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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병약한 도련님이 되었습니다 (35)화 (35/317)

그렇지만 지금 자신의 안위가 그리 중요할까. 사망 확률이 어떻든, 몸 상태가 어떻든 삶을 이어 갈 수만 있다면 자신에게는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카밀루스는…….’

이온은 주마등이 막판에 보여 주었던 희미한 장면을 머릿속에 그렸다. 두 손에 달려 있던 금제. 마법으로 카밀루스의 몸을 통제하던 그 족쇄를 풀어 주는 순간의 기억이었다.

〈여기서 나가자. 나갈 수 있어.〉

이온 크레이거의 간절한 그 말에 탑에 갇혀 제 삶을 빼앗겼던 아이는 활짝 웃었었다. 바깥세상은 두려웠지만 그 찬란함을 맛보고 싶은 열망이 더 강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겨우 그에게 자유를 찾아 줬었다……. 이온 크레이거는 그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알고 있었음에도, 또 그 족쇄를 풀었을 때 어떤 무서운 일이 벌어질 거라는 사실을 짐작하고 있었음에도 눈앞의 불행을 외면하지 못했다.

그만큼 카밀루스가 그곳에서 받는 취급이 부당하다고 여겼던 것이다. 영민한 아이는 어른들의 잔악함 앞에서 좌절감을 느꼈을지언정 그 현실은 그대로 둘 수 없었던 거겠지.

그런데 카밀루스가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게 된 걸까. 그 지옥 같은 곳으로?

몸의 주인이 느끼는 슬픔이 마치 자신의 것인 양 이온의 가슴이 지끈거려 왔다. 그 탓에 얼굴이 일그러져 가는데, 아버지 쪽에서 목소리가 넘어왔다.

“카밀루스는.”

그놈, 그 자식, 사생아.

지금껏 카밀루스를 그리 불렀던 그인데, 이온의 앞에서 처음으로 이름을 제대로 불러 주었다. 이온이 변화를 감지하고 공작의 입에서 나올 말에 집중했다.

“북부로 갔단다. 그리고 더는 수도에 돌아오지 않기로 했다.”

“……북부?”

“그래.”

북부. 그러고 보니 버니언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던 것도 같다. 제정신이냐고, 북부로 강제 추방 당하고 싶으냐고.

그리고 그 뒤에 지역명도 언급이 됐었는데.

이온은 뻑뻑한 머리를 어떻게든 굴려 기억을 꺼내려 애썼다.

북부에 어떤 도시가 있더라?

오브라이언의 지도를 머릿속에 펼쳐 북부 지명을 하나둘씩 짚어 보는데, 그중에서 하나의 이름이 아버지의 입에서 뱉어졌다.

“며칠 전 아이오딘으로 떠났다.”

아이오딘이라는 단어를 들은 이온은 잠시 그게 어디더라, 하고 스스로에게 물었다가 이내 안색이 창백해졌다. 안 그래도 하얀 얼굴에서 완전히 핏기가 빠졌다.

“……아버지.”

이온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저 멍하니 눈앞의 사내를 부르기만 했다. 아버지라는 그 사람은 이온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선명히 짐작할 텐데도 제 아들을 기만하려 들었다.

“이온, 너 때문이 아니다. 그 아이 스스로가 선택했어.”

“아버지.”

그럴 리가 없잖아요.

뒷말은 이온으로서도 차마 잇지 못했다. 제 손에 걸린 마나석이 그의 입을 막아 버렸기 때문이었다.

[현재 플레이어가 사망할 확률은 32.5%입니다.]

아까부터 떠 있는 사망 확률을 본 이온은 손에 힘을 넣었다.

[플레이어가 사망할 확률이 35% 감소합니다.]

이전보다 강화된 마나석의 효과와 본래의 확률에 50퍼센트를 대입하여 계산하면 딱 떨어지는 수치. 별것 아닌 숫자의 나열에 불과한데 이온은 견딜 수가 없어졌다.

제 목에 걸린 마나석이 깨지는 순간 흩어지던 핏방울이 눈앞에 어른거리고.

〈내가 할 말이 뭔지 알겠어? 저 녀석은 이 마나석만으로 증명한 거야. 이온 크레이거, 네가 자신의 약점이라는 걸.〉

버니언의 야비한 웃음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져서.

누군가에겐 삶의 의미가 무너져 내린 그 순간의 일들이 제 안을 너무 아프게 찌르는 바람에.

그래서.

그래서…….

이온의 눈동자를 뒤덮었던 눈물이 작은 깜빡임 한 번에 주룩 흘러내렸다. 코끝이 금세 시큰해지고,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러나 이온은 이 이상의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다. 공작의 비겁한 회피 앞에서 동조를 하지도, 부정을 하지도 못하고 그저 또 하나의 방관자가 되어 침묵을 하는 것 외에는.

결국 스스로도 비겁자가 되는 것 외에는.

공작이 이온의 눈가를 쓰다듬으며 눈물을 손가락으로 천천히 훔쳐 주었다. 이 순간 그는 하루하루의 삶을 이어 가는 간단한 일마저 힘들어하는, 아픈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일 뿐이었다. 아들 대신 그 자신의 생을 다 바친다 해도 아까워하지 않을 힘없는 부모에 불과했다.

