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온한테 개수작 부리지 마.”
“개수작……? 천한 사생아 새끼가 지금 나한테 감히 개수작이라고 했어?”
카밀루스에게 모욕당한 버니언의 얼굴이 빨개지고, 어느새 주먹을 쥔 손은 금세라도 날아가 카밀루스를 팰 듯이 부들거렸다. 그렇지만 그는 아버지가 일전에 따로 불러 했던 말을 상기했다.
〈네가 계속 이대로 한심하게 산다면 짐이 너에게 이 제국을 넘겨줄 수 있겠느냐?〉
머리를 써서 카밀루스를 추방해야 한다는 말 역시.
그에 간신히 화를 가라앉혀 가는 버니언의 앞에서 카밀루스가 앉아 있는 이온의 손을 잡아 올렸다.
“그만 돌아가자, 이온. 데려다줄게.”
이래도 되는 건가. 이대로 가 버리면 사고를 친 카밀루스가 또 어떻게 되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손을 잡고 끌어당기는 힘에 이온은 순순히 끌려가 주었다. 일단 이 자리는 오래 있을 곳이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럼 실례하겠…….”
“가긴 어딜 가!”
이온이 떠나가려 하는 순간, 버니언이 거의 달려드는 것처럼 다가와 이온의 반대편 팔을 낚아챘다. 붙들려 몸이 비틀거리자 카밀루스가 위협적으로 경고했다.
“그 손 안 놓으면 난 네 팔을 자를 수도 있어, 버니언.”
그러나 버니언은 눈 한 번 깜짝 안 하고 카밀루스를 사납게 쳐다보았다.
“분위기 파악 안 되나? 여긴 황태자궁이야. 이곳에 나타난 순간부터 이미 넌 선을 넘었어. 북부로 강제 추방 당하고 싶은 모양이지? 아니면 저 저주받은 탑에 또 갇히거나!”
바로 옆에서 외치는 소리가 너무 커 머리가 다 울렸다. 그러나 이온은 양쪽 팔이 각각 붙들린 탓에 귀를 막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버니언이 탑을 가리키며 외치는 통에 덩달아 돌아보았는데, 마법진 아래 위치한 그것을 보고 있자니 아무 감흥도 없었던 이전과 달리 두통이 몰려왔다.
무언가 기억나려고 하나?
그렇지만 시스템은 아직 기억 상실 상태 이상이 해제됐다는 이야기를 해 주지 않았다.
그사이 버니언은 이온의 팔을 더 꽉 잡아 강제로 들어 올렸다. 옷 아래의 하얀 팔에 멍이 들 만큼 강한 힘으로.
“왜, 아니면 이번에도 이 녀석이 널 구해 줄 것 같아?”
이온이 아파 앓는 소리를 내자 카밀루스가 이를 악물었다.
“놓으라는 소리 못 들었어?”
“이것 봐. 이젠 네 구원자께선 저주 때문에 힘이 없어 보이시는데…… 안 그래, 이온?”
이온에게로 향한 버니언의 얼굴은 사정 모르는 이들에게는 일견 해사해 보일 수 있겠으나 이온은 저를 압박하는 두 눈이, 그 안의 검은 동공이 유난히 소름 끼쳤다. 거기에 빨리 대답하라는 의미로 팔을 금세 부러뜨릴 것처럼 강한 악력을 주는 탓에 이온의 입에선 저절로 말이 끊겨 나갔다.
“놓아, 주시죠, 전하. 아픕니다…….”
이온이 힘들어하자 더는 참지 못한 카밀루스가 버니언의 손을 강제로 떼고, 이온을 자신의 등 뒤로 숨겨 버렸다. 그런 뒤 그가 자신보다 조금 작은 버니언을 내려다보며 잘라 말했다.
“북부로도, 저 탑으로도 난 안 가.”
그러고 그가 버니언에게 한 발짝 다가서며 낮게 속삭였다. 오로지 버니언만 들을 수 있도록.
