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온은 그간 이온 크레이거의 몸으로 살아오면서 몇 가지 규칙에 대해 깨달았다.
하나는 정신을 확실히 잃는 건 사망 확률이 50퍼센트 이상일 때라는 점. 그 이하일 때도 실신하는 경우가 없지는 않았지만, 50퍼센트 이상일 때는 한 번도 깨 있었던 적이 없었다.
두 번째는 35퍼센트부터는 운신이 점점 힘들어진다는 점이다. 여기서 더 무리하면 기절하는 식이었다.
그러니 아직 11퍼센트 정도의 여유가 있는 셈이다.
이온은 손수건을 꺼내 입을 가려 기침한 뒤 질문을 던졌다.
“그보다, 공연이 언제 시작된다고 했지?”
골목길을 돌 때에 에렌스트 경이 능숙하게 이온의 몸에 망토를 얹고, 후드를 뒤집어쓰게 해 얼굴을 가려 주었다. 그러고 이온만 들리도록 목소리를 한껏 낮추었다.
“30분 뒤입니다. 관중 쪽에도 몇을 두기로 했고, 한 녀석은 무대에도 올라갑니다.”
“알겠어.”
그들의 발은 점점 뒷골목으로 향했다. 에렌스트 경 역시 검은 천을 뒤집어써 기사복을 가렸다. 얼마 안 가 거리에는 낮인데도 향락의 냄새가 풍기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취한 자들이 길거리에 널려 있었고, 문을 활짝 열어 둔 건물 안에서는 싸우는 소리와 신음 소리가 뒤섞여 났다.
이온은 그 사이를 묵묵히 걸어갔으나 오히려 에렌스트 경이 바짝 긴장했다.
“도련님, 몸도 안 좋으신데 직접 가실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이번엔 위험해 보입니다. 듣자 하니 노아 기사단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던데요.”
“노아 기사단이? 어째서.”
“이런 거리니 뻔하죠. 요즘 황태자도 약을 찾으러 다닌답니다.”
“무슨 약? 그 녀석도 갈 데까지 갔나?”
“공교롭게도 도련님과 같은 약을 구하려는 모양입니다. 신체의 마나 수용력을 높여 주는…….”
에렌스트 경의 대답에 이온이 미간을 좁혔다. 자신과 같은 것을 찾고 있다니.
우연일까?
그야 아직도 북부로 간 카밀루스에 대한 열등감을 종종 내비치는 그이니 단순히 힘을 얻고 싶다는 이유로 구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꺼림칙한 것은 사실이었다.
“내부에 배신자가 있는 거라면 반드시 색출해 내.”
“예, 알겠습니다.”
그러고 에렌스트 경은 단지 걷는 것만으로 점점 숨이 차 힘들어하는 이온을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이온은 8년 전 누가 걸었는지 모를 저주 때문에 아프기 시작해서 내내 몸이 좋지 못했다. 그 때문에 성장도 제대로 하지 못해 아직도 여리디여린 데다 체구가 작아 얼핏 소년처럼 보이기도 했다.
“도련님, 제가 안아 드리겠습니다. 더 걷기는 무리이신 것 같습니다.”
이온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은 괜찮다고 했잖아. 그보다, 이번엔 진짜였으면 좋겠네.”
“예, 그렇지만.”
인간의 마나를 제어하는 일과 관련한 것은 거의 모두가 금지된 술법이고, 그 위험성 또한 높다. 단지 약이나 방법을 구한다고 해서 모든 일이 해결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아마도 진짜일 확률은 역시 낮지 않겠습니까.”
직언을 하는 에렌스트 경의 마음도 그리 좋지는 않았으나 이온도 알고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 것을 구한다고 해서 그에게 걸린 강력한 저주가 풀리지도 않을 터였다.
그러나…….
황제의 사생아인 카밀루스 클로델이 북부로 떠난 뒤 한 달쯤 지났을 때였을까. 에렌스트 경은 겨우 병상을 벗어난 이온이 자신을 불렀을 때를 떠올렸다.
몹시도 지친 얼굴. 하지만 눈빛은 이전과는 분명히 달랐다. 더는 모든 일이 잘 해결되리라 믿는 순진한 어린아이의 것이 아니었다.
〈에렌스트 경, 그대가 나의 편이 되어 줬으면 해.〉
〈저는 기사로서 크레이거 가문에 충성을 맹세했으니 이미 소공작의 편입니다.〉
첫마디의 의미를 에렌스트 경은 충분히 짐작했으나 원론적인 말로 선을 그었었다. 그러나 공작가의 영특한 아이는 그 함의를 바로 간파하고 제가 원하는 방향으로 대화를 이끌었다.
〈아니.〉
〈……?〉
〈아버지의 편이지. 나는 그대에게 가문이나 각하를 향한 충성을 요구하는 게 아니야. 나에게, 이온 크레이거에게 충성을 바치라는 의미야.〉
〈…….〉
〈에렌스트 경, 앞으로 오로지 나를 위해 일해 주었으면 해. 나에게 온 마음을 다 바쳐 줬으면 해.〉
〈소공작.〉
솔직히 말하면 다소 당혹스러웠다. 에렌스트 경은 그를 몇 번 도와주긴 했지만 그건 그저 갑자기 병상에 눕게 된 어린아이가 안쓰러워서였을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른 문제는.
