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궁정에 홀로 있는 그의 앞에 두 사람이 나타났다. 버니언과 카밀루스였다. 의기양양한 표정의 버니언에게 카밀루스는 거의 끌려오다시피 하는 중이었다.
둘 중 먼저 황제의 앞에 나아간 것은 버니언이었다. 그가 한쪽 무릎을 꿇고 가볍게 안부 인사를 올린 뒤 한 첫마디는 이것이었다.
〈부황께서 원하시던 답을 가져왔습니다.〉
그에 황제가 천천히 뒤돌아서더니 버니언이 아닌 카밀루스를 마주했다. 제게 시선이 오자 카밀루스가 버니언의 한 걸음 뒤까지 걸어가 지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폐하께서 이기셨습니다.〉
〈해서?〉
미세한 웃음을 내비치는 황제의 앞에 카밀루스는 천천히 몸을 내렸다. 이내 두 무릎을 완전히 꿇고 허리를 숙여 머리를 조아린 그가 애원하기 시작했다.
〈이온을 살려 주세요. 그 애는…… 이대로면 죽습니다, 아버지.〉
목소리는 물론이고, 부상당한 어깨 때문에 피에 젖은 손 역시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어린 아들의 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황제의 표정은 무감하기 그지없었다. 내뱉은 말도 그와 온도 차가 크지 않았다.
〈짐이 그 아이를 그리 만든 것도 아니고, 살릴 방도를 아는 것도 아닌데 왜 엉뚱한 데 와서 애원을 하는 것이냐.〉
카밀루스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붉은 입술이 희어지도록. 마치 굴욕 혹은 분노를 참는 듯한 모습이었다.
〈아니요, 폐하께선 알고 계십니다. 그를 불러 주세요.〉
〈…….〉
〈젠장, 이 몸에 있는 마나 따위 다 내줄 테니 제발 와 달라고 해 주세요! 대신, 대신.〉
카밀루스가 고개를 들어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그의 파란 눈엔 깊디깊은 간절함이 배었다.
〈크레이거가의 영식을 살릴 수 있게, 딱 하나만…… 딱 하나만 허락해 주십시오.〉
지그시 그가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던 황제는 의도적으로 잠시간 대답하지 않고 휴지를 두었다. 카밀루스가 심리적으로 몰릴 때까지 시간을 버는 것이었다.
예상대로 제 목을 조이는 답답함에 카밀루스가 숨을 거칠게 몰아쉬기 시작했을 때에야 황제가 한마디를 툭 던졌다.
〈그러면?〉
〈…….〉
카밀루스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결심하고 왔음에도 선뜻 대답하기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미간을 좁힌 황제가 옆에서 구경하고 있는 황태자를 질책했다.
〈버니언, 제대로 설득한 게 맞는 것이냐?〉
그에 당황한 표정을 지은 버니언이 카밀루스를 향해 짜증을 부리며 답을 재촉했다.
〈대답 안 해?〉
그제야 카밀루스의 입이 달싹여졌다.
〈……폐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썩 만족스러운 대답은 아니었으나 결론이 이미 나왔으니, 황제는 채근하지 않고 제가 원하는 말이 들려오기를 기다렸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잔혹한 침묵이요, 인내였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는 동안 카밀루스의 숨이 더 가빠졌고, 이내는 턱이 떨렸다. 그러나 제가 이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으려 해도 자신의 아비는 어떻게든 들어 낼 이라는 것을 알기에, 결국 먼저 포기한 쪽은 카밀루스였다.
〈아이오딘으로 떠나 다시는 황도로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그러자 황제가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황족다운 여유가 밴 몸짓으로 붉은 융단을 밟고 지나와 살며시 단이 진 바닥을 딛고 내려선 그는, 버니언을 지나 카밀루스의 앞으로 갔다.
