리 물었다.
그러자 마치 이온을 레이디 대하듯이 에스코트하던 버니언이 픽 웃음을 흘렸다. 이어 나온 말은 이온의 머릿속을 차갑게 식게 하기에 충분했다.
“다른 영식?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난 너만 초대했는데.”
……뭐?
순간적으로 동요한 이온은 제 표정을 갈무리하지 못하고 얼굴에 온 마음을 내비쳤다.
〈……3일 뒤, 영식께서 본 태자의 오찬 자리를 빛내 주시면 더없는 영광이겠습니다.〉
일전에 버틀러가 읽어 준 편지의 내용은 분명히 그랬다. 단체로 초대했으니 한 자리만 채워 달라는 뉘앙스였다.
이온은 곧바로 자신이 속았음을 알아차렸다.
‘일부러 그런 거야.’
뒤통수가 꽤 얼얼한 상황이었다. 그에 확 굳어 버린 그의 표정을 보고 버니언이 눈을 슥 휘었다.
“뭘 그렇게 놀라? 크레이거 공작가의 영식을 이 나라의 황태자가 홀로 만나는 게 문제라도 되는 건가?”
아니, 그의 말대로 황태자가 공작가 영식을 따로 만나는 일은 예법에도 어긋남이 없고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다만 버니언 퍼렌도 클로델, 이 녀석은 너무 위험했다.
이온은 할 수만 있다면 당장 이곳을 탈출하고 싶어졌다. 그러나 버니언이 그런 이온의 마음을 배려해 놓아줄 리는 없었다. 그는 이온을 데리고 어느새 잔잔한 햇살이 비치는 정원으로 나섰다.
사박, 사박.
잘 관리된 잔디를 밟는 감촉은 좋았지만, 에스코트해 주느라 버니언의 손이 닿은 팔은 벌레가 기어가는 것처럼 불편하기만 했다.
게다가 황태자궁 안에 들어오면 안 된다는 말에 제 기사와 버틀러들을 두고 왔기 때문에 심리적으로 더 불안했다.
뒤를 따라오는 이들은 전부 황태자궁의 시종들과 기사들뿐.
자신을 도와줄 사람은 이곳에 없었다.
갑자기 숨이 턱 막히는 느낌에 이온이 기침을 하자 버니언이 시선을 살며시 내려 눈높이를 맞췄다.
“이온, 괜찮아?”
이온은 급하게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는 것을 핑계로 그의 팔에서 벗어났다. 그러고 입을 가리며 고개를 숙였다.
“괘, 괜찮습니다.”
“잡아 주지 않아도 돼?”
“네, 콜록, 자리가 멀지 않으니까요.”
“뭐, 그렇다면야.”
이온이 계속해서 잔기침을 해 대며 버니언을 따라갔다. 그러면서 바쁘게 눈을 굴려 주위를 둘러보고, 생각을 떠올렸다.
‘내가 이곳에 오기 전에 해 둔 안전장치라고는…….’
에렌스트 경을 통해 카밀루스에게 보낸 쪽지 한 장이 전부였다.
카밀루스는…… 무사히 쪽지를 받았을까? 여기로 와 줄까? 올 수 있는 상황이긴 한가?
하지만 쪽지에 찾아와 달라는 이야기까지는 적지 않았는데.
“이 자리에 앉아, 이온.”
상념을 깨듯이 버니언이 목소리가 들려와 고개를 드니 벌써 정원의 가운데에 배치된 테이블 앞이었다. 황태자궁 시종이 빼 주는 의자에 먼저 앉은 버니언이 맞은편을 권유하고 있었다.
“왜 그렇게 넋을 놓고 있어?”
이온은 굳어 가는 표정을 겨우 펴며 의자에 앉았다. 테이블 위는 아직 빈 상태였다.
“아, 송구……합니다. 황태자 전하와 둘이서만 식사를 한다는 생각에 그만 긴장이 되어서.”
급조한 변명에 버니언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전체적으로는 웃는 듯이 보였지만 이온은 자신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그의 파란 눈이 무척 부담스러웠다.