〈나는 지금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지. 나의 이런 말이 그대의 귀에는 우습게 들릴지도 몰라.〉
이온이 곧바로 지적한 대로 그에게는 이온에게 충성할 이유가 하등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차마 그 이야기를 대놓고 하는 건 썩 잔인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에렌스트 경은 일단 부드럽게 달랠 생각을 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소공작.〉
하지만 이온은 제법 단호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약속하지. 이온 크레이거는 계속해서 이렇게 살지는 않을 거야. 반드시, 강해질 거야.〉
강함. 조금만 걷고 뛰어도 쓰러질 지경까지 가는 이온의 입에서 나오기엔 다소 적절하지 않은 단어였다.
〈강함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어. 내가 말하는 건 육체적 강함은 아니야. 그렇지만 돈과 권력, 그리고 정보를 쥐면 내 몸 하나 정도는 지킬 수 있겠지.〉
이온은 그리 말한 뒤 앞으로의 계획 일부를 그에게 들려주었다.
허무맹랑한 이야기들이겠거니 생각했던 건 그의 착각이었다. 이온의 인식과 계획은 지극히 현실적이었다.
공작가의 가신들 중 어떤 사람을 어떻게 자신의 사람으로 포섭할지.
공작가가 지닌 재력을 어떤 방식으로 제 지배하에 놓을지.
그것을 이용해 어떤 일들을 행할지.
고작 13살 된 어린아이의 통찰력으로는 나올 수 없는 발언들의 연속이었기에, 에렌스트 경은 들으면서 꽤나 놀랄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는 결론을 내렸다. 크레이거 공작가의 후계자는 지금껏 그가 본 그 어떤 사람보다도 똑똑하고, 현명한 사람이라고. 지금은 아닐지 모르지만 분명 가까운 미래에, 제 목숨을 걸어도 아깝지 않을 사람이 되어 있을 거라고.
〈나를, 믿고 따라 주겠어?〉
하여 이온이 그리 물었을 때, 에렌스트 경은 무릎을 꿇고 머리를 깊이 숙였다.
〈저의 충성을 원하신다면.〉
그 뒤로 이온은 조금이라도 몸이 나아지는 날에는 집 안으로, 밖으로 돌아다니며 수많은 인맥을 만들어 나갔다.
16살이 되었을 때에는 크레이거 공작가의 유일한 후계자로서, 그 탁월한 머리로 공작이 가르치는 것들을 전부 흡수했다. 이온은 그렇게 가업을 이을 준비를 이어 갔다.
만약 그가 이룬 것이 여기서 끝났다면 그도 결국 집안의 후광으로 잘나가는 그저 그런 사람에 불과하다는 평가를 받았을 터였다.
이온은, 하지만 그렇게 평범한 이가 아니었다.
서서히 공작가의 자금줄을 제 손에 움켜쥐더니, 마침내 거의 모두가 이온의 것이 되었다고 확신했을 때였다. 오브라이언의 수도 내에는 새로운 길드가 하나 창설된다.
라치크 길드.
처음에는 평범하게 사람 혹은 물건을 찾아 주는 흥신소나 구인·구직을 돕는 인력 중개소, 혹은 물건을 원하는 위치에 가져다주는 배달소 역할을 수행하는 정도의 평범한 길드에 불과했다.
그러나 튼튼한 자본을 바탕으로 빠르게 오브라이언 제국 내의 크고 작은 도시 곳곳에 파고든 길드는 금세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고, 소속 인원만 수만이 되었다.
사람들은 대체 누가 이런 길드를 창단했는지 궁금해했으나 라치크의 길드장은 공식 석상에 언제나 대리만 내세웠을 뿐 정면으로 나선 적이 없었다.
사실 이 길드는 흥신소도, 인력 중개소도, 배달소도 아니었다. 그들은 앞에서는 정상적인 길드인 척 제국 곳곳에 거미줄 같은 유통망을 펼쳐 놓고, 뒤에서는 그 경로를 이용해 고위 귀족들과 검은 거래를 해 나가며 부를 쌓았다.
그리고 더 뒤에서는 그 활동을 통해 얻어 낸 저질의 소문과 양질의 정보를 이용해 그들이 바라는 대로 소문을 퍼트리고 원하는 정보를 캐내는 거대한 정보 길드의 역할을 했다.
불과 5년 만에 이러한 활동이 가능하도록 한 것이 라치크 길드의 베일에 싸인 창단자, 이온 크레이거였다.
최근에 일어난 모종의 사건으로 뒤늦게야 길드의 목적성을 의심한 황실이 찾으려고 혈안이 된 사람 또한 바로 그였다.
“콜록, 콜록…….”
“도련님, 이것을.”
문득 이온에게서 기침 소리가 심하게 들려왔다. 그에 에렌스트 경은 조용히 이온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숨을 틔워 주는 스프레이였다.
“고마워, 하아…….”
이온은 곧장 가져가 입 안에 뿌린 후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에렌스트 경은 생각했다.
오브라이언의 귀족 사회를 뒤에서 흔들고 있는 것이 이 작고 연약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감히 누구도 짐작하지 못하리라고.