이온은 공작의 눈에도 눈물이 어른거리는 것을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네가 살아서 정말 다행이다, 이온. 하마터면 이 아비는 하나뿐인 아들을 잃을 뻔했어.”

제 아들을 위해 남의 불행을 아랑곳하지 않는 그 위선을.

하지만 자신에겐 그를 비난할 자격이 없었다.

* * *

며칠째 침대 밖으로 나가지도 않은 채 이온은 그저 숨만 쉬고 있었다. 깨어난 뒤로 급격하게 호전되어 수일간 발작도 일으키지 않으니 혼자 남고 싶다고 하면 하인들도 방 밖으로 물러나 주었다.

그렇게 혼자 보내는 시간이 길어졌으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 천장을 바라보는 시간만 늘었다. 이온은 등대의 빛을 찾지 못한 배처럼 목표를 잃고 제자리를 맴돌 뿐, 어떤 의욕도 느끼지 못했다.

[현재 플레이어가 사망할 확률은 14%입니다.]

다들 살라고, 살아야 한다고 하는데…… 정작 자신은 살아갈 의미를 잃어버렸다. 더는 무얼 해야 하는지도 몰랐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여 다시 눈을 감고 자 버리려고 했다.

“꾸, 꾸…….”

작은 소리가 들려오지만 않았더라면.

이온은 막 다 닫히려던 눈을 반짝 떴다. 그러자 커튼을 쳐 두어 살짝 그림자가 드리워진 창문의 턱에서 뭉툭한 꼬리를 바짝 세운 작은 생명체가 폴짝 뛰어내리는 것이 보였다.

깨어난 뒤로 그 존재조차 잊었던 욤뇽이가 달려와 품에 폴짝 뛰어들자 이온이 놀라 상체를 일으켰다.

이온은 녀석의 하얗고 통통한 몸체를 두 손으로 잡고 이리저리 확인하며 물었다.

“욤뇽이? 어디 갔다 이제 온 거야?”

“꾸웅.”

황태자궁을 방문했을 때 마차 안에 두고 온 게 뒤늦게 생각나 걱정이 되었으나 다행히 어디 하나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 파란 보석안으로 저를 응시하며 눈물을 글썽이는 모습에 이온은 괜한 죄책감이 들었다. 하여 두 팔로 꼭 안은 뒤 작은 뿔이 솟은 동그란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속삭였다.

“왜 주인님 안 따라갔어, 응? 네 주인은 카밀루스잖아.”

“꾸.”

그러나 말을 할 수 없는 욤뇽이는 대답하는 대신 눈만 도로록 굴렸다. 녀석도 하고 싶은 말은 잔뜩인데 못 해서 여간 답답한 게 아닌지 작은 손으로 이온의 옷을 잡아당기며 안절부절못했다.

“……꾸우.”

“…….”

이온은 그 손길에 왠지 모를 우울감이 올라와 표정을 서서히 가라앉혔다. 이온이 제 옆에 욤뇽이를 내려 두며 이야기했다.

“넌 네 주인한테 가도 돼. 내 옆엔 사람이 많으니까, 별로 외롭지도 않아.”

거짓말이었다.

카밀루스가 떠난 뒤로 제 마음은 방황하고 있었다. 저를 걱정하는 식구들 사이에서도 좀처럼 중심을 잡을 수가 없었다. 결말이 정해지지 않은 책처럼 무의미한 날들만 반복되는 중이었다.

한데 욤뇽이가 그게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마구 흔들더니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끙끙 앓는 소리를 내었다.

뭐 하나 싶어 유심히 지켜보고 있는데, 잠시 후 욤뇽이의 입에서 커다란 구슬이 토해졌다. 파란색 기운이 일렁이는, 척 봐도 보통의 물건은 아닌 구슬이었다.

이온이 머뭇거리다가 그곳에 손을 대자 시스템창이 올라왔다.

[화이트 드래곤으로부터 ‘기억의 구슬’을 습득했습니다.]

기억의 구슬?

‘이름만 보면 용도가 아주 명확하긴 한데.’

선뜻 집어 들지 않자 욤뇽이가 두 손으로 구슬을 잡아 이온의 손안에 쥐여 주었다.

“꾸, 꾸.”

그에 일단 눈앞으로 구슬을 가져와 이리저리 굴려 보던 이온은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 미간을 살며시 찌푸렸다.

혹시 먹어야 하는 건가 싶어 살짝 깨물어 보자 욤뇽이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뀨!”

“그, 그럼 어떻게 하는 건데?”

민망해진 이온이 물으니 그제야 욤뇽이가 콧김이라도 내뿜을 것처럼 숨을 쉭쉭 내쉬었다. 그러고는 이온의 손바닥에 올려진 구슬에 제 두 손을 갖다 댔다.

욤뇽이는 구슬을 내려다보며 집중하는 듯이 입을 꼭 다물었다. 얼마 안 가 구슬 안의 파란색 기운이 뒤엉키는가 싶더니 흰빛이 구슬 밖으로 새어 나왔다.

[화이트 드래곤의 마나에 ‘기억의 구슬’이 반응합니다.]

그리고 이온의 눈앞에 작은 영상이 펼쳐졌다.

화려한 궁전 안, 붉은색 융단이 깔린 긴 길 끝에 뒷짐을 진 오브라이언의 황제가 뒤돌아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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