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의 병약한 도련님이 되었습니다 (34)화 (34/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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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마등이 종료되었습니다.]

주마등이 재생 중입니다. 종료되었습니다. 그런 메시지가 몇 번이나 뜨고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한동안 이온은 그렇게 꿈에 빠져 현실의 시간조차 잊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서서히 의식이 열리기 시작하고, 외부에서 조금씩 자극이 들어왔다.

어떤 때는 슬픔 어린 목소리가 귓가에 속삭여졌고, 어떤 때는 안타까워하며 수군거리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또 어떤 때는 누군가의 화난 음성이 울려 퍼졌다.

가끔은 누군가의 정성 어린 손길도 느꼈다. 거스러미가 일어나지 않게 기름칠하며 손끝을 조심스럽게 다듬어 주고, 입가를 미지근한 물로 축여 주는 다정함이 참 따뜻했다.

‘……누굴까.’

그런 궁금증을 떠올릴 때가 되어서야 이온은 제 의지로 천천히 눈을 뜨게 되었다.

“…….”

눈을 떴을 때 너무 밝은 빛에 놀라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인지, 방은 무척 어두웠다. 커튼 사이로 새어든, 천장에 길게 뻗은 희미한 한 줄기의 빛이 아니었다면 분명 밤인 줄 알았을 터였다.

하지만 그 작은 빛조차 눈 부셨던 이온이 눈꺼풀을 다시 내리려 했을 때였다. 제 바로 옆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온……?”

온몸의 감각이 둔했다. 고개를 돌려 상대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의지대로 되지 않았다. 대신 반쯤만 벌어진 눈꺼풀 밑으로 초록빛 눈동자를 굴려 상대를 확인했다.

아버지였다.

내내 옆을 지키고 있었던지 크레이거 공작은 그의 작은 움직임 하나에도 민감하게 반응해 왔다.

“깨어난 게냐?”

“…….”

질문을 듣고 제일 먼저 한 생각은 현실이 맞나, 하는 것이었다. 혹시 꿈속인가. 아니면…….

이온은 제 마지막 기억을 애써 떠올려 보았다.

〈크레이거가(家) 소공작님, 저는 노아 기사단 소속의 아스타틴 딜런 부단장입니다.〉

공손한 태도로 비웃음을 흘리던 남자. 그의 손에서 마나석이 파괴되었고, 사망할 확률이 92퍼센트까지 치솟았었다.

그리고, 그리고.

〈이온! 이온!〉

아마도 쓰러져 있는 제게 마나를 나눠 주기 위해 달려오려던 것일 카밀루스는 뒤에서 날아오는 칼을 보지 못하고 어깨가 꿰뚫렸었다.

그 녀석을 찌른 사람은…… 버니언이었던가, 아니면 아스타틴이었던가. 그도 아니면 제삼자였던가.

제대로 보지 못한 채 의식이 끊겼었다.

분명히 그게 끝이라고, 이제는 죽었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온, 아들아.”

어느새 힘없이 도로 눈을 감은 모습에 불안했는지 크레이거 공작이 이온의 손을 잡으며 불러 왔다.

네, 하고 대답해 주고 싶은데 그 한 음절을 내뱉는 일도 지금은 버거웠다. 입 밖으로 빠져나가는 건 쌔근거리는 숨소리뿐이었다. 그 때문에 입술을 조금 뻐끔거리고 있자 공작이 누군가에게 명했다.

“……입이 말랐나 보다. 적셔 주거라.”

“예, 각하.”

이어 마른 입술을 물로 적신 천으로 정성스레 닦아 주는 손길은 꿈결에 느꼈던 것 그대로였다. 꼼꼼히 입 주변이 훑어진 뒤에는 미지근한 물이 새 모이처럼 조금씩 흘러들어 왔다.

그제야 닫혔던 목구멍이 살며시 열린 느낌이었다. 이온은 몇 번의 시도 끝에 한껏 갈라진 목소리를 내었다.

“아버, 지…….”

그러고 손에서 힘을 빼며 눈을 다시 감았다. 잠깐 사이 도로 의식을 잃었던지 다급히 흔들어 깨우는 손길에 이온이 겨우 눈꺼풀을 위로 올렸다. 그땐 천장에 뻗친 빛의 각도가 바뀌어 있었다.

“이온.”

다시 눈뜬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가슴을 쓸어내린 공작이 의자에 주저앉듯이 털썩 몸을 내렸다.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마른세수를 했다.

“하…….”

강인한 인상의 그와는 어울리지 않게 지친 한숨이 흘러나오는 것을 보며 이온이 작게 물었다.

“저, 안 죽은 거 맞아요……?”

질문에 공작이 눈을 들었다. 마지막으로 봤었던 때보다 많이 수척해진 데다,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던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럼, 그럼……. 안 죽었다. 내 아들이 죽긴 왜 죽느냐. 왜 그런 말을 해.”

이온은 배시시 웃었다. 그런데 반대로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꿈을 꾸는 동안 머릿속도, 마음속도 뒤죽박죽이 되어 버린 느낌이었다. 혼란하게 얽힌 기억과 감정을 몸이 먼저 이해하고 제멋대로 표정을 만들어 냈다.