“그렇지만 네가 계속 이온 옆에 얼쩡거리면, ‘괴물’이라고 부르는 힘이 어느 정도인지는 충분히 보여 줄 수 있지. 지금 이 자리에서도 말이야.”
명백한 협박의 말을 듣고 버니언의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닮지 않은 자신의 이복형제가 서늘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며 읊는 겁박에 짓밟힌 가슴이 쿵쿵 뛰었다.
돌연변이로 태어난 카밀루스 클로델. 그 타고난 강대함에 대해서는 황제나 황후를 통해 이야기만 들었지, 실제로 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이 순간에는 아주 선명한 위협으로 다가왔다.
버니언은 제 주위에서 일렁이는 살기를 느꼈으나 애써 공포를 억누르며 대꾸했다.
“네가, 날 협박하는 거야? 이 사생아 새끼가…….”
“감히!”
말이 끝나기 전에 카밀루스가 그의 말허리를 끊었다. 순간적으로 기세에 눌린 버니언이 놀리던 입을 멈추었다. 카밀루스는 그의 단정히 정리되어 있던 크라바트를 손으로 잡아 끌어당기며 버니언의 귓가로 입술을 바짝 가져다 댔다.
“기어오르지 마, 버니언. 나는 더 이상 안 참아. 그렇게 살지 않아.”
“기어올라……? 안 참으면 네가 어쩔 건데? 내 자릴 뺏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질문을 받은 카밀루스가 차게 웃었다.
“못 할 것 같나?”
한마디에 제대로 역린이 건드려진 버니언은 순간적인 화를 참지 못했다.
“이 개자식이……! 읏!”
그러나 발길질은 가볍게 피해 버리고 날아오는 주먹은 중간에 붙잡아 막은 카밀루스가 곧장 버니언을 밀쳐 냈다. 그 때문에 꼴사납게 뒤로 넘어져 버린 버니언이 카밀루스를 올려다보며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분명히 마법은 몰라도 힘 자체는 자신이 우위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제 보니 아니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그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그동안 카밀루스가 저를 봐줬다는 걸 알아 버린 순간 수치심이 확 올라왔다. 그것도 황태자궁의 기사들과 시종들 앞에서 까발려지다니 이런 굴욕이 따로 없었다.
“너, 뭐야? 너, 너…….”
버니언은 충격으로 말조차 제대로 잇지 못했다. 이건 적어도 버니언에게만큼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었다.
카밀루스가 비록 그 어미가 누군지도 모르는, 아니 공공연히 마녀의 아들이라 불리는 사생아라고는 하지만 결국 버니언을 위협할 수 있는 건 그뿐이었다.
아버지인 오브라이언 황제도 그를 눈 밖에 둔 척했지만, 그건 말 그대로 ‘척’일 뿐이었다. 버니언은 그 냉혹한 성격의 황제가 실은 카밀루스를 가엽게 여기고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제 손으로 직접 탑에 가두고 학대해 왔으면서. 아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러니 버니언에게 있어 무엇 하나 그에 비해 밀리는 구석이 있다는 사실은 결코 가볍게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카밀루스는 상대가 어떤 타격을 받았든 알 것 없다는 양 버니언을 눈 아래로 바라보았다.
“아직도 모르겠어? 넌 내 상대가 아니야. 능력도, 심지어 머리도 안 되잖아.”
지적을 들은 버니언이 얼굴을 확 붉혔다. 그의 눈이 제가 오늘 초대한 손님을 가로채어 데리고 가려는 카밀루스의 등 뒤를 집요하게 좇았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버니언의 눈길은 다른 사람을 향했다.
제가 아까 했던 것처럼 가녀린 어깨에 손을 얹고 에스코트를 하듯이 팔을 붙잡아 부축하는 카밀루스와 자연스럽게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온을 보면서 버니언은 제 안의 무언가가 자극을 받았음을 느꼈다. 울컥 가슴이 뜨거워졌다.
‘이온.’