바스락, 하고 그의 옷이 구겨지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그가 제 두 손을 카밀루스의 어깨 위에 올렸다. 카밀루스는 부상당한 어깨가 아파 와 움찔했지만, 황제는 제 손이 피에 물드는 것조차 신경 쓰지 않았다.
황제는 일견 부드러워 보이는 목소리로 다정한 호칭을 입에 올렸다.
〈아이야.〉
하지만 카밀루스는 숨이 턱 막혀 버린 기분에 나비가 서툰 날갯짓을 하는 것처럼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짐작했던 대로 황제의 입에선 잔혹한 소리가 아무렇지 않게, 아니 오히려 여느 때보다도 가볍게 흘러나왔다.
〈그곳에서 평생 나오지 말아야 한다.〉
유폐의 명. 한설로 뒤덮인 불모지, 아이오딘으로 가 몬스터의 심장이나 파먹고 살라는 의미였다.
〈그러지 않으면 네가 소중히 여기는 그 아이가 너무 많이 아플 것이니 말이다.〉
황제는 이로써 두 가지를 얻는다. 제가 원치 않는 아들을 치워 버리고, 나라마저 아이오딘에서 손을 놓았다고 떠들어 대는 이들을 닥치게 할 수 있었다.
카밀루스는 그 전부를, 그곳으로 간다 해도 제 평생이 휘둘릴 것이란 사실을 빤히 알면서도 거부하지 못했다.
제 삶을 바꿔 준 이온의 목숨이 걸린 일이었다. 결국 이 선택이 그를 다시 힘들게 할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 옳다고 믿어야 했다.
이것이 그를 잃지 않는 유일한 길이라고.
〈네.〉
〈그래, 착하구나. 카밀루스 발데라스 클로델 자작에게 아이오딘 일대의 영지를 내리고 변경백으로서의 지위를 부여하겠노라. 그 척박한 땅을 지키기 위해 황도를 떠나는 그대의 등 뒤에 오브라이언의 모든 기사들이 경의를 표할 것이다.〉
〈…….〉
버니언의 입가에는 미소가, 카밀루스의 눈에는 눈물이 어렸다.
황제가 카밀루스의 어깨에 놓였던 손을 올려 아이의 작은 뺨을 쓰다듬었다. 그러면서 눈을 굴려 아들의 얼굴 곳곳에 있는 자신의 얼굴과 다른 부분을 훑었다.
황제의 눈은 지극히 사랑했던 한 여인을 떠올리는 듯이 짙은 안타까움으로 물들었다.
〈넌 네 어미를 참 닮았다.〉
작게 어린 한숨마저 진심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카밀루스는 그것이 기만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이온을, 살려 주세요.〉
〈걱정 말거라. 네 힘으로 그 아이는 일어날 수 있을 테니.〉
〈…….〉
〈그건 네 힘이지, 그렇지 않니?〉
아비가 꾹 눌러 잡은 어깨가 타는 듯이 아파 왔으나 카밀루스는 이를 악물고 고통을 눌러 참았다. 제 무능을 고하는 일을 앞두자 피가 고인 것처럼 목이 메었다.
〈……네.〉
대답을 하는 카밀루스의 고개가 떨구어졌다.
영상은 거기까지 이어지고 사그라들었다. 내내 무표정한 얼굴로 보고 있던 이온은 구슬이 완전히 빛을 잃은 뒤에도 한동안 아무런 반응을 내놓지 않았다.
욤뇽이는 그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는지 구슬을 다시 앙 삼킨 뒤 이온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꾸.”
그제야 이온이 고개를 내려 욤뇽이와 눈을 마주했다. 잠시 후 뱉어진 이온의 말은 차디찼다.
“왜 나한테 이걸 보여 주는 거야? 카밀루스가 전달하라고 했어?”
제 의도가 완전히 다르게 해석되자 욤뇽이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작은 날개를 파르르 떨었다. 그러나 영상을 보고 난 이온은 가슴속의 화가 치밀어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말았다.
