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마.’
탑에서 눈을 못 떼던 에밀리의 모습을 상기하며 이온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말썽꾸러기.
연회장 건물의 복도를 걷던 이온은 뒤돌아 남작 영애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가 에밀리를 찾아올게. 대충은 알 것 같으니까.”
“혼자 가셔도 되겠어요?”
“난 괜찮아. 황성엔 여러 번 와 봤으니 길을 잃을 일은 없을 거야. 그보다 어머니가 불안해하지 않도록 옆에 있어.”
“알겠습니다, 소공작.”
남작 영애가 도로 연회장으로 들어가는 모습까지 확인한 뒤 이온은 이어진 정원으로 나갔다. 연회장에 비해서는 조용했지만 곳곳에 사람들이 있어 이온은 조심조심 바깥으로 향했다.
중간에 아는 사람을 만나 조마조마했지만 연회장 건물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데 금세 성공한 이온은 탑의 위치를 가늠하며 발걸음을 서둘렀다.
워낙 커서 그런지 꽤 오래 걸어도 좀처럼 가까워지는 것 같지 않았던 그 탑은 황성 중앙 정원을 기준으로 정북 쪽에 위치해 있었다.
이온은 주변에 사람이 있는지 계속 확인하며 마침내 지금은 터만 남은 옛 성전을 지나 인기척이 없는 지역까지 숨어들었다. 이후는 금지로 향하는 길이라 그런지 빛 구슬 하나 띄워 두지 않은 탓에 어두컴컴했다.
탑으로 향하는 마지막 관문처럼 생긴 아치형 길에서 스펠을 외워 손바닥에 작은 빛을 띄웠다. 그러고 사람이 있는지, 장애물은 없는지 확인하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인적이 없어서인지 정리되지 않은 풀을 밟으며 이온이 미간을 구겼다.
‘아무리 그래도 에밀리가 여기까지 왔을까?’
에밀리는 겁이 많은 아이다. 이온은 저조차도 조금 오싹하게 느끼는 이곳을 호기심 하나로 어린 동생이 찾아왔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래도 만에 하나 진짜로 온 거라면 큰일이니 좀 더 깊은 어둠으로 향했다. 마침내 아치형 길을 빠져나온 이온이 잡초가 무성한 풀밭으로 나가며 에밀리를 찾았다.
“에밀리. 에밀리, 여기 있어?”
워낙 조용하고 어두운 곳이라 목소리가 저절로 속삭이는 소리처럼 나갔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이온이 큰 숨을 들이켜고는 제 앞의 탑을 올려다보았다. 황도 어디에서나 보이는 거대한 탑답게 아래쪽의 둘레는 상상 이상으로 컸다. 그러니 고개를 올리고 올려도 꼭대기가 보이지도 않는 것은 비단 제 키가 작아서만은 아닐 터였다.
까마득한 높이와 엄청난 크기에 이온이 잠시 넋을 놓고 있을 무렵.
바스락.
소리가 들려 흠칫한 이온이 휙 뒤로 돌았다. 그러나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동물……?’
아니면 그냥 풀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일 수도 있었다. 이온은 제 신경이 잔뜩 예민해진 것을 느끼며 탑 주변을 돌기 시작했다.
“에밀리?”
어쩌면 이번 부름부터는 에밀리를 찾기 위함이 아닌 이온 자신의 공포를 떨치기 위함일지도 몰랐다. 이온은 살금살금 풀을 밟으며 탑의 입구를 찾았다.
이 용도를 알 수 없는 탑은 멀리서 보기에도 마탑만큼 으스스한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가까이서 보니 더 그랬다. 금지로 지정된 이후 사람 손을 탄 적이 없는지 근처는 풀숲이라 해도 좋을 정도였다. 잡초 주제에 길게 자란 것은 이온의 허리께까지도 올라왔다.
결국 이온은 서서히 제 안에 밀려드는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빛을 하나 더 띄웠다. 눈앞이 두 배로 환해졌지만 이끼가 얽혀 있는 탑의 외관 때문에 그리 마음이 평온해지지는 않았다.
“에밀리, 있으면 대답해.”
습관처럼 동생의 이름을 부르던 이온은 드디어 탑의 입구를 발견했다.
이 탑은 지은 지 아주 오래됐다고 들었는데 의외로 탑의 문은 의외로 그리 낡지 않은 상태였다.
‘새로 만든 건가?’
으스스한 분위기에 압도되어 공포를 느낀 것도 잠시, 사람의 손이 닿았던 흔적을 발견하자 어느새 호기심이 동하기 시작했다.
이온은 허술하게 박혀 있는 출입 금지 팻말을 무시하고 차가운 감촉의 철문을 살짝 밀었다. 틈새로 보이는 안쪽은 달빛이 비치는 밖보다도 더 어두웠다.
들어가기 전에 이온은 자신이 걸어온 길을 한번 되돌아보았다. 당연하지만 연회장과는 거리가 꽤 멀었다. 돌아가면 시간이 많이 지난 뒤일 테니 어쩌면 어른들의 걱정을 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온은 꼭 탐험하는 듯한 기분을 안고 문 안쪽으로 들어섰다.
기기기기.
철문이 밀리는 소리가 뚝뚝 끊어지듯이 들려왔다. 마법으로 밝힌 빛을 앞세워 안에 완전히 들어간 이온은 일부러 탑의 문을 열어 둔 채로 안쪽을 살폈다.
