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한 번 더 방 안을 훑고 뒤돌아 도로 계단을 내려오던 중, 바로 보고가 들어왔다.
“부단장님, 뒤편 정원에 이동 마법진이 그려져 있습니다.”
부단장이라 불린 기사는 망토를 휘날리며 당장 건물의 뒤편으로 향했다. 보고대로 그곳엔 푸른빛을 띠는 마법진이 남은 상태였다. 마법진의 흔적이 아직 존재한다는 것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것을 굳은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으니 옆의 기사가 머뭇머뭇 설명해 왔다.
“마법진만으로는 어디로 갔는지 추측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일을 제대로 못 한다며 혼낼 것이라 예상한 것과 달리 부단장은 덤덤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일반적인 곳으로 갔다면 자작에게 이런 마법진은 필요 없었을 거다.”
실제로 카밀루스의 마법 실력은 이미 범인의 수준을 한참 뛰어넘었다. 어린 나이임에도 대부분의 마법을 스펠을 외우지 않고 펼칠 수 있다고 들었다.
마법에서 스펠을 외울 필요가 없다는 것의 의미는 생각보다 컸다. 우선 마법 발동 시간이 단축되고, 영창과 마법진이 노출되지 않아 상대가 시전자의 마법을 미리 파악하기 어렵다는 이점이 있었다.
그런 카밀루스가 굳이 마법진을 써야 하는 이유라면 이 시점엔 하나였다. 결계 때문에 무영창 마법이 통하지 않는 황성으로 향한 것이다.
“그럼…….”
부단장은 이곳에 오기 전날 저녁, 황제가 미리 말해 둔 대로 자신을 찾아온 황태자 버니언 클로델을 만났다.
〈그대에게 미리 명해 둘 것이 있다.〉
망나니로 소문 난 그 황자.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가 현 황제의 아들답게 명석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상황 분석은 정확했고, 예측도 근거가 있었다.
황태자의 명은 총 두 가지였다.
하나는 카밀루스 자작을 그의 저택에 구금해 둘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부단장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지금이 바로 버니언이 말했던 두 번째 명을 수행해야 할 때임을 알아챘다.
그가 자신이 이끄는 기사들에게 외쳤다.
“황태자궁으로 간다!”
* * *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도대체가 알 수 없었다. 이온은 그만큼 잔뜩 긴장한 채 식사를 이어 가는 중이었다. 심지어는 버니언이 실수로 식기 부딪치는 소리를 낼 때도 신경 쓰여 반사적으로 눈길이 갔다.
심리적인 불편함은 몸에도 안 좋은 영향을 끼쳤다. 안색이 창백해지고 간헐적으로 숨이 차 기침을 하자 아니나 다를까 버니언이 식사하다 말고 질문을 던졌다.
“왜 이렇게 긴장하고 있어? 이곳이 그렇게 불편한가? 밥 먹는 속도가 거북이야.”
황태자궁의 정원은 객관적으로 보기엔 평화롭고 여유로웠다. 햇살과 바람도 적당했고, 가을 날씨에 맞게 정취도 있었다. 그럼에도 버니언 한 사람 때문에 긴장의 끈을 놓기가 쉽지 않았다.
이온은 말을 더듬지 않도록 잠시 휴지를 두었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그저 생각이 많아서 손이 느렸습니다.”
“몸이 많이 안 좋다는 건 알고 있으니까 천천히 즐기도록 해.”
“배려에 감사합…….”
자연스럽게 인사치레를 하려는데 버니언이 돌연 식기를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 맞은편에서 테이블을 돌아 걸어오는 모습에 이온이 고개를 들어 쳐다보자 그가 손을 올려 테이블을 짚었다.
갑자기 뭔가 싶어 이온 역시 들고 있던 포크를 살며시 내려놓자, 버니언이 한쪽 엉덩이를 식탁에 걸쳐 앉으며 이온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얼굴이 바짝 가까워진 순간, 버니언이 지금껏 쓰고 있던 친절의 가면을 한 꺼풀 벗었다.
“왜, 내가 너에게 해코지라도 할까 봐?”
“……전하.”
버니언이 입꼬리를 슥 올려 웃더니 이온의 턱 밑에 제 손가락을 받쳤다. 다소 강압적인 손길로 턱을 들어 올린 그가 작게 속삭여 왔다.
“카밀루스가 널 그렇게 소중하게 여긴다면서? 얼마 전 저녁에도 공작 저에 널 보러 찾아갔다는 소리를 들었어.”
“…….”
그 일은 공작가 안에서만 알고 넘어간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이온은 버니언이, 아니 황실이 생각보다 사소한 것까지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한데 정작 그 긴장을 자아낸 이는 엉뚱한 소리를 입에 올렸다.
“나도 너랑 친해지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돼? 어떻게 하면 네가 날 덜 싫어할까.”
평생 뭘 해도 안 돼요. 그렇게 대답하고 싶었지만 입을 멋대로 놀릴 수는 없었다.
이온은 초록빛 눈동자로 그를 똑바로 올려다보며 최대한 공손한 어투로 답했다.
“제가 전하를 싫어하지는 않습니다. 어찌 감히 그럴까요.”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거짓말을 하는구나, 너는?”
“무슨 말씀이신지.”
