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네가 만든 마나석이라며, 카밀루스?”
“…….”
이온의 생명과 같은 마나석을 어루만지고 있으니 카밀루스가 얌전해졌다. 주먹을 움켜쥐었으나 달려들지 않는 모습을 보고 버니언은 안정감을 되찾았다. 그는 이제 제 품의 이온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질문하는 여유까지 갖췄다.
“넌 이 마나석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고 있어?”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이온은 도무지가 종잡기 어려운 그의 태도에 바짝 신경을 곤두세웠다. 제 뒤를 잡은 버니언의 존재가 못내 불편해서 견디기 힘들었지만 그의 목소리를 외면할 방법은 없었다.
“이 마나석은 보통 사람에게선 못 뽑아내. 저 새끼처럼 마나가 넘쳐나는 괴물한테서나 겨우 추출해 낼 수 있는 거니까.”
한 마디 한 마디 할 때마다 귓가에 숨소리가 스쳤다. 이온은 귀에서부터 퍼지는 소름 때문에 저절로 몸을 움찔댔다.
“전하, 더는 궁금하지 않으니 그만하시죠…….”
그가 제발 말이라도 멈춰 줬으면 하는 마음에 이온이 중얼거렸지만 버니언은 못 들은 척 제 할 말을 꿋꿋이 이어 갔다.
“그리고 마나는 보통 체내에서 피와 결합해 있으니 이렇게 고체인 마나석을 만들 정도로 추출하려면 치사량의, 혹은 그 이상의 피를 뽑아내야 해. 그러다 보면 전신의 피가 다 말라 버릴지도 모르지. 실제로 마나석 하나 만들려다가 죽어 버린 인간이 수없이 많으니까.”
“…….”
마나석을 만드는 과정이 그렇게 위험하다고?
이온이 순간 흠칫해 카밀루스를 바라보았으나 그의 표정은 담담하기만 했다. 그리고 그런 카밀루스를 버니언이 손끝으로 가리키며 웃었다.
“내가 할 말이 뭔지 알겠어? 저 녀석은 이 마나석만으로 증명한 거야. 이온 크레이거, 네가 자신의 약점이라는 걸.”
카밀루스는 곧바로 아니라고 부정하지 않음으로써 그의 발언을 인정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버니언.”
버니언이 이온을 더 바짝 끌어안고 이번엔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에 이온의 발도 어쩔 수 없이 끌려가자 카밀루스가 거리를 좁히려 했지만 황태자궁 기사들이 곧장 앞을 막아섰다.
조금만 움직여도 찔릴 정도의 거리에서 칼이 번뜩이는 것을 보고 카밀루스가 멈칫하자 버니언이 선언했다.
“네가 그렇게 소중히 여기는 이온 크레이거는 내 손바닥 위에 있어.”
“뭐?”
“황태자인 내 지위를 이용하면 내가 못 갈 곳은 없지. 아니, 직접 굳이 움직이지 않아도 돼. 봐, 초대장 한 장에 이온이 이 자리를 왔잖아.”
“…….”
오브라이언 제국 내에서 거의 무소불위라 할 수 있을 만큼 높은 제 위치를 상기시킨 버니언이 이온을 들여다보며 눈웃음을 그렸다.
“다음에도 올 거지, 이온?”
이온은 대답하는 대신 눈만 내리깔았다. 말마따나 버니언이 제 지위를 이용해 압박한다면 몇 번은 몰라도 끝까지 거절할 명분이 이쪽엔 없었다.
이온이 반박하지 않으니 버니언은 더 오만해져서는 카밀루스를 놀렸다.
“봐, 온다잖아?”
와중에도 계속해서 마나석을 손으로 지분거리던 버니언이 반쯤 감긴 나른한 눈으로 이온을 보며 속삭였다.
“난 네가 마음에 들어. 여자였으면 바로 청혼했을 만큼.”
즉시 이온의 초록빛 눈동자에 혼란이 비쳤다. 몹시 불쾌한 데다 재미없는 희롱이었다.
“농담이 지나치신…….”
“농담이 아닌데? 증거가 필요해?”
증거는 무슨 증거?
그렇게 생각한 순간 버니언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리고 이온은 제 목덜미에 닿는 체온과, 말캉한 감촉에 몸을 뒤틀었다.
“하지……!”
화악!
그런데 밀쳐 내는 힘이 그리 세지 않았을 텐데 갑자기 몸이 확 떨어져 나가는 것에 이온이 오히려 비틀거리다 바닥에 주저앉았다. 상황 파악이 된 건 그다음이었다.
이온의 옆에 투명한 얼음 화살이 꽂혀 있다가 이내 녹아내렸다. 정면을 보니 카밀루스가 마법진이 그려진 손을 천천히 내리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방금 전 그가 마법을 날린 것이다.
“날 죽이고 싶다는 눈빛이네?”
버니언의 빈정거림에 카밀루스가 이를 악물었다. 턱이 잔뜩 굳은 것이 육안으로도 보일 만큼 그는 화가 난 표정이었다. 그렇지만 아직 이성을 잃은 것은 아닌지 함부로 흥분하지는 않았다.
“날 도발하는 목적이 뭐야.”
