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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구구구궁…….
무거운 황성의 문이 열리고, 황제가 타 있을 화려한 마차가 그 사이를 굴러 나왔다. 그리고 그런 황제의 뒤를 황실을 지키는 노아 기사단의 긴 행렬이 따랐다.
좀처럼 쓰러질 것 같지 않았던 오브라이언의 황제가 병으로 침상에 누웠다는 소문이 나고 1년 반째. 그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소문이 공공연한 비밀로 도는 가운데, 황제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사생아라고 알려진 제 첫째 아들이 있는 북부 아이오딘으로의 행차를 결정했다.
오늘은 그곳을 향해 출발하는 첫날이었다. 사람들은 오랜만에 황성 밖으로 나온 황제의 행차를 보기 위해 구름처럼 모여 있었다. 딱히 축제의 날도 아닌데 여기저기 와글와글한 분위기였다.
“황제께서 갑자기 왜 아이오딘으로 가시는 거지?”
“죽을 날을 받아 보고 나니 아들이 그리워지신 것 아니겠어?”
“듣자 하니 변경백이 북부에서 그렇게 엄청나다면서?”
“말도 마, 그분이 아이오딘으로 간 뒤로 근처 도시에 몬스터 습격이 한 번도 없었다잖아.”
더불어 여기저기서 현재 아이오딘을 지키고 있는 변경백, 카밀루스 클로델의 이야기가 들려오자 이온은 잠시 발을 멈췄다.
“…….”
카밀루스가 황도를 떠나고 벌써 8년이 흘렀다.
이제는 지나가던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만큼 그의 명성도 꽤 드높아졌다.
“도련님, 여기로.”
호위 기사인 에렌스트 경이 손짓하며 부르는 소리에 이온은 아, 하고 작게 탄성을 흘리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나아간 그의 녹안이 황제가 탄 마차를 향했다.
곧 사람들 앞에서 마차의 문이 활짝 열리고, 아프다는 황제가 모습을 드러내 손을 흔들자 사람들이 환호성을 터뜨렸다.
“와아아아!”
“황제 폐하 만세!”
그것은 20년이 넘도록 나라를 잘 다스린 군주를 향한 경외의 표현이었다.
이온은 귀를 먹먹하게 하는 환성을 들으며 시선은 정면으로 둔 채 제 옆의 에렌스트 경에게 질문을 던졌다.
“정말로 황제가 아이오딘으로 가는 게 맞아?”
제 손으로 북부로 추방했던 아들을 찾아간다는 것이 영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것도 다 죽을 때가 되어서. 하여 소식을 들은 이후로 혹시 다른 목적이 있는 건 아닌가 의심했지만…….
“네, 도련님. 저도 믿기지 않아 여러 경로로 알아봤습니다만, 아이오딘으로 향하기로 한 건 분명합니다.”
이온은 천천히 마차의 진로를 따라 걸으면서 마차 안에 앉은 황제의 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8년 전 처음 보았을 때도 나이가 꽤 들어 흰머리가 희끗희끗했었는데, 이제는 오히려 검은 머리를 찾기가 더 어려웠다. 그뿐인가. 그 추상같은 모습은 어디로 가고, 병상에 누워 있는 동안 몸이 쇠약해져 몰골도 말이 아니었다.
가는 팔과 주름진 얼굴, 그리고 확연히 생기가 빠진 눈까지.
그 모습들을 눈에 담으며 이온이 냉정히 평가했다.
“……황제는 이제 살아 봤자 반년도 못 가. 그런데 이 시점에 그렇게 내쫓으려고 했던 아들을 찾으러 간다고? 버니언의 표정이 볼만하겠네.”
“안 그래도 요즘 더 난폭해졌다더군요. 얼마 전에는 황후궁 시녀로 있던 가이시엔 백작가 영애가 황태자의 눈 밖에 나 내쫓겼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길래.”
황실 내의 일을 말하는 것이라 조심스러웠는지 이온에게 더 몸을 붙인 에렌스트 경이 작게 속삭여 왔다.
“파란색 천에 검은색 레이스가 달린 드레스를 입었다고 합니다. 그게 꼭 변경백을 떠올리게 한다고, 그를 섬기는 게 아니냐고 몰아붙였다는군요. 그 뒤는 뻔하죠.”
“미쳤네.”
하, 하고 작게 실소를 뱉은 이온이 뒤로 돌아섰다. 더는 구경하지 않겠다는 뜻을 내비치자 에렌스트 경이 다시 앞길을 뚫어 주었다.
그렇게 인파를 거의 다 빠져나왔을 때였다.
“도련님!”
에렌스트 경의 외침 소리에 흠칫했던 이온의 팔이 다음 순간 누군가에게 덥석 잡혔다. 상대를 확인할 틈도 없이 끌려간 이온은 곧장 누군가의 단단한 몸에 부딪혔다.
“읏!”
“역시 왔잖아, 이온.”
“……!”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 이온이 미간을 확 구겼다. 그러고 순식간에 제 어깨까지 감싼 상대를 올려다보았다. 곧바로 짜증 나는 면상이 제 시야에 들어왔다.
“전하.”
상대는 버니언이었다. 키가 큰 그가 이온을 안은 채 웃으며 내려다보고 있었다.