“그래서, 카밀루스가 아이오딘으로 떠나서 다시는…… 안 온다고?”
“꾸…… 꾸.”
욤뇽이가 안절부절못하며 이온을 올려다보았다. 이온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녀석의 보석안에 담긴 반짝임이 마치 제 안에 잠자고 있던 죄책감을 일깨우는 느낌이었다. 비겁이라는 이름의 장막 뒤로 숨어 외면해 버렸던 현실을.
이온이 욤뇽이의 몸을 꽉 붙잡고 제 원망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그걸 알려 주고 싶었던 거야? 결국은 네 주인이 나 때문에 그 추운 북부로 갔다고? 너도 나를 원망하고 싶어?”
“꾸우!”
빠르게 내질러진 이온의 질문들에 욤뇽이가 당황해 눈물을 글썽거리며 도리질을 쳤다.
안다, 알고 있었다. 욤뇽이는 그냥 모든 선택이 이온을 위한 것이었다고, 카밀루스가 자신을 버린 게 아니라고 말해 주고 싶었던 것일 터였다.
하지만 이온은 화가 나는 것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인사도 안 하고 갔으면서!”
그 분노는 바로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 원망의 화살은 다른 누구도 아닌 스스로에게 쏟아져야 마땅했다.
이온은 스스로의 무력감에 미쳐 버릴 것 같았다.
구원자. 기적.
카밀루스가 그렇게 말했었다. 하지만 그는 그 기적적으로 약한 구원자 때문에 다시 굴레에 스스로 속박되었다.
그럼 대체 너는, 왜 그곳에서 나왔나.
결국 이렇게 될 건데.
[카밀루스 발데라스 클로델과의 재회(2/3)]
[카밀루스 발데라스 클로델과 앞으로 1회의 만남을 더 이어 가십시오.
단, 대상자와 1미터 이내의 거리에서 열 문장 이상의 대화를 나누어야 만남으로 간주됩니다.]
[본 퀘스트의 완료 여부는 플레이어의 생존에 영향을 미칩니다.]
퀘스트창을 올려다본 이온은 허무함에 실소를 참지 못했다. 하하, 입에서는 웃음소리가 흘러나오는데 눈에서는 투명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너를 찾으러 갈 수 없다.
이렇게 약한 몸으로는, 가다가 네 머리카락 한 올조차 보지 못하고 그대로 죽어 버릴 테니까.
누구의 도움 없이는 삶을 이어 가지도 못하는 나는 멀리 떠나 버린 너를 도저히 찾아갈 수가 없다.
남의 호의에 기생해서 살아가야만 하는 나는…….
“헉, 헉…… 헉…….”
웃음이 그치고 마침내 울음이 그것을 뒤덮었을 때, 이온의 몸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숨이 막혀 공기를 들이켜려는 입이 저절로 벌어지고 금세 과호흡으로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아, 아악…… 아, 헉.”
이온이 정신없이 침대 옆의 협탁에 손을 뻗었다. 떨리는 손이 그 위를 더듬다가 작은 종을 잡았다.
손이 닿자마자 작은 자극에도 달랑, 소리가 났다. 그러나 완전히 손아귀로 들어오지 않고 마구잡이로 이루어지는 이온의 손짓에 종이 바닥에 떨어졌다.
이온은 시야 끝으로 침대 밑에 떨어진 종을 내려다보며 몸을 꺾었다. 욤뇽이가 급히 종을 향해 날아가는 것이 보였으나 그것을 치기 전에 다행히 이온의 방 문이 활짝 열렸다.
“도련님!”
들어온 버틀러는 이미 침대 위에 쓰러져 버린 이온을 향해 달려왔다. 이온은 또다시 꺾여 버린 제 세상 안에서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다음에 다시 만난다면, 그러는 날이 온다면 그때의 나는 너의 희생과 호의 없이 살아갈 방법을 찾아낸 뒤일 것이라고.
반드시.
반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