이온은 그런 제 상태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꿈속에서의 일을, 일부 돌아온 제 과거의 기억을 더듬었다.

〈카밀루스 클로델이야.〉

한마디에 제 온 주의를 빼앗겨 버린 이온 크레이거는, 그 뒤 제 마음의 소리를 외면하지 못하고 또 이름 없는 탑으로 향했다.

황제와 같은 성을 쓰는 의문의 아이, 카밀루스.

그 아이는 자연의 법칙을 어긴, 본래라면 태어날 수 없는 돌연변이였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몸에 담을 수 없는 양의 마나가 그의 몸에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카밀루스가 괴물이라 불리는 이유요, 그의 불운이었다.

이온은 어느 날엔가는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카밀루스를 발견한 기억을 어렴풋이 떠올리며 입술을 움직였다.

“카밀루스는, 어떻게…….”

“이온.”

한 문장을 채 다 말하기도 전이었지만 공작은 더 묻지 말라는 듯이 이름만 나직이 불렀다. 하지만 이온은 힘이 없어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뻗어서 아버지의 옷소매를 붙잡았다.

“어디, 하아, 어디…… 있어요?”

“…….”

“설마, 다시 탑에 갇, 흡…….”

말 조금 했다고 목이 간질거렸다. 이온이 말을 채 맺지 못하고 쿨럭였다. 기침을 하는 동안의 반동 때문에 몸이 흔들리는 것에도 아파서 눈물이 배어 나왔다.

이 상태면 꽤 오랫동안 침대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을 때였다. 이온의 손등을 공작의 손이 감싸는가 싶었는데, 그게 아니라 엄지손가락에 가는 줄 같은 것이 걸리더니 손바닥에 작은 물체가 들어왔다.

그 순간 확 퍼지는 어떠한 기운에 이온이 숨을 멈췄다.

[상태 이상 ‘충만한 마나’가 적용됩니다.]

[상태 이상: 충만한 마나. 플레이어의 몸에 마나가 충만한 상태입니다. 기력이 개선되고 나쁜 상태 이상이 억제됩니다. 플레이어가 사망할 확률이 35% 감소합니다.]

‘이게 어떻게?’

마나석은 파괴되지 않았던가. 그렇지만 시선을 내려 제 손을 보니 분명히 목걸이 형태의 마나석이 쥐어져 있었다. 이온이 아버지에게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을 보내자 공작이 굳은 표정으로 짧게 설명했다.

“그놈이, 주고 간 거다.”

가다니…….

앞뒤 다 자른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어 이온은 굳어 버린 머리로 몇 번이나 곱씹었다. 그러다 기분 나쁜 예감이 들어 몸을 일으키려 하는데, 근육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지금은 제 몸을 어쩌지 못한다는 걸 인정한 이온은 하는 수 없이 몸을 늘어뜨리며 다시 물었다.

“어디……?”

짧은 문장을 내뱉는 데도 힘에 부쳐 꺼낸 말은 겨우 한 단어뿐이었다. 하지만 어떤 의미인지 충분히 알아들었을 공작은 선뜻 대답을 내놓지 않았다. 집요하게 쳐다보는 이온의 눈을 오히려 피해 버렸다.

아버지에게서는 원하는 답을 들을 수 없다는 것을 눈치채고 이온이 다른 쪽을 돌아보았다.

방 안에 사람이 많지 않았으나 그중 문 쪽에 가만히 서 있는 기사가 눈에 들어와 그에게 시선을 멈췄다. 에렌스트 경이었다. 그라면 틀림없이 전후 사정을 알 터다.

의문을 담은 눈으로 집요하게 바라보고 있자 에렌스트 경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리고 이온의 침대 앞에 걸어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푹 숙였다.

“소공작을 지키지 못한 죄를 부디 용서하십시오.”

“…….”

애초에 그의 잘못도 아니고, 막 깨어난 지금은 그의 상벌을 논할 때가 아니었다. 완곡한 화법으로 그는 카밀루스에 대해서 결코 말해 주지 않으리라는 제 의사를 밝힌 것이었다.

질문을 바꾸어야겠다.

그 전에 이온은 옆의 하인에게 물을 달라고 눈치를 주었다. 이번에도 입가로 조금씩 물이 흘러들었다. 그렇게 다섯 모금 정도 천천히 넘긴 이온이 미리 헛기침을 해 두었다.

아까보다 한결 나아진 목 덕분에 이온은 문장을 겨우 완성할 수 있게 되었다.

“제가 얼마나 정신을 잃었어요?”

“……2주다.”

벌써.

경직된 몸 상태 때문에 꽤 오래 지나지 않았을까 추측은 했지만 아버지에게서 막상 들은 기간은 예상보다도 더 길었다. 의지대로 운신을 못 한다 해도 충분히 이해될 만큼 시간이 흐른 셈이다.

기실 사망 확률이 92퍼센트까지 올라갔었으니 오히려 눈뜬 게 기적이라고도 할 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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