“그만 북부로 꺼져 줬으면 해. 아이오딘으로 말이야.”
아이오딘은 북부 지역 중에서도 삼면이 높은 산에 막혀 있는 데다 1년 내내 눈 폭풍이 일고, 사람 대신 그보다 더 위협적인 몬스터들이 우글댄다는 험지였다. 오브라이언 제국 내에서 가장 쓸모없어 사람조차 얼마 살지 않는 버려진 땅이다.
그곳에 가면 아마 탑에 유폐되는 것보다 더 끔찍한 삶이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카밀루스가 북부행을 거부한 이유는 그곳으로 가기 싫어서라기보다는 이온의 옆에 남고 싶은 마음이 더 커서였다. 아픈 그를 두고 다른 곳으로 간다는 선택지는 애초에 고려 대상조차 아니었다.
“안 간다고 했을 텐데. 폐하께도 이미 말씀드렸다.”
“절대로?”
“절대로.”
“그래, 그럼…….”
버니언이 이온에게로 다가서려 하자, 이온이 일어나 뒤로 물러나려다 기사에게 붙들렸다. 당황한 사이 버니언이 가볍게 기사를 치하하고는 이온의 목에 있는 마나석을 움켜쥐었다.
“내가 이 마나석을 가루로 만든다면 어때?”
카밀루스가 가소롭다는 양 웃더니, 작게 스펠을 외웠다. 그러자 그의 뒤로 마법진이 형성되기 시작하면서 허공에 얼음 화살들이 떠올랐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으로서 황태자궁에 침입해 온 이상 이 정도의 충돌을 예상치 못했던 것은 아니기에 그에게 주저함은 없었다.
“그 전에 네 손이 가루가 될 거야, 버니언.”
쐐애액!
말하는 동시에 얼음 화살이 일제히 떨어져 내렸다. 저를 목표로 하는 화살들을 피하기 위해 버니언이 이온을 안은 채 뒤로 확 물러났다. 그러자 날아오던 화살이 방향을 틀어 이번엔 버니언의 정수리 쪽을 표적 삼아 쇄도했다.
바로 머리 위로 떨어지는 화살을 확인한 버니언은 어쩔 수 없이 이온을 놓았고, 저를 감싼 근처의 기사와 함께 바닥을 뒹굴었다.
“윽!”
팍, 파악!
얼음 화살이 바닥에 내리꽂히는 소리가 살벌했다. 그사이 이온은 제 쪽으로 뛰어와 저를 품에 안은 카밀루스를 올려다보았다. 버니언을 상대할 때만 해도 여유로워 보였던 그인데, 가까이서 보니 조금 당황한 기색이 배어 있는 것이 느껴졌다.
“곤란하게 해서 미안해, 이온. 다치진 않았어?”
“안 다쳤어. 괜찮아, 나는…….”
그보다 너 이렇게까지 해도 되는 거야?
그렇게 뒷말을 잇고 싶은데 여유는 없었다. 이상을 감지한 카밀루스가 이온을 감싸며 몸을 틀었다. 그 순간 예리한 칼날이 이온의 얼굴 옆을 스쳐 지나갔다.
사악, 하는 소리와 함께 카밀루스의 목이 살며시 베이면서 옷이 뜯어졌다. 뒤늦게 피가 조금 흘러내리는 목을 내리누르며 카밀루스가 돌아보자, 어느새 레이피어를 꺼내 겨누고 있던 버니언이 씹어뱉었다.
“아무리 네가 강하다지만 명색이 황태자인 나를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니야? 이래 봬도 어느 방면으로든 최상의 교육을 받아 왔는데.”
“…….”
카밀루스가 이온을 저와 떨어지게 하며 천천히 일어나자 버니언 역시 거리를 조정하며 주위에 경고했다.
“이 녀석은 내가 상대할 거니까 다들 물러나.”
버니언의 칼끝과 카밀루스 사이의 거리는 불과 두어 걸음 정도였다. 그러나 곧 제 심장을 꿰뚫을 것처럼 구는 버니언의 레이피어 앞에서도 카밀루스는 그리 동요하지 않았다.
“나와 정면으로 싸우겠다고?”
버니언이 그렇다는 의미로 고개를 조금 기울여 보였다. 그러고는 눈짓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카밀루스, 넌 황성을 감싼 이 결계가 뭔지 몰라?”
내황성을 전체를 보호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단단한 결계를 시전하는 마법진이 그곳에 떠 있었다.
현존하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강한 마법사라고 알려진 오브라이언 제국의 마탑주가 설계한 결계였다.
전 황제와 마탑 간의 서약 이후 펼쳐져 지금까지 20년 가까이 유지된, 황실을 보호하기 위한 결계.
카밀루스로서도 대체 그 원리가 어떻게 되는지 해석조차 할 수 없는, 완전체에 가까운 마법식이었다.
“황가를 지키기 위한 장치야. 그러니 이 결계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건 폐하뿐만이 아니지.”
문득 버니언의 칼을 타고 푸른 연기가 올라왔다. 그 자신의 마나를 흘려보낸 것이었다.
“나 역시 차기 황태자로서 보호 대상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