계속 시치미를 떼자 버니언이 나 참, 하고 작게 탄식을 뱉었다. 그러고는 이온의 목덜미를 확 낚아채더니 끌어당김과 동시에 그도 좀 더 몸을 기울였다.
두 사람의 몸이 거의 겹치듯이 가까워졌을 때였다. 낮아서 음산하게까지 느껴지는 버니언의 목소리가 이온의 귀를 질러왔다.
“나를 혐오하고 있잖아. 내가 그 정도 눈치도 없을까 봐?”
혐오라.
이온은 자신이 이 몸으로 들어오기 전, ‘이온 크레이거’ 역시 그를 그다지 호의적으로 대하지 않았음을 알아챘다. 역시 원래 몸의 주인도 그리 멍청하지는 않았던 모양이지.
“설마요.”
“그 설마는 어떤 설마야?”
그 정도 눈치는 있었을 거라는 뜻의 설마였다. 그러나 친절히 해설을 덧붙여 줄 이유는 없었으므로 이온은 그저 입가에 미소만 매달았다. 그러다 버니언의 손힘이 느슨해진 틈에 몸을 돌려 냅킨으로 입가를 닦았다.
점심때치고도 바람이 차서 기침이 조금씩 나왔다. 이온은 이 핑계면 되겠다 싶어 기침을 하느라 옅게 눈물마저 어린 눈으로 버니언을 올려다보았다.
“전하.”
“말해 봐.”
“제가 야외에 오래 있으면 많이 힘들어서, 이만 공작 저로 돌아가도 되겠습니까?”
한데 질문이 나오자마자 버니언은 거의 준비해 놓은 양 쉽게 거절의 말을 입에 올렸다.
“무슨 소리야? 당연히 안 되지.”
“예?”
그래도 대놓고 요청하면 떨떠름하게나마 돌려보내 줄 거라 생각했던 건 완전한 제 착각이었다.
버니언이 이번엔 이온의 가는 팔을 덥석 붙들었다.
“아……!”
생각보다 강한 악력으로 잡아 오는 것에 이온이 작게 신음을 흘리며 팔을 빼내려 했다. 그러나 버니언은 그를 절대 놓치지 않았다.
“이온, 난 아직 목적 달성을 못 했거든.”
“무슨.”
“꽤 여러 개인데 말이야. 하나는…….”
말하면서 버니언이 돌연 이온의 목 쪽으로 손을 뻗었다. 이온은 아까 예상했던 대로 제 마나석을 빼앗으려는 것임을 알아챘으나 팔을 꽉 붙잡혀 힘을 쓰기가 어려웠다.
그에 피하지도 못하고 뻗어 오는 손을 무력하게 보고만 있는데.
타악!
어디선가 끼어든 제삼자의 손이 버니언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갑작스러운 일에 버니언이 놀란 듯 잡힌 부위에서부터 고개를 돌려 상대를 확인했다. 그러고는 미간을 확 구겼다.
“……뭐야, 너?”
제게 닿지 않은 손에 놀란 건 마찬가지였기에 당황한 이온도 버니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가 눈을 크게 떴다.
그야, 설마 저를 도와준 게 황태자궁의 시종이나 기사일 거라고는 추호도 생각 안 했지만.
“카밀루스?”
언제 온 건지 모를 카밀루스가 그들 바로 옆에 있었다. 카밀루스의 발밑에서 마법진의 푸른빛이 서서히 사그라드는 것이 보였다.
“데리러 왔어, 이온.”
음성을 듣고 나서야 이온은 현실감이 확 들었다.
아까 잠깐 눈앞이 깜깜해져 카밀루스가 왔으면 좋겠다고 머릿속으로 생각은 했지만 겨우 황태자궁에 초대받았다는 쪽지 한 장에 올 리가 없다고, 그렇게 여겼다.
하지만 왔다. 진짜로 카밀루스였다.
이온이 멍해 있는 사이 버니언이 제 손목을 잡은 손을 쳐 내려는데, 그 전에 카밀루스가 무표정하게 먼저 버니언을 밀어 냈다. 그에 몸을 어설프게 걸치고 있던 버니언이 식탁 밖으로 밀쳐지면서 휘청이자 주변에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전하!”
하지만 겨우 몸의 균형을 찾은 버니언이 뛰어오려는 시종들과 기사들을 손을 들어 막았다.
“멈춰!”
그렇게 제 편의 접근을 막은 버니언이 카밀루스를 노려보면서 하, 하고 실소했다.
“너, 이 새끼, 여긴 어떻게 들어왔…….”
말하는 중간에야 카밀루스의 발밑에 그려진 마법진을 발견한 버니언이 어이없어했다. 결계가 쳐진 만큼, 황성 내에서는 엄격히 금지되는 마법 몇 가지가 있었다. 이동 마법이 그중 하나였다.
“감히 마법으로 내황성을 침입해? 제정신이 아니구나? 게다가 너, 저택에 구금 상태 아니었냐?”
‘갇혀 있었구나.’
버니언의 말을 듣던 이온이 걱정 어린 눈으로 카밀루스를 보았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개의치 않는 모양인지 버니언의 말엔 일절 대꾸하지 않고 제 할 말만 툭 뱉었다.
“이온한테 개수작 부리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