햇살 아래 밝게 빛나는 밀빛 머리가 가볍게 살랑이는 것이 시야에 들어오자 더는 안에서 솟아오르는 충동을 참을 수 없게 되었다.
그의 입에서 사나운 명령이 터져 나왔다.
“이온 크레이거를 잡아!”
표적이 저라는 사실에 흠칫한 이온이 버니언을 돌아보았고, 그 바람에 카밀루스의 품에서 조금 벗어났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기사 하나가 이온을 카밀루스와 떨어뜨렸다. 그리고 포위는 눈 깜짝할 사이에 이루어졌다.
비틀거리는 이온의 앞뒤로 칼끝이 번뜩였고, 버니언은 그제야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온!”
워낙 예상치 못한 타이밍이라 이온을 놓쳐 버린 카밀루스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온은 제 주변을 둘러싼 기사들을 돌아보다가 버니언와 눈길을 맞췄다. 버니언은 이 상황이 유쾌한지 몹시 즐거워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광기 어린 얼굴을 보고도 버니언이 미친놈처럼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이었다. 아무리 황태자라고 해도 공작가의 아들을 이런 식으로 대우할 수는 없는 법이니.
“뭐 하시는 겁니까…… 전하.”
“뭐 하는 거냐고? 하하.”
반문하면서 버니언이 기사들을 헤치며 이온의 뒤로 걸어왔다. 무례를 참다 못한 이온이 그를 돌아보며 한마디 했다.
“전하께서 지금 저희 크레이거 공작가를 우습게 보시는 겁니까?”
“우습게 보냐고?”
하지만 이 정도로는 버니언을 동요시킬 수 없었다. 그가 웃음소리를 시원하게 내뱉으며, 뒤에서 얼굴을 불쑥 내밀어 이온의 귓가에 제 입을 가져다 댔다.
옅은 숨소리와 함께 낮은 속삭임이 밀려들었다.
“당연하지. 너희 크레이거가는 이 황가에 수백 년 동안 절대 충성하는 만년 이인자잖아? 얼마 전엔 네 아버지인 공작이 폐하께 서부에서 나는 양모의 거래권을 황실에 갖다 바친 걸 잊었어?”
“…….”
이 몸에 들어온 지 시일이 그리 많이 지나지는 않은 터라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미처 파악하고 있지 못했던 이온은 말문이 막혔다. 반박을 못 하는 그를 보면서 예상했다는 듯이 버니언이 코웃음을 흘렸다.
“게다가 네 아버지의 평가는 어떻더라? 역대 가장 충성스러운 황실의 개? 듣자 하니 너무 짖질 않으니까 약점이 잡힌 게 아니냐는 소리도 들리던데 아직도 몰라?”
그러니까 여기서 애들끼리 싸움 좀 했다고 황가를 배신할 배짱은 없을 거라고, 크레이거 공작이 개호구라는 소리를 길게도 늘어놓은 버니언이 이온의 양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러니까 얌전히 있어, 이온.”
소름 끼치는 감각에 이온이 몸을 흔들었으나 오히려 강제로 더 꽉 붙잡히고 말았다.
그에 카밀루스가 얼굴을 굳혔다.
“버니언, 그 손 내려.”
하지만 기사들을 사이에 두고 어느 정도 안전거리를 확보한 버니언이 카밀루스의 말을 귓등으로라도 들을 리는 없었다. 그가 외려 이온의 어깨를 제 팔로 감싸 끌어안았다. 자신의 등과 버니언의 가슴이 닿자 이온은 노골적으로 불쾌해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버니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가 보란 듯이 이온의 옷깃 사이로 손을 슥 집어넣었다.
“너야말로 가만히 있어. 내가 실수하면 이온의 마나석을 파괴해 버릴지도 모르잖아?”
말이 끝남과 동시에 이온의 목에 걸려 있던 마나석 목걸이가 버니언의 손에 딸려 나왔다. 햇볕을 받아 푸른빛으로 반짝이는 마나석이 달랑달랑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