인식하자마자 이온은 곧바로 제 어깨에 올라온 그의 팔을 탁 쳐 내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나려 했다. 그러나 사람이 많은 탓에 누군가와 등이 부딪히자 몸이 비틀거렸고, 그 틈을 노린 버니언이 다시 이온을 끌어당겼다.
에렌스트 경이 뒤늦게라도 이온을 보호하려 했으나 황태자에게 칼을 들이댈 수는 없는 노릇이라 손쓸 방도가 없었다. 그 때문에 더 의기양양해진 버니언이 눈을 휘어 웃어 보였다.
“역시 넌 멀리서도 잘 보이더라, 이온. 예뻐서 그런가?”
“손, 놓으시죠. 불쾌합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희롱하는 말을 뱉은 버니언에게 이온이 미간을 확 구겨 보였다. 그러고는 대놓고 요구 사항을 말했으나 버니언은 눈치 보는 척도 하지 않았다.
“일단 나가자. 여긴 너한테는 너무 힘든 곳이니까.”
버니언이 이온의 손을 잡고 인파 밖으로 그를 끌고 나갔다. 에렌스트 경이 놓치지 않기 위해 서둘러 뒤따라오고 있었으나 이온에게 도움은 되지 못했다.
이윽고 한적한 곳에 도착한 뒤 이온은 버니언의 손을 다시 한번 뿌리쳤다. 방심한 사이 놓친 버니언은 어느새 에렌스트 경을 앞세운 이온을 보면서 슥 미소 지었다.
“황제 폐하의 행렬에 관심 없는 척하더니, 역시 궁금했었나 봐?”
이온은 들으며 시야 한구석에 펼쳐진 시스템창을 보고 어이가 없어졌다.
[상태 이상: 호의]
[버니언 퍼렌도 클로델이 플레이어에게 호의를 느낍니다.]
저걸 호의로 파악하다니 시스템도 맛이 간 거 아니야?
이미 수년간 써 왔으니 고장 날 만도 했다.
이온은 제 앞에 뜬 메시지를 애써 부정하며 대꾸했다.
“……그냥 가던 길에 잠시 구경한 것뿐입니다.”
이온은 이렇게 버니언을 만날 줄 알았으면 구경도 하지 말 걸 그랬다고 후회했다.
“내가 보고 싶었던 건 아니야?”
“제가 미쳤습니까?”
“난 너 때문에 미치겠는데.”
“…….”
말하면서 버니언이 한 발짝 다가오자 이온도 그만큼 물러났다. 에렌스트 경은 둘 사이에 더 깊숙이 끼어들어 사이를 막았다. 다음에 입을 연 건 에렌스트 경이었다.
“전하, 도련님께 바로 뒤에 일정이 있으셔서 서둘러 이동해야 합니다. 양해해 주시겠습니까.”
“뻔한 걸 왜 물어? 난 당연히 양해 못 하지.”
“가자, 알렉.”
말이 안 통하면 무시가 답이다. 수년간 그를 상대하면서 그것을 깨달은 이온이 아예 황태자와 반대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어차피 길은 돌아가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몸을 돌리려는 이온의 뒤로, 다시금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체 내 청혼서에 대한 답변은 언제 오는 거야?”
발이 멈칫했다. 이온은 시선만 버니언을 향했다.
“그런 장난질에 제가 장단을 맞춰야 하는 거였나요?”
“장난이 아니니까 하는 말인데?”
버니언은 특유의 가벼운 말투와 껄렁대는 태도로 받아쳤다.
실제로 며칠 전 버니언으로부터 결혼하자는 헛소리가 담긴 편지가 이온의 앞으로 오긴 했었다.
오브라이언의 황태자 버니언 퍼렌도 클로델이 크레이거 가문의 이온 제멜 크레이거에게 청혼의 뜻을 전달하는 바요.
이온은 당연히 보자마자 질 나쁜 장난이라고 생각하고 황가의 인장이 찍힌 그 청혼서를 쫙쫙 찢었다. 이런 시시껄렁한 이야기로 근심을 늘릴 필요는 없으니 크레이거 공작에게도 말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귀족들 중에 남첩을 들인 이들이 종종 있긴 하지만, 당연히 정식 부인으로 들인 이는 한 명도 없었다. 그나마도 황태자씩이나 되는 인간이 할 짓은 전혀 못 되니, 그게 장난이 아니라면 뭐란 말인가.
하지만 버니언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계속 지껄였다.
“나한테 시집오면 잘해 줄게, 이온. 네가 내 아이를 낳아 줬으면 좋겠어.”
이온은 작게 하, 하고 비웃음을 흘리고는 표정을 굳혔다.
“이지가 흐려지신 게 아닌지 궁정의에게 진찰이나 받으시길.”
그러고 더는 상대하지 않고 걸어갔다. 에렌스트 경이 옆으로 따라붙으며 같이 황당해했다.
“대체 왜 저러는 걸까요?”
“저 자식 생각은 내 알 바 아니야.”
냉정히 일갈한 이온은 시장 쪽으로 걸어갔다. 몇 걸음 안 가 금세 숨이 차서 심호흡하자 에렌스트 경이 얼른 이온의 손을 잡아 부축하는 자세를 취했다.
“괜찮으십니까, 도련님.”
[현재 플레이어가 사망할 확률은 24%입니다.]
이온은 집에서 나올 때보다 조금 높아진 수치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