생각해 보면 지난번 공작가에 찾아왔을 때도 비슷하게 바라본 적이 있었다. 저 시선의 의미가 대체 무엇인지, 이온으로서는 해석하기가 다소 어려웠다.
그래도 앉자마자 음식이 테이블 위로 하나둘씩 올라와 눈길이 저절로 그곳을 향했다. 수프를 버니언이 먼저 떠먹으며 가볍게 운을 떼었다.
“그래, 식사를 우리 둘만 하는 것은 처음이지?”
심지어 처음이면, 대체 왜 부른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병중인 걸 뻔히 알고 있으면서.
“평소에 다른 영애나 영식들과 많이 즐기십니까?”
“그럴 리가 있나. 보통은 혼자 먹거나, 폐하께서 부르면 귀족들과 같이 먹는 정도지. 우리 또래 말고 늙은이들 말이야.”
“그렇군요.”
어쨌든 평소에 안 하던 짓을 하는 것은 속셈이 따로 있기 때문일 터였다.
그때, 문득 공작 저에서 있었던 일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이 목걸이가 카밀루스 자작이 만들었다는 마나석인 모양이죠?〉
옷 밖으로 빠져나가 버니언의 손바닥에 얹어졌던 마나석 목걸이. 작은 마나석을 이리저리 뒤집으며 유심히 보던 그의 눈…….
‘목적이 혹시 마나석인가.’
만약 버니언이 무력으로 이 자리에서 빼앗으려 한다면 이온으로서는 저항할 방법이 여의치 않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 사망 확률이.
[현재 플레이어가 사망할 확률은 34%입니다.]
생각하자마자 알아서 시스템창이 펼쳐졌다.
분명 20퍼센트나 10퍼센트 후반대까지도 간 적이 있었는데, 요즘은 30퍼센트 이하로는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몸의 컨디션이 많이 안 좋으냐 하면 그것은 또 아니었다. 20퍼센트대일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니 저 사망 확률에는 저주나 몸 상태와 무관하게 뭔가 다른 요인도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았다. 이온은 지금, 그것은 버니언이라고 추측했다.
이 세계에서의 패시브, ‘적의’ 때문이었다.
불특정 다수에게 ‘사망할’ 확률이 있다고 했으니, 악의를 가진 사람이 많을수록 사망 확률이 높아지는 것일지도.
그 추측이 맞는다면 지금은, 정말로 죽음이 목전에 있을지도 몰랐다.
이 상황에서 버니언이 진짜 나쁜 마음을 먹을 경우 이온로서는 저항할 수단이 전무했다. 조금만 움직여도 숨이 차는 이 약해 빠진 몸으로 그와 격투를 벌일 수도 없는 법이니.
* * *
황성 외부, 클로델 자작의 저택.
카밀루스가 사는 그 집을 지키던 기사 하나가 방 창문을 봉해 둔 마법진이 사라진 것을 알리자, 그 즉시 기사들이 집 안으로 뛰어들었다. 일사불란하게 홀을 지나 2층에 위치한 카밀루스의 침실로 올라가는 기사들의 발걸음이 분주했다.
그중 선두에 선 자가 복도를 성큼성큼 걸어 방문 앞에 서더니 예의상 노크를 했다.
“자작님, 문을 열겠습니다.”
허락을 구하는 것이 아닌 통보하는 말이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활짝 열렸다.
“…….”
집 안에 뛰어든 시점에 예상했던 대로 방 안엔 사람 그림자가 없었다. 침대 위에 얌전히 앉아 있어야 하는 카밀루스 클로델 자작은 사라지고, 아침에 넣어 준 음식 그릇만 빈 채로 남았을 뿐이었다.
선두에 선 기사가 굳은 표정으로 발을 쿵, 구른 뒤 제 부하들을 돌아보았다.
“당장 주위를 수색해!”
“예!”
날카로운 명령이 떨어지자 뒤를 따라왔던 기사들이 분주하게 흩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