‘별을 보는 용도는 아니었을 것 같은데…….’
단지 그런 목적이라면 굳이 이렇게 높은 탑은 필요 없었을 테니까.
게다가 1층의 내부를 한 바퀴 둘러본 이온은 곳곳에 거미줄이 쳐져 있고 집기 하나 없이 휑한 모습에 조금 허무해지기까지 했다.
그렇지만 그는 위층으로 향하는 나선형의 계단을 밟고 올라가며 다시금 심장이 두근거림을 느꼈다.
역대 황후가 셋이나 죽어 나간, 악마의 탑…….
어째선지 땀이 잔뜩 난 손을 손수건으로 닦고, 이온이 천천히 위로 향했다.
“에밀리.”
정말 제 동생이 이런 무서운 곳에 있으리라고는 상상이 되지 않았다. 에밀리를 이 근방에서 발견하면 혼낼 생각이었으면서 정작 스스로가 호기심을 못 이겨 올라가고 있는 상황이 우습기도 했다.
하아, 하아.
몇 층이나 올라왔는지 모르겠지만 높은 만큼 끝도 없는 계단에 점점 숨이 차올랐다. 이온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기력 회복 마법을 썼다. 덕분에 숨은 차츰 돌아왔지만, 안타깝게도 마법이 아픈 다리까지 해결해 주지는 않았다.
결국 다음 층에서 걸음을 멈춘 이온이 계단을 위아래로 번갈아 보며 이전보다 더 크게 외쳤다.
“에밀리, 여기 있니? 오라버니가 왔어.”
“…….”
당연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온도 이제는 인정했다. 에밀리는 이곳에 없다. 있어서도 안 됐다.
그래도 공기를 크게 들이켜 숨을 고른 이온이 한 번 더 동생의 이름을 불렀다.
“에밀리.”
“…….”
어쩐지 메아리마저 치는 느낌이다.
‘이쯤 됐으면 이미 돌아갔을지도.’
그러니 자신도 이런 무서운 데에 더 있을 게 아니라 그냥 돌아가는 편이 나을 터였다. 공연히 이곳에 왔다는 걸 들키면 혼만 날 테니까.
냉철한 이성의 설득에 의해 결국 현실로 되돌아온 이온은 숨이 고르게 가라앉은 가슴을 한 번 꾹 누른 뒤 심호흡을 했다. 그러고 계단으로 내려가기 전 한 번 위를 올려다보았다. 아마 꼭대기까지 이어져 있을 계단은 새카만 어둠에 뒤덮인 채였다.
괜한 호기심은 더 이상 쓸모가 없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이온의 시야에 어둠 속으로부터 미약하게 반짝이는 무언가가 보였다. 그리고.
쐐애액!
돌연 바람 가르는 소리가 일자 깜짝 놀라 계단이라는 걸 잊고 한 발짝 물러난 이온이 뒤로 휘청였다.
“엇, 어어!”
본능적으로 팔을 휘적였지만 균형은 잡히지 않았고, 매끈한 벽엔 잡을 것도 없었다. 결국 그의 조그만 몸이 계단에서 굴렀다. 머리를 다치지 않기 위해 반본능에 의해 팔로 머리를 감쌌다.
다행히 얼마 굴러가지 않고 계단참에서 몸이 멈췄다. 이온은 바닥에 내팽개쳐진 몸을 상체부터 일으키며 신음을 흘렸다.
“윽…… 뭐, 뭐야, 방금.”
트랩 같은 건가?
이온은 아까 자신이 서 있던 곳에 하얗게 한기를 뿜는 얼음 화살이 꽂혀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오싹함에 등이 굳는 것을 느꼈다.
저건 트랩 같은 게 아니라 마법이었다. 그렇다는 건 여기에 사람이 있다는 뜻이고.
위험을 감지한 이온이 도망쳐야겠다는 생각에 서둘러 몸을 움직이려 했을 때였다.
“읏!”
다리를 타고 올라오는 찌릿한 통증에 이온이 일어서다 말고 도로 주저앉았다. 발목을 삔 것이었다.
어떡하지?
이온이 초조하게 위를 올려다보았다. 어두워서 보이지는 않지만 저기에 사람이 있다, 분명히.
게다가 이쪽을 공격하기도 했으니.
‘죽이려는 걸까?’
제 영역을 멋대로 침범했다고?
공포감에 저절로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제 마법 실력은 중간 정도지만 그나마도 공격계 마법은 많이 익힌 편이 아니었다. 그런 자신이 이곳에서 무사히 도망칠 수 있을까?
이온의 눈이 위로 향하는 계단을 뚫어져라 보았다. 그리고 좀처럼 움직이지 않던 상대의 발이, 마침내 이온이 빛을 밝혀 둔 영역 안으로 천천히 들어왔다.
제 심장 소리가 이보다 더 어지러울 수 있을까. 두근두근하는 박동은 점점 더 빨라져만 가고, 심장이 이대로 터지는 게 아닌가 싶었던 그때.
“누구야, 너?”
짧은 질문이 던져졌다.
“……?”
상대의 목소리는 제 예상과는 한참 다르게, 어린 소년의 것이었다.
이온의 초록빛 눈이 동요로 인해 흔들렸다.
잠시 후 모습을 전부 드러낸 상대는 딱 봐도 이온과 같은 또래의 사내아이였다. 탑의 어둠처럼 짙은 검은 머리에, 푸른 눈동자를 지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